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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에배소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706 추천 수 0 2010.02.08 21: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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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3:16~19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3. 29. 주일 2부 원로목사님 설교 
<서론>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우리 마음이 굉장히 흐뭇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에로스라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에로스가 없으면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로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남녀가 서로 끌리고 서로 가정을 이루게 되고 자녀를 양육하고 사람들이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헬라어에서는 친구 간의 사랑인 필레오 사랑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친구의 사랑이 사라지면 신뢰를 잃어 버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필레오 사랑 친구의 사랑은 참으로 귀중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사랑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 사랑의 너비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첫째 우리가 한번 알아보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평온에 가면 평온은 아주 넓지 않습니까? 그러나 평온 가운데 골이 터져서 계곡이 있으면 계곡은 좁지 않습니까? 계곡은 좁고 거기에 물이 흐르고 계곡을 뛰어 넘으면 넓은 평온이 있는 것처럼 넓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넓은 평온과 같아서 좁은 사람의 마음은 계곡과 같습니다. 아주 좁은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마음이 넓은 사람은 모든 것을 관용하고 받아들이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0절에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마음이 넓어서 평온하면 육신도 건강하고 그리고 마음에 시기가 꽉 들어차면 계곡같이 좁은 마음으로 뼈를 썩게 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와 같이 한없이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으냐. 상상을 초월하지요.
여러분 요한일서 4장 7절로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왜 한이 없이 넓으냐. 증명된 사랑으로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아들을 기르는데 그 외아들을 동네나 시민을 위한 제물로 내놓으라면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지요. 외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도 부모의 마음이 아픈데 제물로 한 동리를 위해서 한 국가를 위해서 내놓으라면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인류들을 대신해서 짓지도 않은 죄를 대신 짊어지우고 범하지 않은 범죄를 범한 것을 여겨서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내어 주시고 우리를 건지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이 넓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사랑이 얼마나 넓으냐 하면은 모든 죄인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오면 환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뭐 저란 사람이 다 교회 나오냐? 세상이 다 아는 죄인인데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 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하도 넓기 때문에 그 품안에는 모든 죄인을 다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백인이나 홍인이나 흑인이나 유색인종이라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계층의 높고 낮은 계층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특별히 잘 대해주고 가난하다고 멸시천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넓은 사랑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성 우물가의 여인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자를 보고 다 손가락질 했습니다. 결혼을 5번하고 이혼을 5번하고 6번째는 오다가다 만난 남자하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피하고 손가락질하고 죄인 여자라고 하므로 그는 아침에 우물물을 기를 수 없습니다. 아침에 여인들이 다 우물물을 기르러 오는데 하도 욕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피해서 대낮 쨍쨍한 햇빛이 비칠 때 혼자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땡볕에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와서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물을 기르는데 주님이 말을 붙였어요.
“여자여 물을 좀 주소서.” 여자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면서 “당신이 유대인으로써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주님께서는 세상이 다 아는 죄인 자기도 죄인인줄 알고 예수님이 말을 붙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인 그 여자를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메시아로 나타내시고 영원한 생명수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보면 간음 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보십시다. 바라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현장에서 잡은 간음하는 여인을 끌고 간 것입니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져 놓고 “주님이여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이 어려운 입장에 도착했습니다. 만일 돌로 치지 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니 이단이라”고 해서 당장 정죄할 것입니다. 치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어깨 넘어 보았으나 뭐라고 썼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님께서 쭉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이 고개를 들어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다 눈을 맞춰 보시고 난 다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자를 치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들 죄를 환하게 들여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보고 있구요. 그러니까 양심에 가책이 불같이 타올라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모두 다 돌멩이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다. 한참만에 예수님이 고개를 그 여자보고 말했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예수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백일천하에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정당하게 돌로 맞아 죽어야 할 여자도 주님의 그 넓은 사랑은 그를 용납해서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지 죽이려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살리려고 하는 그 넓은 사랑을 여기에서 읽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비춰볼 때 우리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나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과 다름없는 죄인이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신 청산했기 때문에 그 피가 마음속에 모든 죄를 청산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은 쉽게 남편을 정죄하거나 아내를 정죄하거나 부모를 정죄하거나 이웃을 정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용서한 사람을 왜 우리가 정죄합니까? 예수님이 품어준 사람을 왜 우리가 밀어내는 것입니까? 오늘 이 세상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는 덮어놓고 남의 죄만 자꾸 바라보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와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없는 넓은 사랑을 가지고서 남녀노유 빈부귀천 죄인 의인을 모두 다 끌어안아서 변화시켜 주시는 위대한 역사를 베푸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의 길이
둘째,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를 알라고 그랬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냐.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주를 보십시오. 이 시작하는 데하고 끝나는 데하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냐. 우주보다 긴 것입니다.
욥기 11장 8절로 9절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바다가 넓다고 하는데 어림도 없고 땅이 길다고 하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 “옛적에 야훼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영원한 사랑, 1년 사랑하다가 말고 10년 사랑하다가 말고 천년만년 사랑하다가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제트기가 시속 960킬로미터 속도로 가면 지구를 단숨에 지나 16일이 되면 달에 도착합니다. 17년이 되면 태양을 지날 수 있습니다. 690년이면 명왕성(현,소행성 134340)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0년을 달려도 제트기는 태양계조차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주에 조그마한 태양계를 이렇게 960킬로미터 제트기가 달려도 700년이 되어도 이 태양계를 떠나지 못하니 이 우주의 길이가 얼마나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인간의 사고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죄를 짓는 사람보고 “저것을 하나님이 참고 견디시냐? 그냥 박살을 내버리지.” 그렇게 합니다. 그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한없이 길게 길게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나 때리실 것도 또 안 때리고 화나 때리실 것도 또 안 때리고 왜 하나님은 안 때리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길고 길게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빠지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고 길게 길게 기다리는 사랑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여러분과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지 못합니다. 벌써 우리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 종종 “하나님 북한정권을 왜 저토록 오래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빨리 북한의 주민들을 하나님이 구출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도 대답이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길게 길게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이 벌을 받지 않고 오래 기다리는 것을 보고 탄식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기다리지 못할까 싶어 겁을 집어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9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잠시 동안 노하시다가도 곧장 잊어버리고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길고 깁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년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회개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버리시는가 보다. 무슨 말씀입니까? 10년이면 하나님이 딱 한순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0년, 30년, 50년,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받아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5만번 기도해서 5만번 다 응답을 받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부탁하기를 “여보게 내가 우리 아들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안타깝다. 자네가 꼭 예수께로 인도해 달라.” 그래서 이 목사님은 이 친구를 위해서 평생을 기도했습니다. 죠지 뮬러의 기도가 5만번 응답을 받았는데도 죽는날까지 친구의 아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죽고 난 다음 장례식날 문상을 왔습니다. 관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꿇어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기도는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 응답이 와서 마지막 다 응답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9절에 있는 말씀처럼 영원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번념하시고 권장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의 높이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꿈은 모자람이 없는 온전한 신앙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무가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넓고 길지만 또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막되 먹게 내버려 놓고 내 멋대로 하라는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돌보시는 높은 고상한 사랑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로 18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높은 사랑, 고상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개망나니 같은 우리, 되먹지 못한 우리를 그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그때로부터 온전한 사람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늘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옛날에 비교하면 많이 발전은 되었지만 아직 온전한 사람이 되기에는 많은 껍질이 벗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아직 새까맣게 멉니다. 그 온전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하니 여러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방종하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격려하고 매를 드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나가서 도박을 하든지 방종하게 놀든지 술 취하든지 마약을 하든지 내버려둔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는 끝까지 따라가면서 달래고 경책하고 매를 때리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13장 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여러분 징계하지 않는 부모는 자식에 대한 무관심한 부모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관심 있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며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상줄 것은 상주고 꾸짖을 것은 꾸짖고 때릴 것은 때려야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채찍과 꾸지람을 하면 그때는 자식이 괴로워하더라도 나중에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나중에 부모에게 욕되고 가슴 아프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못되게 구는 선생님이 있어서 늘 미워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콩코드라는 영어 문법 선생인데 언제나 이만한 대몽둥이를 가지고 교실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 문장을 만드는데 시제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정확하게 문장을 못 만들면 나오라고 해서 그 몽둥이로 때리는데 살짝 때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불이 번쩍번쩍 나도록 때립니다. 그래서 다른 과목은 열심히 공부 안 해도 그 과목만은 눈이 빠지도록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생각하기를 “저 선생 빨리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지 않느냐? 그 많은 유행병이 오는데 왜 저 선생은 유행병이 안 걸리느냐?” 그렇게 미워했는데 오늘날에 내가 돌아볼 때 오늘날 정도 제가 영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콩코드 선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막무가내 영어가 아니고 질서 있는 영어 그래도 고상한 영어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무섭게 매를 때리던 선생님이 문장마다 콩코드 콩코드 문장의 일치, 문장의 일치.. 그 말을 해왔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 동사를 분명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엄하게 기르는 자식이 나중에 효도합니다. 방종하게 기르는 자식은 나중에 불효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우리를 기르실 때 높은 사랑으로 기르지 낮은 사랑으로 기르지 않습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느 날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제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꾸짖지도 않으시고 채찍질도 안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무디 목사님이 그 여자 교인을 가만히 “자매님, 자매님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왜 안 믿어요? 내가 얼마나 교회를 나오는데” “교회는 나와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부모가 없는데 한번도 징계를 안 당했다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하지 당신 길거리에 남의 자식이 흙탕에 노는 것 보고서 징계합니까?” “지나가지요.” “자기 자식 흙탕에서 온몸에 흙칠을 하고 놀면 불러서 꾸짖고 징계하잖아요?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당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안 믿은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징계는 사생자가 받는 것이 아니라 친 자녀가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와 교훈으로 우리를 돌보는 사랑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징계와 교훈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높은 사랑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11절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친 아들이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 몸에 하나님 채찍자국이 한두개는 꼭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까닥도 안하시더라.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한두번 경계하시다가 안 되면 때리시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지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 맞고 난 다음 회개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어떤 젊은 부부가 내게 간증을 합니다. 자식들을 데리고 휴가를 가서 주일날 교회 안 나가고 외국에 있으니까 애들을 데리고 바다 물에 들어가서 놀다가 그만 해파리에게 쏘여서 다리가 퉁퉁 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치료를 받고 의사가 하는 말이 잘못 했으면 다리를 자를 뻔 당했다고 그래서 제게 와서 회개하면서 간증을 합디다. 내가 주일날 지키지 않고 놀러 나갔다가 해파리에게 쏘여 가지고서 죽을 뻔해서 이제는 주일날 꼭 지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참 해파리 감사한 해파리구나.. 그렇게 고난당하면 사람이 뼈에 아로 새기고 배우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지 않으면 배우지 않아요. 말과 채찍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사랑의 깊이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라고 했습니다.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당신의 일거수일투족 생활 전체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을 때 함께 좋아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깊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고 내가 안고 일어섬, 생각까지 밝히 아시는 것입니다. 왜,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 머리털을 다 헤아립니까? 내 머리털은 헤아릴 때 수가 많지 않으니까 쉽지만 여러분 머리털은 어려워요. 다 헤아리려면.. 그래도 헤아리고 있습니다. 왜,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의 일어서고 앉음 까지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하고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 때 내가 저와 같이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환난당할 때 천지가 아득하고 다 나를 버린 것 같을 때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깊은 사랑이기 때문에 내가 깊은 흑암에 처했었을 때 하나님도 그 자리에 들어와 계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심이라. 안위하심이라. 여러분 그러므로 깊은 골짜기에 가있다고 해서 여러분은 혼자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즐거워하는 자들은 함께 가서 웃어주고 우는 자에게는 가서 함께 울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동정과 사랑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정은 그저 마음으로 ‘참 안됐다.. 쯧쯧쯧.. 불쌍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동정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가서 함께 끌어안고 울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불한당 만나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 놓고 동정만 하고 지나가 버렸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자기 짐승을 가지고 와서 내려서 그 사람을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서 주막집에 가서 치료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흘만에 예수님이 오니까 그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절식하고 통곡을 하고 울어서 초췌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딸들 보고 “오라비를 어디 두었느냐? 가자!” 그래서 묘지로 앞서 가는데 머리를 산발을 하고 허리를 굽히고 흐느껴 울면서 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살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알면서 왜 웁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번연히 살아날 사람을 보고 알면서 왜 우느냐.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연약함과 그 마음에 고통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그냥 동정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로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러분이 울 때 예수님이 우십니다. 여러분이 웃을 때 예수님이 웃으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즐거워 할 때 예수님도 같이 즐거워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예수님은 운명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자기 죄도 아니고 자기가 범한 흉한 악도 아닌데 여러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저 고난당하신 것을 보십시오. 1시간도 아닙니다. 2시간도 아닙니다. 3시간도 아닙니다.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열두명 되는 그 천사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 말씀 한마디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어요. 내려오시면 우리 죄는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지옥에 갈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우리의 죄를 걸머지고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그 사랑의 깊이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사랑이요, 헤아릴 수 없이 우리를 동정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늘 묵상하고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렸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 나가오 마끼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그가 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하며 5년 동안 설교했으나 한 사람도 안 나왔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5년 동안 목회를 하는데 한 사람도 교인이 안 오니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합니까? 5년 만에 젊은이 한 사람이 교회 참석했어요. 그 한 사람을 두고 아주 신바람이 나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 같이 점심을 먹자고 그래서 같이 점을 먹는데 한참 점심을 먹다가 이 젊은이가 기침을 쿨럭쿨럭 하더니만 피를 토합니다. 폐병 환자입니다. 그 당시에 폐병은 암보다 더 무섭습니다. 걸리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폐병 환자구나.’ 당장 마음속에 ‘당장 쫓아내야 되겠다.’ 그러나 그 다음 생각에 ‘주님께서 이 청년을 내게 보낸 것은 이유가 있어 보낸 것이다. 이 사람을 돌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 피를 다 닦고 그를 같이 점심을 먹고 집으로 데려가서 물었습니다. 자기는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인데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공부하다가 폐병에 걸려서 지금 학교를 못나가고 이리저리 유리하다가 이 교회 소재를 듣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하간 이 청년이 온 것을 기뻐하고 “너 우리 집 식구가 되어서 같이 살자” 그 폐병 앓는 젊은 청년을 감싸주고 치료하고 돌봐주고 기도해 주고 동정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청년이 신앙이 점점 나아지자 폐병이 낫고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그 다음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빈민촌에 들어가서 빈민을 구원하는 세계적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된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라면 우리 세대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빈민굴에 들어가서 빈민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함께 먹고 함께 자며 빈민들을 구제하고 전도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빈민들과 나누어 준 것입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와 왜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동정했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주님께 더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조금만 알면 주님께 조금만 헌신합니다. 깊이 깨달으면 깊이 헌신합니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보다 높은 사랑을 어떻게 다 알며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랑의 깊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부모도 갖지 못하고 남편도 갖지 못하고 아내도 갖지 못하고 자식도 갖지 못하는 그 사랑을 나에게 주신다. 나는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알아주시는 분이 여러분 속에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소망도 천국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결론>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다 언제까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은 제일이라고 했는데 믿음도 천당 가면 끝장나지 않습니까? 믿음이 이루어졌으니까 소망도 천국 갈 소망을 가졌는데 천국가면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사랑은 천국가면 더 끌어 오르기 때문에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천국가면 더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당해도 영원히 남아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와도 여러분 속으로 생각하십시오. 얼마 안 있으면 지나가고 말 것이다. 슬픈 일이 다가와도 얼마 있으면 지나갈 것뿐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뿐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영원히 인종도 국경도 시간도 세월도 초월해서 남아있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그 한없는 넓은 사랑과 한없는 긴 사랑과 한없는 높은 사랑과 끝이 없는 깊은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우리도 사랑의 자녀로써 성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율법의 옷을 벗어 버리고 율법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사랑의 옷을 받아 입고 사랑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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