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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엡3: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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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11.9 |
에베소서 전반부의 결론에 해당되는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 드린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선 바울에 버금가는 영적 통찰력이 우리에게도 주어져야 하는데, 사실 우리는 영적으로 상당히 미숙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는다면 우리의 인식능력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 활동하심으로써 이 말씀에 상당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읽기와 설교가 매번 마다 완전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부분적인 깨달음으로 만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겸손함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봅시다.내면적 삶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20절에서 다시 한번 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특히 우리가 내적으로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철학적으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지, 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지, 또는 그 이외의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저는 여기서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무엇이며, 그것이 강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해가 그렇게 정확하지 않거나 때로는 왜곡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선입견 없이 성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낱말 자체가 가리키고 있는 사실적 차원에서부터 생각하겠습니다. 내면적인 삶은 외면적인 삶의 반대라고 보면 일단 옳습니다. \외면적인 삶, 그런 세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먹고, 마시고, 학교에 다니고, 돈버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모임을 만들고, 서로 어울려서 지내는 그런 삶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외면적인 삶을 확대시키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둡니다. 그것이 성취되면 나름대로 만족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거나 불안해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갖고 살기 때문에, 또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외면적인 삶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런 외면적인 삶만이 아니라 훨씬 실재적인 내면적인 삶이 있습니다. 그런 내면적인 삶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실재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생명이 요구하는 것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더 질문합시다. 이런 내면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프로이트나 융 같은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우리의 무의식이나 심리상태 같은 것들을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심층심리학은 오히려 외면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심리상태는 우리의 의학적 기술로 처리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성서가 말하는 내면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정보나 심리학적 연구에 의해서 처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외면적인 세계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보다 정신과 의사나 치료사를 찾아가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세계가 내면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하면서도 훨씬 궁극적인 삶의 세계가 곧 성서가 말하는 내면적인 차원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정신이나 마음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이 곧 내면적인 삶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의 삶
영적인 차원이라는 대답만으로 이와 관련된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 삶의 내면적인 차원에 대해서 좀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하게 게 알지는 못하지만, 다만 오늘 본문의 17절에 기대서 부분적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거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반부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사실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내면적인 삶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그런 삶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우리의 마음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그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의 삶이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장소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가 내재할 수 있는 그런 삶의 영역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같은 17절 후반부에 있는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훨씬 실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앞부분과 연결해서 이 구절을 해석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살아감으로써 사랑의 힘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그 어떤 영역이 곧 우리의 내면적 삶입니다. 우리의 삶 중에서 사랑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기초가 되어서 모든 삶이 이끌려갈 수 있는 그런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줄여서 말한다면 사랑이 활동하는 삶이 곧 내면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통일된 인격에서 무엇이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것인지 '칼로 무 자르듯이' 구별해낼 수는 없지만, 오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사랑이 뿌리를 내리고 그 기초가 잡힐 수 있는' 삶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때에 따라서는 보이지 않게 나타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보이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내면적인 부분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듯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몸과 영혼이, 우리의 외면적인 삶과 내면적인 삶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과연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음씨가 따뜻하거나 동정심이 많거나 이해심이 많으면 사랑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성품들이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만으로 사랑의 뿌리가 깊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들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교육 여하에 따라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의 조상들은 충효를 가장 귀한 가치로 여겼습니다.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보이고 부모에게 절대적인 효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충효 이념이 생명을 살리는 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열녀문이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젊어서 남편이 죽으면 평생 수절하거나 아니면 같이 자결하는 여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국가에서 열녀문을 세웠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겠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모든 태도는 시공간적인 한계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야만'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옴으로써 이제 사랑의 능력이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독단적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사랑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어도 역시 사랑의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보면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나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심리작용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어떤 세계이며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야만 사랑에 뿌리가 잡힌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옳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넓이, 길이, 높이, 깊이는 하나님의 네 차원에 대한 표현인데, 마틴 루터에 따르면 이 네 차원은 하나님의 보편성(Universalit t), 그 본질의 무한정(Grenzenlosigkeit), 그 행위의 비소진성(Unersch pflichkeit)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면 이런 하나님의 네 차원을 깨닫게 된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도대체 사랑과 하나님의 신비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에 뿌리는 내린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17절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의 자기욕망과 자기집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우리 삶의 토대로 삼게 됩니다. 사랑이 단지 몇 가지 본보기가 될만한 행동을 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움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의존함으로써만 사랑의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에 뿌리를 내린다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편리하게 살아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상품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신앙 상태를 일찍이 본훼퍼는 '자동응답기' 신앙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신비는 오간 데 없고 단지 자본주의의 신처럼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낼 경우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지적 능력이 아무리 하늘을 날 것처럼 출중하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진리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저의 둘째딸 지은이는 스스로 똑똑한 척, 무언가 세상이치를 아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생각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애에게 무언가를 보여야만 그나마 조금씩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초월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초월'이라는 말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언짢게 들립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과 종교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할 때 쓰는 용어쯤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는 말이 그렇게 이상한 걸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명'이나 '진리'로 바꾸어보십시오. 생명과 진리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 일상의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확실한 대답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유전자를 조작할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무언가를 참된 것을 깨달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현대인이 과학적으로 철이 들은 것 같아도 아직 물질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헬라 철학자들이 '원소'라고 불렀던 그 물질의 최소 단위가 얼마나 더 작아져야 하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어디 그것 만이겠습니까? 역사의 과정도 역시 우리의 지적 한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 모순, 그 갈등, 긴장, 우연과 필연의 관련성을 우리는 도저히 풀어낼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학문과 과학이라고 하는 분야는 이미 드러난 부분적인 현상을 분석하거나, 그 분석에 근거해서 미래를 약간 예측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예측이라는 것도 대개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만 확률적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1억년 후의 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그 미래는 우리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서도 이 초월이라는 말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에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주 추상적이고 막연한 차원으로 떨어져버립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이런 초월성의 한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구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구체적 사건 앞에서 막연하게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또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야"라는 말로 현실을 모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그 뿌리가 깊습니다. 이미 2,3세기 초기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이런 탈역사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결국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의 초월성만 강조함으로써 역사 한계성 및 내재성을 훼손시켰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대단히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이렇게 예수님의 초월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고, 소위 '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라는 명제를 정통 교리로 선택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단지 초월로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함께 하는 활동으로 생각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바울의 기도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참으로 놀라운 기도입니다.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식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힘차게 활동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됩니그런데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제일 행복한 것으로 무엇을 생각합니까? 얼마나 넓은 아파트에 살아야 만족하고 행복할까요?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여야 충분하다고 생각할까요? 이 땅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껏해야 '에덴 동산'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에 불과합니다. 배고픔도 없고, 죽음도 없고, 모든 게 풍족한 세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경험 세계 안에서만 생각해낼 수 있는 최상의 행복입니다만, 그것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조건으로 인간이 참되게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표상과 언어에 속한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가장 좋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미래는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바울은 그 미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위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말할 뿐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신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풍성함은 궁극적인 미래의 일일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에 묶여 살아간다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그런 영적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새로운 깨달음과 기쁨과 평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바로 이런 신뢰 안에서 사는 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내면적인 삶'이 굳세게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성령을 통해서 내면적인 세계가 튼튼하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참된 희망을 알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의 삶이 단절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삶이기 때문에 은총입니다. 저도 바울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풍성함과 은총이 넘치기를 빕니다. <200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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