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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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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7월 23일 주일3부 설교 |
-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욕망이란 우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당한 이유는 다른 여러 죄도 있지만 근본적인 죄가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변의 원수들을 다 정복하고 태평성대의 나라를 만들어서 그 아들 솔로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가 넘치는 삶을 살았고 나라도 견고하였습니다만 그의 만년에 나이가 많아져서 마음이 느슨해지고 조금 치매 끼가 있을 때에 수많은 이방 처들의 유혹으로 여러 우상을 숭배한 고로 그의 아들 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도 엄청난 우상숭배를 하다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유다도 계속된 우상숭배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은 맹렬한 투기로 멸망시키십니다. 오늘 우리는 은, 금, 동의 우상은 섬기지 않는다고 해도 더 사악하게 자기 욕망이란 우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은 “우리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과 같아서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은, 금, 동, 철의 우상은 섬기지 않는다 해도 더 사특하게 자기 욕망이란 우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세운 그 어떠한 것이라도 우상이 됩니다. 내 아내도, 내 남편도, 내 자식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우상이 됩니다. 내 직업도 내 취미도 내 사업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우상이 됩니다. 우상에 절하면 그때부터 모든 불행과 슬픔과 고통과 환난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욕망의 우상과 아담
아담의 범죄는 자기 욕망이란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우상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마귀가 꾀이기는 꾀했어요.
창 3: 4~ 5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꾀했습니다만 결국에 마음속에 탐욕이란 우상이 없었으면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탐욕이 있었습니다. 사람이면 자기 분수대로 사람으로 살아야지 분수를 뛰어넘어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욕망의 우상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이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만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보면 바홈이라는 농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제법 넓은 토지를 장만한 사람인데, 항상 더 많은 땅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주야로 그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얼마간의 돈을 내면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한걸음에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의 지주는 농부에게 “당신이 하루 종일 걸어 다닌 만큼의 토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 평의 땅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농부는 새벽부터 도시락을 차고 될 수 있으면 많은 땅을 걸어서 소유하려고 뛰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해도 ‘아니야! 내가 지금 쉬면은 땅을 더 얻을 수가 없다. 뛰어라. 뛰어라.’ 나중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턱에 닿아도 자기를 채찍질하고 뛰었습니다. 대낮에 햇볕이 쬐고 땀은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도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밥을 먹으면 그만큼 땅을 더 많이 밟을 수가 없다.’ 그래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채찍질해서 뛰었는데 해거름이 되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돌아갈 길이 멉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어서 해가 막 지기 전에 많은 땅을 밟고서 결승점에 도달하면서 ‘나는 큰 땅 부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픽 쓰러져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가 묻힌 땅은 한 평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 거대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욕망이란 우상에 절을 하고 목숨을 그 재물에 바쳤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 큰 욕망 앞에 엎드려서 절하고 그 인생을 파멸로 끌어가고 만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역시 자기 욕망이란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우상에 걸려 넘어져 결국 불행과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2. 욕망의 우상과 아브라함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늘 우리가 자랑하고 숭배하는 아브라함도 초년에는 욕망이란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수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네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복주는 자에게 복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는 은총을 받고 그는 출발했는데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100% 순종하지 않고 탐욕이 남아 있어서 50% 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순종해서 가나안땅으로 나가기는 나갔지만 ‘네 전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전토에서 얻은 재산 다 모으고 친척 중에 조카 롯을 데리고 그 아내와 함께 수레에 싣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순종은 했지만 탐욕은 저버리지 못했습니다. 탐욕이란 우상을 가슴에 끼고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과 탐욕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탐욕을 버리도록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다가오게 한 것입니다. 그가 오자마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야훼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그래서 그 땅을 약속받았지만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물이 마르고 풀들이 다 말라 죽어서 짐승들이 먹을 풀이 없으니까 양떼들은 다 굶어죽고 종들은 다 흩어지고 같이 따라온 친척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중에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만 남았는데 아내와 조카 롯이 굶주리고 부르짖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로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가라고 그랬지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말은 안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가나안땅에 머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가나안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갈 것이냐. 기로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 탐욕이란 우상이 도사리고 앉았습니다. 탐욕의 우상은 하나님도 돌보지 않습니다. 무조건하고 탐욕은 우상에 절하고 그 탐욕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탐욕의 우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에서 큰 흉년을 당했는데 그래도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탐욕이라는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와 조카 롯을 위해서 가나안 땅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등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결국은 탐욕의 우상에 절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바로에게 뺏기고 얼마나 모욕과 시련과 환난을 겪었는지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지우래야 지울 수 없는 수치와 곤욕을 당했습니다. 왜, 탐욕이라는 우상 앞에 절을 하면 반드시 수치와 곤욕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도로 돌아와서 그가 10년을 살았습니다. 나이 85살이 되었습니다. 아직 후사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도 늙고 아내도 75살이 되어 너무 늙었습니다. 후사를 얻을 수 없어 걱정이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탐욕이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 아내 사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야훼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
왜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까? 탐욕 때문에 내 후손을 얻겠다. 상속자를 얻겠다는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기다리지 못하고 탐욕에 무릎을 꿇고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첩으로 얻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래와 하갈 간에 암투와 시기와 분노와 질투는 말할 필요 없고 훗날에 이삭의 자손인 유대인들과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 사이에 피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그것이 오늘날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 4천년에 걸쳐 이삭의 자손과 이스마엘 자손은 가나안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습니다. 모세로부터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시대에는 이삭의 자손인 유대인이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뒤부터 이스마엘 자손인 아랍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2천년 동안 그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이 1948년에 나라로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땅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후 이곳 중동지역은 지구촌의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1948년 6일 전쟁으로 시작해서 1956년, 1967년, 1973년 네 차례에 걸쳐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최근 지난 7월 13일에 이스라엘의 레바논에 향한 침공으로 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위기에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자손과 이삭의 자손, 유대인과 아랍인과의 사이에 피 흘리는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가슴을 치지 않겠습니까? 이삭도 자기 자손이요, 이스마엘도 자기 자손입니다. 유대인도 자기 자손이요, 아랍인도 자기 자손입니다. 본처에서 나온 자식과 첩에서 나온 자식이 오늘날 수 천 년을 통하여 피 흘리는 어마어마한 싸움을 하고 골육상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탐욕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하갈을 취해서 아내를 삼고 자식을 낳지 않았으면 이런 비극은 그의 가정에도 없었고 그의 후손들 가운데도 없었고 세계 평화에 위기를 가져오는 이런 비극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대신 육체의 정욕이라는 우상을 쫓아 하갈을 취했던 행동이 낳은 결과인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빗나간 행동인 죄를 낳고 빗나간 행동이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 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들은 마음에 욕심이 딱 들어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욕심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조차도 자기 욕심을 따라 계시를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사거리를 만나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동쪽으로 가야지.’ 그렇게 결정을 하고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팡이를 탁 던질 것인데 지팡이가 향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동쪽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난 다음에 지팡이를 탁 던지니까 지팡이가 서쪽을 가리켰습니다. ‘아이고, 하나님도 실수를 하시네요. 지팡이가 서쪽을 향한 것은 하나님이 실수를 하셨습니다. 다시 던질 테니 하나님 실수하지 마세요.’하고 지팡이를 ‘주여, 믿습니다.’하고 탁 던지니까 이번에는 지팡이가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 또 실수했네요. 또 새로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지팡이를 탁 던지니까 지팡이가 동쪽으로 향하니까 ‘맞았어요. 하나님 실수 안하셨어요. 하나님 올바르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지팡이를 들고 동쪽으로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이미 마음에 결정을 해놓고 하나님보고 그 결정한대로 따라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결정한 마음대로 하나님 결정 안하면 하나님이 실수했다고 하나님 다시 새로 결정하라고 요구를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과 욕망에 따라 살면 결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속에 고통을 당합니다. 육신적인 고통, 가정적인 환난과 시험 고통, 사업과 생활에 고통이 다가오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탐욕이 들어와서 탐욕을 우상으로 삼고 무릎을 꿇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과 탐욕을 겸하여 섬기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은 같이 하지 못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같이 못하며 우상의 정각과 성전이 같이 못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탐욕이란 우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우상을 버릴 때까지 기근과 환난과 모욕과 수치와 곤란을 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탐욕을 겸하며 섬기려고 하다가 가나안에서 기근을 당하고 애굽에 내려가서 온갖 수치와 곤욕을 당하고 하갈을 취하여 자식을 낳아서 탐욕의 자식이 되어 가정의 풍파와 나라에 풍파와 세계에 풍파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왜 평안이 없는가, 기쁨이 없는가. 왜 우리 가정에 이와 같이 풍파가 끝나지 않는가. 왜 내 사업과 생활에 이런 고난이 다가오는가,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가 생각해 볼 때 그 근원이 나의 탐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섬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사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흑암이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은 생명으로 추는 미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안하기 때문에 변화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늘 어두움대로 있고 질서는 없어지고 무질서는 그대로 있고 죽음과 가난과 파멸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3. 위대한 헌신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위대한 헌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헌신이라고 하니까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는 것이 위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하고 고난을 하고 이런 것이 위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것도 필요하지만 위대한 헌신은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따르는 탐욕의 우상을 깨뜨리는 것이 위대한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셨습니까? 그는 최후에 그 마음속에 탐욕이라는 우상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가 100세에 낳은 이삭,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먹고, 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는 아들이 얼마나 좋고 좋은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루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와서 재물로 드려라.’ 청천벽력입니다. 이삭은 바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우상입니다. 얼마나 사랑했든지 생명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는 것은 아브라함은 자기 모든 삶의 희망과 목적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 메시지를 알아들었습니다. 과거에 그가 가나안 땅에서 타협했던 것 그리고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아서 가정에 온 풍파,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탐욕의 우상에 무릎을 꿇으면 시험과 환난이 끝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정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갈 동안에 그는 마음속에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아까운지. 이렇게 100살에 낳아서 이제는 10대 청년으로 자랐는데 얘를 죽여서 재물로 드린다니 너무나 아깝습니다. 너무나 아까워요. 너무나 마음이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 뜻을 저버리고 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나님과 이삭을 겸하여 섬기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사흘 계속해서 나는 것입니다.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니야. 결코 내 탐욕이라는 우상에 절할 수 없어. 나에게는 하나님 한분밖에 계시지 않아.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사람도 내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어. 아무리 이삭이 좋지만 하나님과 이삭을 동시에 섬길 수 없어. 하나님만 섬겨야 돼. 이삭이란 내 탐욕의 우상이 하나님과 동시에 자리를 점령할 수는 없어.’ 그래서 그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눈물을 머금고 장작을 펼쳐놓고 아들을 묶어서 그 위에 얹고 칼로서 그 목을 따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22:12에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우상을 깨뜨릴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줄 하나님은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탐욕의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면 하나님은 ‘아니야. 너는 나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야. 가짜야. 형식이야. 나는 너의 악세사리가 되지. 너의 주가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상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어도 마음속에 기쁨도 행복도 축복도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탐욕을 겸하여 섬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히11:17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와 같은 헌신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보스턴 의 중류층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이 초청을 받자 온 가족들이 다 기뻐하고 친지들이 축하를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 맡자 온 생활이 안정된 중류층의 좋은 교회 부목사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월급도 보장이 되고 집도 보장이 되고 앞날이 보장이 되어서 참으로 복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 목사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겠습니다.” 주의 사업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선교사로 가라고 부르셨습니다. 선교사로 가지 않고 국내에 있으면 반은 하나님을 섬기고 반은 자기 탐욕의 우상에 무릎을 꿇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저드슨의 생활 속에 끝없는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는 안일한 자리를 물리치고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버마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어찌나 복음이 들어가지 않던지, 한 사람을 전도하여 침례를 주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6년 동안 전도해서 겨우 한 사람 구원받고 침례 받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나라에서 복음 전하다가 잡혀서 오랫동안 감옥살이도 하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결국 저드슨의 이러한 헌신은 불교의 나라 버마에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탄생시켰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선교의 불을 켜 놓았습니다. 저드슨이 미얀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일생을 통하여 5만 명을 우상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백성으로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헌신이란 자기 속에 있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크고 적은 우상들을 올망졸망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쾌락의 우상이 되어서 주일날 하나님을 섬기라는데 친구들이 놀러 가자니까 할 수 없이 놀러갑니다. 쾌락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먹는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께 버림 당하겠나.’ 버림은 안당하지요. 그러나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탐욕이 우상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에게 축복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남편이 교회 가지고 마라고 해서 안 간다. 아내가 교회가지 말라니 안 간다. 자식들 때문에 오늘 과외공부를 시켜야 되므로 교회 못나간다. 이러한 올망졸망 적은 우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범하게 생각하고 별 것 아니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크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타협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타협할 수 없는 조건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섬기는 개인이나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상에 절하는 자는 그가 아무리 몇 배로 교회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축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사람에게 복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 면 이스라엘 첫째 왕 사울은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용감하고 유명한 왕이었습니다만 그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 아말렉을 멸하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아 거의 멸망당할 뻔 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하나님은 사울 왕을 불러서 아말렉을 멸하되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 짐승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명령을 듣고 사울 왕이 출전해서 아말렉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아각을 멸하지 않았습니다. 왕 아각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짐승들을 다 멸하라고 했는데 짐승 중에 살찌고 좋은 짐승은 다 살려서 끌고 왔습니다. 마음에 욕심이 하나님이 명령을 거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세운 것을 후회한다. 그가 자기의 욕심 때문에 나의 명령을 버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15:22~23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야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야훼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인 사울 왕이 탐욕의 우상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도 탐욕에 자기 무릎을 꿇고 탐욕의 명령을 쫓았으므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참으로 쓸쓸하고도 안 된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탐욕하고는 절대로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또다시 아말렉과 동방 사람의 침공을 받았을 때 기드온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부니까 합계 3만 2천명의 사람들이 자원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수가 많다.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전쟁에 이기면 우리 힘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 중에 두려워 떠는 사람은 다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러니까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만 명만 남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만 명도 너무 많다. 이들을 데리고 시냇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하라.” 만 명이 그동안 하루종이 모여 있었으니 목도 마른데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시라 하니까 그중에 9천 7백 명이 무릎을 꿇고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3백 명은 쭈그리고 앉아서 물을 손으로 떠서 개처럼 핥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욕망에 무릎을 꿇은 사람, 목이 마르니까 물가에 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물속에 박고서 물을 마신 사람은 다 집으로 돌려보내라. 욕망에 포로 된 사람 내가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 명령이 떨어지면 순종하려고 쪼그리고 앉아서 기드온을 바라보고 물을 손으로 떠서 개처럼 핥으면서 처다보고 있던 3백 명을 데리고 너는 아말렉을 물리쳐라.”고 한 것입니다. 아말렉은 모래알같이 많았습니다.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수 천만 명이 모였는데 이를 3백 명으로 이깁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3백 명과 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구출 하겠다 했는데 과연 기드온은 3백 명과 더불어서 나갈 때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그 많은 아말렉을 다 물리치고 위대한 승리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승리는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수가 많다고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그 수가 천천이요, 만만이 되어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우상을 저버리고 오직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무엇을 못합니까? 전지전능 무소부지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성경에는 보면 잘 뛴다고 1등하지 않고 군사가 많다고 전쟁에 이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셔야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려면 우상을 제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대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는 우상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속에 있는 모든 우상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속에 탐욕이라는 우상을 저버려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도 내 마음에 더 욕망을 쫓아 갈만한 대상이 있으면 그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보다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은 그 자식과 함께 축복을 주지 않습니다. 직업도 취미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중심에 모시고 남편도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하고 직업도 취미도 취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의 복을 주시고 자식들이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시고 직장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취미가 아름답데 발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아무도 저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고 참으로 잘살려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과 예수님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주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에 우리 개신교신자가 1,200만이라고 하는데 국가 통계청에서는 800만이라고 통계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는데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1,200만이든 800만이든 진짜로 우상을 다 제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짜 선지자들은 아무리 많아봤자 하나님이 관심두지 않습니다. 진짜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 3백 명이 아말렉과 모든 동방 사람을 쳐서 이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진실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성도들이 있으면 여러분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원자탄이나 미사일도 겁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이기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이러한 진실한 신앙을 우리가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4. 욕망의 우상과 그리스도인
우리는 항상 욕망이란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데 오늘 이 시간에 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신을 섬기지요.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신입니다. 하나님 없고 자기가 신이고 자기 인본주의가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사람은 모두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 마음속에 우상을 같이 끼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 탓에, 뱀 탓에 하지만 실상은 자기 탐욕 탓에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과 환난이 우상숭배 때문에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우상숭배가 다가오면 삶의 가치가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가치가 거꾸로 되어서 가정보다도 사업이 먼저오고 직장이 먼저오고 돈이 먼저오고 출세가 먼저오고 그래서 가치관이 거꾸로 되어서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예수님을 먼저 경배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중심에 있으면 가치가 올바르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고 환경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골 3: 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음란하고 부정하고 사욕이 꽉 들어차고 악한 정욕이 들 끊는 이 사회에 이것을 제할 수 있는 길은 이 모든 탐욕의 우상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우리 중심에 들어오면 이런 것은 다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음란은 귀신이 우굴 거리고 부정이라는 귀신이 우굴 거리고 사욕이라는 귀신이 우굴 거리고 악한 정욕의 귀신이 우굴 거리는 것은 다 탐욕을 통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탐욕의 우상을 깨뜨려 버리면 이 우굴 거리는 귀신들은 모두다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볕이 비취면 벌레들이 도망치듯이 다 도망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잡으면 우리 마음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하나님만 섬기고 그 앞에서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눅12:15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부귀, 영화, 공명을 얻으면 내가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고 참 행복하고 기쁠 줄 알았는데 여러분 부귀, 영화, 공명이 넘치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 보았습니까? 돈 있고, 권세 있고 난 다음 음란하고 방탕하지 않은 사람 보았습니까? 부귀, 영화, 공명이 있고 세상 쾌락에 젖어 타락하지 않은 사람 보았습니까? 세상에 부요와 풍성함 속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한 미혹이요,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돈과 명예와 지혜와 권세는 우리를 타락하고 방탕하게 만들며 음란하고 마귀의 종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고 돈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 계시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있고 축복이 있어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축복은 저주가 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녀들을 주일날도 교회에 가지 말고 수능공부해서 출세하라. 출세하라. 그래서 나중에 애들이 다 출세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서 어떻게 됩니까? 가정이 불안하고 이혼하고 또 재혼하고 이혼하고 또 재혼하고 불행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없으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근이 다가오고 수치와 곤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주 예수 없이 여러분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돈도 행복을 가져오고 권력도 행복을 가져오고 좋은 환경도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좋은 집에 있어봤자 아무 좋은 것 없습니다. 주님 없이 좋은 의복을 받자 여러분에게 기쁨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주님 없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 먹어도 별 볼일 없습니다. 주님 없이 아무리 예쁜 여자 갖다 놓아도 행복하지 않아요. 주님 없이 아무리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도 별 볼일 없습니다. 오히려 속만 상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셔야 우리가 진실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엡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 속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사에 위대한 성자며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15년 동안 부정한 여인과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성적인 탐욕의 노예로 살았던 모든 사슬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때 잃어버릴까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제 마음은 정말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모두 몰아내신 주님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주님은 그 어떤 즐거움보다 감미롭습니다. 오, 나의 구원이시여!” 죄의 줄을 끊어 버리자 놀라운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는 자들도 항상 탐욕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하려면 회개하고 주 하나님만 섬기며 그 앞에 절해야 합니다.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를 따를 때 진실로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느낄 수가 있고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자기의 불행이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부모 때문에, 사회와 이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고 자꾸 남의 탓을 돌립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 다 내 탓입니다. 내가 우상이라는 탐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가온 시험과 환난입니다.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삶의 장식품으로 취급하면 절대로 축복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남 때문이 아닙니다. 내 속의 탐욕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까?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탐욕이라는 우상에 절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당했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도 왜 바벨론으로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히고 가나안 땅은 황무지가 되었습니까?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탐욕을 따라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해서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삶에 행복한 터전이 황무지가 되고 우리가 마귀의 포로가 되고 짓밟히고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다른데 이유가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잘못된 재단을 쌓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기에 탐욕이란 우상을 세워 놓고 그 탐욕의 우상에 우리가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부흥을 가져오고 참된 새로움을 가져오고 하나님께로부터 진짜 축복을 받으려면 그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탐욕이라는 우상을 제거하고 그 우상섬긴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나올 때 하나님은 여러분 편에 서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알고도 모르고도 탐욕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겸하여 모시려고 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아브라함도 탐욕의 우상 때문에 가나안에서 큰 환난을 겪고 수치와 곤욕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탐욕이라는 우상을 오늘 이시간 당연히 깨뜨리게 도와 주시옵시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만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하나님과 예수님 이외에 어떠한 탐욕의 우상도 오늘 다 마음속에서 쫓아내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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