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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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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MAN FOR OTHERS
엡3:11-13
*2007년 2월 4일 주일예배 원고입니다.
한 주간, 변모했을 성암 가족들을 그리워 하며 원고 올려놓습니다.
감동과 사랑으로 대면하게 될 내일 아침을 기다리며.
우리가 금년에 ‘온 몸으로 예수를 만나자’고 했지만 실상은 내가 예수를 마음대로 만나고 안 만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나고 안 만나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예수님은 나를 만나시기 위해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왜 만나려고 하시는 걸까요?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내 산에서 드디어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전통을 깨고 사람을 만나신 게 아니겠어요? 만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9:6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시고는 이런 당부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대해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라.”
이걸 당부하려고 사람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책무를 맡기려고 우리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 또는 그의 아들을 만나는 첫째 목적은 ‘평화의 사도’ 또는 ‘화해의 사제’가 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꼭 만나야 하느냐?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욕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나야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만나면 그까짓 일들이야 간단해지지만, 그게 먼저가 아니라 바로 이 일, 평화의 사제가 되기 위해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크고 으뜸 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은 가장 큰 직책은 ‘화해의 사제’입니다. 사제의 할 일이란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들고 화해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일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아브람함을 불렀을 때도 꼭 같은 뜻을 가지셨습니다. 그에게 땅을 주시고 창성하는 후손들을 주어 거기에서 평화롭게 살게 하시겠다고 하신 뒤 그의 후손을 통해서 민족들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같은 직책을 주셨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평화를 이룩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공동체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이 사제직을 그릇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 화해하는 특권으로서의 사제직을 ‘사람을 부리는 특권’으로 잘못 사용했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되레 평화가 깨지는 법이고 불화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참된 평화의 사도’로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엡3:11-18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들의 참된 평화’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사이의 담을 헐어 평화를 이룩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화해를 시켜서 참된 평화를 이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았으며, 자신이 지닌 특권으로 사람들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그는 섬기고 봉사하고 낮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사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는 결코 그에게 주어진 용서, 치유, 죄 사함, 사랑이라는 화해의 특권으로 사람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기만 하셨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안달을 하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은 “이방 사람들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권세를 부리려고 하지만 너희들은 그래서는 아니 된다. 스스로 높고자 하는 자는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빌2: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셨지만 자기를 낮추어 종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충성’이란 화해를 위한 충성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이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해시키려고 말입니다. 이걸 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하기 위해 예수를 꼭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불화를 만들고,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무엇에든지 화해를 이끌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언제나 평화가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예수님을 ‘화해를 위한 희생양’이라고 했습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일컬을 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그 때 그것은 ‘어린 양’이란 말은 ‘고마움과 측은함’의 극찬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양처럼 화해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신학자들은 그것을 “MAN FOR OTHERS"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뭔가를 향한 삶을 사는 사람인데, 그 뭔가가 바로 ‘화해’도는 ‘평화’입니다. 에수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화해를 위한 희생양’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의 뒤를 따라서 평화의 사제가 되라고 햐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평화의 사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MAN FOR OTHERS"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평화의 사제’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MAN FOR OTHERS 화해의 사도”로 산다는 것을 우리의 일상에서 비유로 들라면 어떤 것일까요?
1. 저는 경첩을 첫째 비유로 들고 싶습니다.
경첩아십니까? 이쪽과 저쪽이 들고 나서 소통하게 하는 문과 기둥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경첩 그것입니다. 경첩은 이쪽과 저쪽을 소통하여 평화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단지 그것 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그 일을 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캐톨록에서 부르는 ‘추기경’의 뜻이 본래 <경첩 cardinal>입니다. 화해의 사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경첩입니다. 우리더러도 그 <경첩>과 같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를 꼭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2. 두 남자가 엄청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왜 다투는가 하고 엿들었더니 한 남자는 4*7=27이라고 하고, 다른 남자는 4*7=28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고을 원님에게 두 사람이 모두 붙잡혀 가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원님이 4*7=27이라고 한 남자는 놓아주고, 4*7=28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흠씬 두들겨 패는 거였습니다. 맞은 남자가 얼마나 원통했겠어요. 그래서 다 맞은 다음에 원님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원님이 이러셨답니다. “이놈아! 4*7=27이라고 하는 놈을 때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얻어맞은 들 깨닫겠느냐? 그러나 너는 얻어맞고도 네가 맞는 것을 알고 있으니 싸움을 멈추지 않겠느냐?”
3. 오래된 동양 고전((雜寶藏經)에 사람이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無재七施)를 전해줍니다.
*남의 짐을 들어 준다거나 일을 돕는 신시(身施)가 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최고의 봉사는 자신의 몸을 바치는 사신행(捨身行)입 니다. 마침내 목숨까지 내어주는 봉사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한 정을 주는 심시(心施)가 그것입니다.
*다정한 눈길을 주어 상대방을 평화롭게 하는 안시(眼施)입니다.
*화안시(和顔施) 또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는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을 지니는 것입니다.
*언시(言施) 또는 언사시(言辭施)는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 주는 것입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는 상좌시(上座施)입니다.
*방사시(房舍施)라고, 나그네에게 하룻밤 묵어갈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도와주는 찰시(察施)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위에 들은 예를 기준 삼아서 일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창조자로, 화해의 사도로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만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그와 같이 사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고백 하에 그렇게 살기를 앙망하는 신심으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라고, 그 일을 좀 해달라고, 나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삭빠르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런 예수는 만나지 않고 그저 믿어서 욕망의 보탬이나 얻자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리 싸움과 갈등으로 시끄러운 것입니다.
추기경으로 사는 거, 경첩과 같은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바보 같은 못난 남자를 대신해서 볼기를 맞는 사람으로 살아 불화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돈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삶, 몸으로 누군가를 돕는 거, 마음을 열어 따뜻한 정을 주는 거, 환한 얼굴로 평화를 퍼뜨리는 거, 다정한 눈길로 사람을 평안케 하는 거, 말 한마디를 해도 곱고 따뜻하게 하는 거, 자리를 양보함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거, 나그네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는 거, 굳이 묻지 않고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돕는 삶이 모두 ‘평화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예수님이 밤새도록 문 밖에서 내 문을 두드리는 것이고, 온 몸으로 내가 예수 만나기를 사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세상이(여기서 세상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함)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잘못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믿고 바로 가야겠습니다.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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