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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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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새 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5) 영성 경쟁력
엡4:30
시각 장애인으로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께서 지은 “오늘의 도전이 내일의 영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말합니다. 실명이라는 고난 속에서도 굳은 신앙의 의지로 우리나라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까지 역임한 저자와 그의 두 아들의 도전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시절 사고로 실명하였고, 뒤이어 모친과 누나를 잃고 일찍이 맹인 소년 가장이 되신 분입니다. 신앙으로 온갖 역경을 이기고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였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 유학하여 1976년에는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교육학 전공 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둘째 아들은 변호사로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됨으로써 부자가 대를 이어 백악관에 입성하는 진기록을 만든 분입니다. 큰 아들은 하버드 대학을 거쳐 30대의 이른 나이로 워싱턴 수도권 의사협회 회장과 전미 안과협회 임원을 맡는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구촌 인권 박애상을 수상하고 참석한 수만 명을 대상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이지만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루스벨트 재단 고문되었고, 『미국 명사 인명 사전』과 『세계 명사 인명 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현대의 영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비록 장애를 입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참 경쟁력 있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자기 몸 하나 챙기기 힘든 인생으로 이름 없이 살아질 사람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나 경쟁력 있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악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문밖에서 한 청년이 강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청년은 “강 박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어머니와 책을 통해 강 박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백악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도 어머니와 강 박사님 덕분입니다. 언제 두 분과 함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라며 그 청년은 자신을 소개 했답니다. 과거 그는 반에서 꼴찌를 하는 12학년의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 청년의 어머니는 강 박사가 강연한 집회에 참석해 강 박사의 책을 두 권 사서 아들에게 주며 “오늘 나는 강 박사님 강연회에 다녀왔다. 그는 18살에 중학교 1학년으로 시작했고 너는 꼴지 이지만 늦지 않았고 두 눈도 있지 않느냐. 강 박사님은 대통령을 정책차관보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강 박사님처럼 너도 대통령 섬기는 비전을 가지고 도전해 봐라”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강 박사의 책에 읽고 백악관에서 인턴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는 공부하여 2년 재 초급대학 가서 3학년 때 조그만 기독교대학에 편입했고 백악관을 지원했답니다. 그는 23세에 백악관에 입성하여 대외협력부 아세아계 담당 직원으로 3년 동안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과 저의 삶을 통해, 우리 열린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이 원했던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영우 박사는 교육학을 하신 분으로 교육의 가장 중요한 3요소로 "지력, 심력, 체력"을 꼽으며 '심력'을 단연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지력은 조금 떨어져도, 심력 즉 비전과 꿈을 향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력입니다. 영적 능력,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비신앙이 가지지 못하는 영력을 우리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비신앙인은 가지지 못한 기도의 영적권세를 주셨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불행과 어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 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우리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죄로 물든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게하는 영적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악한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하는 영적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경쟁으로 썩어가는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평안을 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적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지배받는 영성 경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경쟁력있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영성 경쟁력을 가지고 살려면 성령님을 근심시켜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에베소서를 통해 거룩한 성도로서 경쟁력있는 삶을 살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먼저 정직 경쟁력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정서 통제 경쟁력, 경제 경쟁력, 언어 경쟁력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윤리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것으로 말씀이 바뀌고 있습니다. 윤리도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련된 영적 윤리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라 영적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새 생명을 줍니다. 새롭게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듣지 못한 영적 세계를 듣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진화된 줄 알았는데 성령이 오시니까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빅뱅으로 된 것이 아니고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 이 세상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쉬운 예로 다시 한 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은영 자매가 한 형제를 대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11월 달에 결혼을 약속한 형제입니다. 전혀 남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형제의 아버지 어머니가 전혀 남남이었는데 이제는 남남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약에 의해 새로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형제의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도 은혜와 언약에 의해 그런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나는 방법을 물어보았을 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물은 물론 물세례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말씀을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거듭나면 이제 영성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인도하십니다.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관계를 갖게 하시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근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영적 경쟁력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에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성령의 소원을 좇고자하는 마음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이 늘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습니다. 주권적 능력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지만 문밖에서 문을 열어 주기를 두드리고 계십니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성령과 함께 근심이라는 말이 쓰인 곳이 두 곳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이사야서 63장 10절입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사 63:10)”
반역하여 주의 성령이 근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역하면 불순종하면 성령님이 근심합니다. 살전5:19에서 성령을 소멸시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외면하지 말고 기쁘게 순종할 때 영성 경쟁력이 있습니다. 사울이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여 옵니다. 사울이 무시하고 계속 갔다면 그는 영성 경쟁력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철저히 받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싶었지만 성령님이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순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집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세워집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성령님이 지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바울은 가장 유력한 안디옥 교회 지도자입니다. 담임 목사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 내려 놓고 순종합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빌립도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행 8:29)” 빌립이 순종합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행 8:27)” 예수 믿고 변화되어 아프리카 복음화의 초석이 됩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행10:19-20) 지배민족입니다. 지옥의 땔감처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원수입니다. 그러나 순종합니다. 결국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로마 복음화의 문을 열게 됩니다.
2) 우리가 거룩한 것이 아닌 것을 행하면 그것이 어떤 일을 하든지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결국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3)” 거룩한 삶, 구별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령을 거슬리면 육체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님이 근심합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불순한 생각, 분노, 시기, 질투, 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 원수 맺는 것, 분쟁, 분냄, 당짖는 것, 술 취함, 방탕 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으로 우리 안에 늘 계시는데 우리가 성령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산다면 얼마나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 입니까?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6-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
자식이 부모가 없는 것 처럼 막무가네 행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성도님 댁에 대통령이 와 계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귀한 손님이 오시면 그 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린이를 조용히 시킬 것입니다. 깨끗이 청소를 할 것입니다. 존경과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때로는 깨닫게 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전혀 받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옛날 인도의 아륙대왕은 사형수에게 가득담긴 기름 그릇을 주며 네가 이 기름 그릇을 쏟지 안고 온 장안을 다녀오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죄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기름 그릇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온 장안을 하루 종일 돌아 다녀 돌아 왔습니다. 그 후 대왕은 다시 묻기를 네게 온 장안을 돌와 왔으면 몇가지 묻겠다 "장안 큰 통로에는 무엇이 있고 오른 쪽에 있는 큰 건물은 무슨 건물이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죄수는 건물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아륙대왕은 호통하기를 "네가 거짓말로 장안을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만일 온 장안을 돌아왔으면 내가 묻는 말에 왜 대답할 수 없느냐? 할 때에 사형수는 살고 죽는 것은 이 기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께서 명하시기를 이 기름을 쏟지 말고 다녀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생명이 이 기름에 있는데 어찌 곁눈을 팔겠습니까? 건물도 사람도 경치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기름 그릇만 조심스럽게 간직하며 돌아 왔을 뿐입니다. “왕은 옳다 됐다.”하고 석방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살 때 내 속에 모신 성령님을 중시하지 않고 헛된 것을 바라보고 살면 생명을 잃기 쉽습니다.
2. 우리는 영성 경쟁력을 가지고 살려면 어떤 경우에도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인친다는 것은 짐승을 주인이 자기의 것이라고 불로 지지는 것입니다. 소유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구원의 날까지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날은 종말의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평생 다하는 날까지를 말합니다. 그 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의역한다면 “성령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한 번 임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부모도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도 수 틀리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애지 중지 끼웠던 아들 딸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령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만들어 “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11)”
성령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영적 경쟁력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바울을 보십시오. 때로는 태장을 맞습니다.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억울함을 당합니다. 굶주리기도 합니다. 동료들의 배신도 당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려고 할 때 제자들이 반대합니다. 결박당하여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두려워 포기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행 21:11)” 그 때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고난과 어려움을 성령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그리고 결국 결박되지만 무료로 먹을 것 다 해결하며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이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게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가 방해합니다. 바울을 대적하며 총독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 때 바울이 성령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말합니다.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 말이 떨어지자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영적 권세가 있습니까? 얼마나 영성 경쟁력이 있습니까? 이것을 보고 총독이 주를 믿었습니다.
2) 성령님의 힘으로 사역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 바울 사도는 바울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8-2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일하면 태산도 그의 앞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영성 경쟁력이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 4:6-7)”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할 자 없었었습니다(행 6: 10) 성령에 충만하며 일하는(행 13: 9) 바울 앞을 막을 자 없었습니다(행 13: 6-12).
내 앞에 태산 같은 것이 달려온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의 사람 시므온을 보십시오(눅2:25-35)
메시아를 기다리고 살았지만 이제 나이 늙어 죽음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눅2:25)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도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무슨 지시입니까? 성경에 보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이 들어 이제 인생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에게 맡겨준 사명 다 이루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소원을 성취하였습니다.
암흑 시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사를 여호와의 신을 갑절이나 받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왕하2:9). 성령 충만하니까 요단강 물을 가르고(왕하:212-14) 여리고성의 물을 달게 하고(19-22), 마른 도랑에 물을 채우고(3:4-20) 기름 병의 기적을 행하고(4:1-7), 죽은 아이를 살리고(8-37), 사망의 독을 제하고(38-41)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고(5:1-14), 아람 군대를 소경되게 하였습니다(8 : 23)
성막 공사에 쓰임받는 브사넬을 보십십시오.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출 31:3) ”
적으로부터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한 옷니엘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삿 3:10)”
3) 모든 일에 성령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울은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인생을 미참하게 마감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입니다. 끝까지 성령님을 드러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피하여 라마 나욧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갔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죽이려고 합니다. 대적하지 않습니다. 성령에 이끌림받았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윗을 죽이려는 자들에게도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삼상 19:20)” 두 번째 보냅니다. 그들에게고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세 번째 보냅니다.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자 다윗을 잡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사울 자신이 나섰으나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그도 다윗을 잡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예언할 정도로 마음이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대적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도 움직여 주십니다.
비협조자들도 방관자들도 나의 지지자가 되어 집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미디안과 전쟁을 하여야 하는데 다른 미약한 지파 출신 기드온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 임하니까 미디안과의 싸움에 모든 지파가 협력합니다.(사사기6: 34-35)
세례 요한이 성령 충만하니까(눅 1 : 15) 그이 외침에 군중이 다 굴복합니다.(눅3:7-14)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떤 일을 이룬 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여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우리의 삶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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