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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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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그 은혜에 의하여
엡2:1-10
매주 우리 교회 꽃꽂이를 보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균형과 조화 통일의 미를 가지고 감동을 줍니다. 오늘도 아름답게 꽃꽂이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살아 있는 꽃이겠습니까? 죽은 꽃이겠습니까? 죽은 꽃입니다. 이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데 왜 죽은 꽃입니까? 뿌리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싱싱할지 몰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면 죽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죽은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1. 예수 믿기 전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하나님이 없는 인생
성경은 인간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1) 죽었습니다.(1)
본문에서 "죽었다"고 하는 표현은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삶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사실적인 진술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럴 수 있느냐? 그건 지독한 독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을 죽었다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선언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호흡사, 심장사, 뇌사, 세포사 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말합니다. 죽음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육적인 죽음은 영혼과 육체 분리이고, 영적인 죽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아 하나님과 사람 분리이며, 영원적 죽음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큰 돌을 올려놓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요? 화를 내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까요? 전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반응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며 영적인 귀가 먹어서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호흡이 끊겼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여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포가 죽어 하나님께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뇌가 죽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호흡이 멈추어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며 자신을 실체를 잘 알지도 못하며 그들의 영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교제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체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생명은 살아다는 이름은 있으나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2) 왜 죽었습니까?(1)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허물은 구별된 경계선에서 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죄는 표적을 빗나간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범죄와 원죄로 구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은 죄가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단절을 시킵니다. 죄가 인간과 단절을 시킵니다. (시51:3.5)"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내 앞에 있나이다. 제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셨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아담 안에서 범죄한 죄입니다.
3) 이 죄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입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진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죄나 죄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컴플렉스(complex)라는 말이나 스트레스를 사용합니다. 실패감, 수치감, 죄 등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모든 문제의 근원, 즉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의 근원은 바로 죄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고 건강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위장하고 고상하게 하고 좋은 옷 좋은 가구로 포장해도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롬6:23) 죄의 심각성을 방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도다." 이것이 예수 믿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입니다.
2.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삶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1)죄와 허물 가운데 행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합니다(2) -"그 가운데 행하여".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자연 경관을 즐기며 한가하게 산책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없이 예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친죄성향이라고 말합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보면 즐거워합니다. 죄지으면서 희열과 쾌락 스릴을 누립니다. 죄의 중독증으로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2)그리스도를 따르기 전 우리를 속박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입니다." ⓐ 이 세상 풍속을 좇았고(2)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2) ⓒ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3) 성경은 그리스도를 떠난 상태를 말씀할 때 이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약3:1-15절에서 예수님을 떠난 상태를 말씀합니다.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장을 보십시오. 1절 정욕 4절 세상, 7절 마귀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과 정욕은 사실상 마귀가 부리는 두 하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적의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욕심 정욕입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종으로 우리를 부리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예수 믿기 전 우리의 삶은
(1)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인류를 죽음으로 불행으로 몰아가는 테러리스트입니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마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귀에 대해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한 사람,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많이 아는 신학자들까지 마귀를 하나의 악한 영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뢰아서는 이상한 주장을 합니다. 베뢰아에서는 이 귀신은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존재라고 합니다. 자연수명(90-120)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존재를 흐리게 만드는 비 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사탄은 범죄한 천사입니다.(벧후2:4,)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자입니다(사14:12-20 유1:6,겔28:17). 거짓의 아비, 거짓말쟁이, 살인자(요8: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 귀신의 왕(마12:24), 무저갱의 사자, 아바돈, 아볼루온(계9:11), 대적(벧전5:8), 바알세불(마12:24,막3:22,눅11:15), 벨리알, 큰 용, 옛 뱀(고후6:15,계20:2) 등으로 되어 있는 영적 실체입니다.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견주리라" 하여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사탄은 존재하여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요12:31) 광명의 천사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된 21세기 교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마귀들이 모였습니다. 서로 전략을 토론했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아이디어를 내 놓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은 없다."라는 사실을 주입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주입을 해도 93%가 영적인 세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작전회의를 했습니다. 사람에게 "천국은 없다."라고 텔레비전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라고 세상에서 즐기라고 각종 드라마를 통해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반인들도 46.7%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75.6%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전회의를 다시 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없다”라는 의식을 심어 놓는 것입니다. 문명인답게, 교양인답게 신앙 생활하라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적 실제를 믿지 않게 되었답니다.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가장 정교한 작전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목사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했답니다. "여보 미안하지만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질 때까지 가정의 모든 비용들을 절감합시다. 특히 옷이라든가 이런 데 드는 비용들 말이요."
며칠 후 아내가 아름다운 새 옷을 입고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묘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목사 왈, "아주 멋지구려. 그런데 여보 내가 당신더러 당분간은 옷을 사지 말자고 부탁한 것 기억나시오?" "그럼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옷을 보는 순간 사탄이 저를 유혹하지 뭐예요." "아니, 여보,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소. 성경 말씀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소리쳤어야지." 그러나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사탄이 내 뒤로 가더니 '뒤에서 봐도 아름다운걸!' 그러지 뭐예요." 아담을 넘어뜨린 마귀가 오늘날도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리치는 방법으로 우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물리쳐야 합니다.
(2) 외적으로는 세상 풍속을 좇았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조직된 사회이고, 이 세상 풍속은 하나님을 떠난 사회 전체의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실제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사람들을 노예 상태로 잡아 둡니다. 정치적 억압, 관료적 전제 정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속적 가치관. 반도덕적 행동, 물질 만능주의, 비인간화, 쾌락 지상주의, 인본주의, 권력 지상주의, 번영 신학 등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갖은 여유도 갖지 못하고 텔레비전 신문 그럴싸한 잡지 등에 의해 주도되는 대중문화에 노예처럼 끌려 다닙니다. 교회 안도 세상이 들어 와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 "힘으로 다스린다."라는 말입니다. 힘이 있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말합니다. 남편 하나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 하나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탐익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사기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란문화, 폭력문화, 허구문화가 얼마나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끌고가고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음란문화가 판치는 시내에 있는 한 교회에서 벽에 "죄에 지치고 무거운 짐진자들 내게로 오라" 라는 표어를 적어 놓았답니다. 그러자 다음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누군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341-3451 로 전화해서 미스리를 찾으세용~"
(3)내적으로는 육체의 욕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육체는 우리의 골격을 이루는 뼈를 덮는 살이 있는 섬유조직이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 본성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기 전 인간의 내적 특성은 철저히 욕심을 지향하는 삶입니다. 아무리 경건의 훈련을 했다하여도 목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약기가 있습니다. 아주 성공적으로 큰 교회를 이룬 목사님이 외국에 부흥회를 하러 갔답니다. 은혜롭게 설교를 하고 호텔 침대에 누워있는데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들어오시오."하고 일어나 앉았는데 아름다운 아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목사의 발밑에 쓰러지듯 엎드리며 말하였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거룩한 분이시여. 제가 드릴 것이라고는 제 몸 밖에 없나이다." 그 때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오, 하나님, 저를 유혹으로부터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며 덧 붙였답니다. "...한 시간 후에 통보해 주세요..."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우리의 욕구가 대단합니다. 욕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피해버린 것입니다.
3)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3) 사형 선고를 당하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방치되었습니다. 고아와 같았습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유기 되었습니다. 버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구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너희(1.2) 우리(3) 다른 이들(5) 모두 포함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3.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를 우리 하나님은 구원해 주었습니다(5.8).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인간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성격을 개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완료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고 영원히 구원의 상태에 남아있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1)어떻게 구원해 주었습니까?
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5) ②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6) ③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6)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게 하시고. 종노릇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정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죽음의 노예로부터 자유자로 만들었습니다. 살리고- 일으키고- 앉히셨습니다.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죽었으나 예수와 연합을 통하여 영적으로 살아났고 세상과 사탄의 종이었으나 예수와 연합을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왕좌에 오른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2)무엇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① 하나님의 긍휼(4) ② 하나님의 사랑(4) ③ 하나님의 은혜(5.8) ④ 하나님의 자비(7)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어(8)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원치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었다고 그런 것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긍휼, 은혜, 자비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도 없고 행위를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8-9) 이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우리 성도님들 감격이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노총각 교인이 있었는데 늘 나이 젊은 아가씨만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데요. 왜 젊은 자매만 좋아나느냐고, 그러니까 그 노총각이 하는 말이 젊은 자매는 모든 것에 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공원만 데리고 가도 감격하고 된장국만 사주어도 감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처녀는 아무리 좋은 것을 해주어도 무덤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그럴 수 있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환희가 없습니다. 남편이 결혼 선물로 장미꽃을 사오면 쓸데없이 돈으로 주지 장미꽃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맛있는 반찬을 해 주면 돈도 없는데 낭비한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논쟁할 이들은 논쟁하라 나는 하나님을 놀라워하리라”고 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손 수술 외과 의사이자 나병 전문가입니다. 그는 외과 의사이기 전에 헌신적인 의료 선교사입니다.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 동안 오로지 나환자들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여성 환자가 병원에 실려 왔다고 합니다.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몸은 피가 없어 백지장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여자의 차갑고 눅눅한 팔목을 붙잡고 수혈을 하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맥박이 미미하게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혈액이 도착해 수혈을 하자 여자의 볼에 수채화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연분홍빛이 감돌다가 점차 퍼져서 볼 전체가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입술도 분홍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빨갛게 변했고 그녀의 몸은 깊은 호흡과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병이 연결되자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더니 이윽고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놀랍게도 입을 열어 "물, 물 좀 주세요. 목이 말라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젊은 여자가 내 생애에 들어온 것은 고작 1시간 정도뿐이었지만, 그 체험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체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죽은 가정이 살아나고 죽어가는 사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4. 어떤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7) 우리는 이제 사탄의 인질에서 풀려났습니다. 욕심과 세상 풍습의 노예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삶이 주어졌습니다. 의미 없는 삶에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얻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보답의 책임은 큰 것입니다(눅12:48) 어떤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욘2:8).
한 때 요나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어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끝까지 꺾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그는 고백합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8)"라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히스기야도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질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질병에서 고침받으니까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외국인에게 무기를 자랑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대하 32:25)"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않으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삼하7:15)
엘리와 사울을 보십시오. 은혜를 저버린 삶을 삶으로 자신과 가족이 망하였습니다.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신 28:47-48)"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되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인간의 지혜가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도만 올라가도 1도만 내려가도 지구는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어 건강 주고 아름다움 주고 신앙 주고 자녀 주고 물질 주고 지식주고 명예 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는 사람들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거운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를 해결 받고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질적인 질병도 고침 받았습니다. 기업도 잘 됩니다. 자녀도 건강하게 공부도 잘합니다. 이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려 세대에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걸음걸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합니다. 옛생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시한폭탄이 많습니다. 지뢰밭이 많이 있습니다.
2)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성취해 드려야 합니다.(10)
그 큰 사랑을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재능이나 우리의 부나 우리의 명예나 우리의 인기나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아름다움은 결국 이 선한 일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풍속을 쫒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악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선한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에 부하라(딤전6:18; 행9:36)"고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선한 일을 하는 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 (대하 19:11)"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 2:10)"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 14:19)"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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