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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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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지난 17일 날 터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해 세계에서 지진으로 사망한 사람은 8천9백 2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난 1백년 동안 연평균 1만명이 목숨을 잃는 다고 합니다. 20세기 들어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지진은 지난 76년 발생한 중국의 탕산 (唐山) 대지진으로 25만 5천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번 터키 지진도 수만명의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마자 국제사회는 터키에 구호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은 구조대를 급파했고, 터키와 앙숙관계인 그리스까지 참가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119를 파견하고 구호금 7만 달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7만달러를 우리 돈으로 계산해 보니까 8천 4백만 원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나라를 상대로 지원하는 액수로는 너무 인색한 것 같지 않습니까? 터키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1만 5천명 병력을 파견해 3천여 명이 전사. 전상. 행방불명됐던 나라입니다. 원수같이 여겼던 러시아와 정상 외교를 하면서 거금을 쓰면서 우리를 도와준 나라에 대하여 너무나 인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래도 이만큼 성장하고 이만큼 믿음의 백성이 많아졌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경제도 세계적인 사건이지만 불교와 유교로 황폐화된 영적 터전에서 1/4이 100년 조금 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도 세계적인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일 줄 압니다. 98년 한해동안 전세계에서 영양실조로 숨진 사람은 1800만명이나 되고 99년 현재 세계 저개발 지역의 만성 영양실조 인구는 8억 30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적어도 집이 있고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면 세계적으로 볼 때는 최상위 생활자 10% 안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였습니다(5.8) 1절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절 보니까 죄와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였던 사람들입니다. ⓐ 이 세상 풍속을 좇았고(2)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2) ⓒ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3) 사람들입니다. 사형 선고를 당하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방치되었습니다. 고아와 같았습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유기 되었습니다. 버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너희(1.2) 우리(3) 다른 이들(5) 모두 포함됩니다.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5) ②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6) ③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6)
무엇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① 하나님의 긍휼(4) ② 하나님의 사랑(4) ③ 하나님의 은혜(5.8) ④ 하나님의 자비(7)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광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산길을 내려오던 중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됐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사력을 다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언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에서 한무리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으나 어린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망설였습니다. "어린이를 구할것인가 아니면 승객을 구할 것인가" 운전사는 어린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차에서내린 운전사가 어린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미 어린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어린이를 죽인 살인자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운전사를 욕하지 마세요. 저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복을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7)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삶을 주었습니다. 의미 없는 삶에서 의미를 주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주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보답의 책임은 큰 것입니다(눅12:48)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욘2:8). 한 때 요나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어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끝까지 꺽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그는 고백합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8)"라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히스기야도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질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질병에서 고침받으니까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외국인에게 무기를 자랑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대하 32:25)"
조금 가졌다고 조금 알고 있다고 조금 건강하다고 조금 아름답다고 조금 신앙이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터어키 지진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되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인간의 지혜가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도만 올라가도 1도만 내려가도 지구는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는 연못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학이 연못에 내려왔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사정을 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다 한번만 날게 해다오" 나무 하나를 구해 개구리와 학은 한쪽 끝을 서로 물고 하늘을 날랐습니다. 너무나 황홀하였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해냈니?" 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져서 "내가 했지" "개골" 그 순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1)"
가끔 보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무거운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를 해결 받고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질적인 질병도 고침 받았습니다. 기업도 잘 됩니다. 자녀도 건강하게 공부도 잘합니다. 기업도 직장도 잘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신 건강, 주신 물질, 주신 시간 가지고 즐기기에 바쁩니다. 자기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배은 망덕한 삶을 살아 갑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삽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고 고백했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않으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삼하7: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5)"
결국 불쌍하게 됩니다.(신28:47-48 느9:35-35, 삼상2:27) 엘리와 사울을 보십시오. 은혜를 저버린 삶을 삶으로 자신과 가족이 망하였습니다.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신 28:47-48)"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려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걸음 걸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었던 벤자민 프랭크린은 여러 가지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발명을 했고 사회개혁과 교육, 정치를 통해 미국 사회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우리가 하나 기억해둘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가 유용하게 쓰는 가로등을 그가 제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되면 길을 다니는 사람이 어두워서 길다니 기가 어려우니까 해가 지고 난 후에 길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이 있으면 많은 도움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프랭클린은 이일을 위해 사람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광고나 계몽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아무말도 없이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지면 등불 하나를 환하게 켜서 집 앞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다른 집과는 달리 그집 앞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 을 보고 참으로 좋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의 집 앞에 켜져 있는 등불의 유용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하나씩 둘씩 자기 집 앞에 등불을 달아 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마 안되어서 온 마을 전체가 저녁만 되면 집 앞마다 등불을 달아 놓아서 마을 전체가 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불을 밝혀 걸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자 손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세세에 전하는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2.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성취해 드려야 합니다.(10)
그 큰 사랑을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취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선한 일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재능이나 우리의 부나 우리의 명예나 우리의 인기나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아름다움은 결국 이 선한 일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교회 내에서 이것이 거꾸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선한 것을 하는 이유가 부를 쌓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실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진실을 만들어 내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선이 목적이 아니라 선을 수단화 합니다. 어느 목사님하고 몇 년전 제주도에 문상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집사님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비행기를 따고 제주도에 문상을 갔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감동을 받겠지요"라는 것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머나먼 곳까지 문상을 가는 이유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쉽게 그 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가정에 문상을 가는 것은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문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동기 자체가 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동기입니다. 오늘날 병든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제하는 것도 또다른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선교, 제자훈련, 사회 사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다른 교인들을 모으고 그리고 유능한 목사가 되어 인기를 누리려는 세속적 가치관이 판을 친다면 그것은 겉모습은 번지지르 하지만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액면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어느날 남편이 잘 해주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서 그래, 아내가 잘 해줘도 경계를 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잘 해주어도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일 축하 카드 보내 주어도 생일 감사 헌금하라고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열심히 수고하는 것도 나중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족한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가 부자로 사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하고 싶은 대로 사고 싶은 것 다 살 수 있으면 안됩니다. 죽을 때까지 부족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 순수하게 살아갑니다. 선이면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 기도회를 끝내고 교회에 있는데 8시가 넘었는데 어느 집사님께서 가시지 않고 주방에서 국을 끓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속으로 응 권사 되기 위해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남자 집사님이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장로 피택되기 위해 그렇지 라고 교인들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신앙인을 보면 정치적인 신앙인, 경제적인 신앙인, 철학적인 신앙인, 예술적인 신앙인 등이 있습니다. 매사 청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순수하게 보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행합니다. 경제적인 신앙인은 매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경제 원리에 따라 행합니다. 철학적인 신앙인은 매사 따집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따져 보고 행합니다. 예술적인 신앙인은 겉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운데 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내실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 순수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액면 그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인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고물팔아 21명의 대식구 돌보는 사랑의집 김정용 박선미 부부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물을 수집하여 장애인 21명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니면 이 사 람들 누가 돌봅니까』라는 책임감 하나로 무연고 장애인들의 아빠 엄마가 되어 아무런 댓가 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원칙은「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13년간 29.000건 무료진료 유명철 교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유교수는 불의의 철도사고로 한쪽 손이 불편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왼손이 의수였기에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의대에 진학하였고 의사가 된 후 무의촌 봉사활동, 노인 보호시설, 장애인 수용소, 영세민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삶에서 넘치는 만큼 나누었을 뿐입니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죽는다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실은 이 땅에서의 영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의 현상을 보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열심히 공부합니다. 똑똑합니다. 경쟁률이 4대 1, 6대 일입니다. 유학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담임 목사님을 청빙하면 박사학위 소지자, 특히 외국 박사, 대학 대학원 성적 증명서까지 요구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고등학교 생활 기록부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니 목사 된 사람들이 기를 쓰고 가짜라도 박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왜 외국에 나가서 한국말로 강의들으면서 수천만원의 돈을 주고 외국 학교 박사를 받으려고 합니까? 그것이 큰 교회 청빙 조건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고난 보다 영광을 좋아하고 선 보다는 선을 통하여 얻는 이득을 더 좋아합니다. 조금 교회 커지면 메스컴을 탑니다. 책을 냅니다. 선전을 합니다. 자기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선으로 이득볼 일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시라면 그 공채에 응하겠습니까? 분명이 예수님은 그 공채에 자격 미달일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중요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주를 따르려는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는 출세가 아닙니다. 출세 못해도 좋습니다. 교인이 따르지 않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욕을 얻어 들어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손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자존심이 상하고, 수욕을 당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하다면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지으신 창조 목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먼저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 선을 도모하라(롬12:7), 사모하라(딤전3:1), 열심하라(딛2:14), 예비하라(딛3:1)"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28에서는 수고하여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2:7에서는 참아가며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갈6:9). 기뻐하며 선을 행하라(전3:12)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
선한 일에 부하라(딤전6:18; 행9:36)고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8)"
결국 선을 행하면 손해 봅니까? 망합니까? 자존심이 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대하19:11)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 (대하 19:11)"
(2)평강이 있습니다.(롬2:10 렘6:16) 악인에게 평강이 없습니다(사48:22)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10)"
(3)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잠14:19 삼하19:10-19 에6:13 7:8)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 14:19)"
(4)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엡6:8 창31:9 시18:20 마6:4,6,18 에2:23)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엡 6:8)"
(5)하나님께 은총을 받습니다(잠12:2)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잠 12:2)"
선을 행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마5:16)이같이 너희 속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막상 할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 욕심이 많은 한 왕이 덕망있는 학자를 불러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훌륭하게 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학자는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너무 간단한 대답에 왕은 [아니,그거야 세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습니다.그 때 학자도 웃음을 띠며 말했습니다.[폐하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든살 된 노인이라도 제대로 실천하기는 아주 어려운 문제랍니다]
우리는 선을 위해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7절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지난 17일 날 터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해 세계에서 지진으로 사망한 사람은 8천9백 2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난 1백년 동안 연평균 1만명이 목숨을 잃는 다고 합니다. 20세기 들어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지진은 지난 76년 발생한 중국의 탕산 (唐山) 대지진으로 25만 5천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번 터키 지진도 수만명의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마자 국제사회는 터키에 구호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은 구조대를 급파했고, 터키와 앙숙관계인 그리스까지 참가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119를 파견하고 구호금 7만 달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7만달러를 우리 돈으로 계산해 보니까 8천 4백만 원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나라를 상대로 지원하는 액수로는 너무 인색한 것 같지 않습니까? 터키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1만 5천명 병력을 파견해 3천여 명이 전사. 전상. 행방불명됐던 나라입니다. 원수같이 여겼던 러시아와 정상 외교를 하면서 거금을 쓰면서 우리를 도와준 나라에 대하여 너무나 인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래도 이만큼 성장하고 이만큼 믿음의 백성이 많아졌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경제도 세계적인 사건이지만 불교와 유교로 황폐화된 영적 터전에서 1/4이 100년 조금 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도 세계적인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일 줄 압니다. 98년 한해동안 전세계에서 영양실조로 숨진 사람은 1800만명이나 되고 99년 현재 세계 저개발 지역의 만성 영양실조 인구는 8억 30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적어도 집이 있고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면 세계적으로 볼 때는 최상위 생활자 10% 안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였습니다(5.8) 1절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절 보니까 죄와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였던 사람들입니다. ⓐ 이 세상 풍속을 좇았고(2)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2) ⓒ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3) 사람들입니다. 사형 선고를 당하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방치되었습니다. 고아와 같았습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유기 되었습니다. 버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너희(1.2) 우리(3) 다른 이들(5) 모두 포함됩니다.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5) ②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6) ③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6)
무엇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① 하나님의 긍휼(4) ② 하나님의 사랑(4) ③ 하나님의 은혜(5.8) ④ 하나님의 자비(7)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광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산길을 내려오던 중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됐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사력을 다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언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에서 한무리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으나 어린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망설였습니다. "어린이를 구할것인가 아니면 승객을 구할 것인가" 운전사는 어린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차에서내린 운전사가 어린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미 어린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어린이를 죽인 살인자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운전사를 욕하지 마세요. 저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복을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7)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삶을 주었습니다. 의미 없는 삶에서 의미를 주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주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보답의 책임은 큰 것입니다(눅12:48)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욘2:8). 한 때 요나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어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끝까지 꺽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그는 고백합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8)"라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히스기야도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질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질병에서 고침받으니까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외국인에게 무기를 자랑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대하 32:25)"
조금 가졌다고 조금 알고 있다고 조금 건강하다고 조금 아름답다고 조금 신앙이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터어키 지진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되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인간의 지혜가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도만 올라가도 1도만 내려가도 지구는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는 연못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학이 연못에 내려왔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사정을 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다 한번만 날게 해다오" 나무 하나를 구해 개구리와 학은 한쪽 끝을 서로 물고 하늘을 날랐습니다. 너무나 황홀하였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해냈니?" 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져서 "내가 했지" "개골" 그 순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1)"
가끔 보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무거운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를 해결 받고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질적인 질병도 고침 받았습니다. 기업도 잘 됩니다. 자녀도 건강하게 공부도 잘합니다. 기업도 직장도 잘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신 건강, 주신 물질, 주신 시간 가지고 즐기기에 바쁩니다. 자기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배은 망덕한 삶을 살아 갑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삽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고 고백했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않으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삼하7: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5)"
결국 불쌍하게 됩니다.(신28:47-48 느9:35-35, 삼상2:27) 엘리와 사울을 보십시오. 은혜를 저버린 삶을 삶으로 자신과 가족이 망하였습니다.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신 28:47-48)"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려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걸음 걸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었던 벤자민 프랭크린은 여러 가지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발명을 했고 사회개혁과 교육, 정치를 통해 미국 사회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우리가 하나 기억해둘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가 유용하게 쓰는 가로등을 그가 제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되면 길을 다니는 사람이 어두워서 길다니 기가 어려우니까 해가 지고 난 후에 길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이 있으면 많은 도움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프랭클린은 이일을 위해 사람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광고나 계몽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아무말도 없이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지면 등불 하나를 환하게 켜서 집 앞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다른 집과는 달리 그집 앞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 을 보고 참으로 좋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의 집 앞에 켜져 있는 등불의 유용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하나씩 둘씩 자기 집 앞에 등불을 달아 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마 안되어서 온 마을 전체가 저녁만 되면 집 앞마다 등불을 달아 놓아서 마을 전체가 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불을 밝혀 걸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자 손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세세에 전하는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2.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성취해 드려야 합니다.(10)
그 큰 사랑을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취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선한 일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재능이나 우리의 부나 우리의 명예나 우리의 인기나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아름다움은 결국 이 선한 일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교회 내에서 이것이 거꾸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선한 것을 하는 이유가 부를 쌓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실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진실을 만들어 내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선이 목적이 아니라 선을 수단화 합니다. 어느 목사님하고 몇 년전 제주도에 문상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집사님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비행기를 따고 제주도에 문상을 갔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감동을 받겠지요"라는 것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머나먼 곳까지 문상을 가는 이유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쉽게 그 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가정에 문상을 가는 것은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문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동기 자체가 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동기입니다. 오늘날 병든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제하는 것도 또다른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선교, 제자훈련, 사회 사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다른 교인들을 모으고 그리고 유능한 목사가 되어 인기를 누리려는 세속적 가치관이 판을 친다면 그것은 겉모습은 번지지르 하지만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액면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어느날 남편이 잘 해주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서 그래, 아내가 잘 해줘도 경계를 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잘 해주어도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일 축하 카드 보내 주어도 생일 감사 헌금하라고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열심히 수고하는 것도 나중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족한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가 부자로 사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하고 싶은 대로 사고 싶은 것 다 살 수 있으면 안됩니다. 죽을 때까지 부족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 순수하게 살아갑니다. 선이면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 기도회를 끝내고 교회에 있는데 8시가 넘었는데 어느 집사님께서 가시지 않고 주방에서 국을 끓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속으로 응 권사 되기 위해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남자 집사님이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장로 피택되기 위해 그렇지 라고 교인들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신앙인을 보면 정치적인 신앙인, 경제적인 신앙인, 철학적인 신앙인, 예술적인 신앙인 등이 있습니다. 매사 청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순수하게 보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행합니다. 경제적인 신앙인은 매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경제 원리에 따라 행합니다. 철학적인 신앙인은 매사 따집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따져 보고 행합니다. 예술적인 신앙인은 겉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운데 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내실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 순수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액면 그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인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고물팔아 21명의 대식구 돌보는 사랑의집 김정용 박선미 부부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물을 수집하여 장애인 21명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니면 이 사 람들 누가 돌봅니까』라는 책임감 하나로 무연고 장애인들의 아빠 엄마가 되어 아무런 댓가 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원칙은「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13년간 29.000건 무료진료 유명철 교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유교수는 불의의 철도사고로 한쪽 손이 불편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왼손이 의수였기에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의대에 진학하였고 의사가 된 후 무의촌 봉사활동, 노인 보호시설, 장애인 수용소, 영세민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삶에서 넘치는 만큼 나누었을 뿐입니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죽는다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실은 이 땅에서의 영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의 현상을 보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열심히 공부합니다. 똑똑합니다. 경쟁률이 4대 1, 6대 일입니다. 유학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담임 목사님을 청빙하면 박사학위 소지자, 특히 외국 박사, 대학 대학원 성적 증명서까지 요구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고등학교 생활 기록부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니 목사 된 사람들이 기를 쓰고 가짜라도 박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왜 외국에 나가서 한국말로 강의들으면서 수천만원의 돈을 주고 외국 학교 박사를 받으려고 합니까? 그것이 큰 교회 청빙 조건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고난 보다 영광을 좋아하고 선 보다는 선을 통하여 얻는 이득을 더 좋아합니다. 조금 교회 커지면 메스컴을 탑니다. 책을 냅니다. 선전을 합니다. 자기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선으로 이득볼 일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시라면 그 공채에 응하겠습니까? 분명이 예수님은 그 공채에 자격 미달일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중요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주를 따르려는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는 출세가 아닙니다. 출세 못해도 좋습니다. 교인이 따르지 않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욕을 얻어 들어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손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그것을 행하다가 자존심이 상하고, 수욕을 당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하다면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지으신 창조 목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먼저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 선을 도모하라(롬12:7), 사모하라(딤전3:1), 열심하라(딛2:14), 예비하라(딛3:1)"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28에서는 수고하여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2:7에서는 참아가며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갈6:9). 기뻐하며 선을 행하라(전3:12)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
선한 일에 부하라(딤전6:18; 행9:36)고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8)"
결국 선을 행하면 손해 봅니까? 망합니까? 자존심이 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대하19:11)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 (대하 19:11)"
(2)평강이 있습니다.(롬2:10 렘6:16) 악인에게 평강이 없습니다(사48:22)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10)"
(3)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잠14:19 삼하19:10-19 에6:13 7:8)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 14:19)"
(4)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엡6:8 창31:9 시18:20 마6:4,6,18 에2:23)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엡 6:8)"
(5)하나님께 은총을 받습니다(잠12:2)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잠 12:2)"
선을 행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마5:16)이같이 너희 속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막상 할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 욕심이 많은 한 왕이 덕망있는 학자를 불러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훌륭하게 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학자는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너무 간단한 대답에 왕은 [아니,그거야 세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습니다.그 때 학자도 웃음을 띠며 말했습니다.[폐하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든살 된 노인이라도 제대로 실천하기는 아주 어려운 문제랍니다]
우리는 선을 위해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7절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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