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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4: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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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새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6)-인성 경쟁력
엡4:31-32
“오늘의 도전은 내일의 영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신은 시각 장애인으로 부시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내었고 자신의 아들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최연소 특별보좌관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위 공직자 500 명 안에 든 사람이 되었고 아들은 130명 안에 든 사람이 되어 나라를 섬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미국에 가서 부자가 최고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공화당에서도 민주당에서도 백악관에서 봉사한 분들입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대통령 임명만 받는 자리가 3,141개이고 상원 인준 절차를 받는 자리는 1,10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 봉사하고 싶어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33만 명을 상회한다고 합니다. 미국 행정부에서는 그들을 단지 성적순으로 뽑지 않고 미국인의 정신인 평등, 존엄, 책임, 정직, 긍휼, 존경 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행정부의 인재 선발 기준은 3C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즉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의 자세(commitment)라고 합니다. 단순하게 성적순으로만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이라는 아이비리그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sat 만점을 맞아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sat와 내신 성적은 베이스 라인만 어느 정도 웃돌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창의력, 실용능력, 윤리판단 능력, 분석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인터뷰, 추천서, 에세이, 과외활동 등을 통해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한 해 1,600 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공립학교 교육을 받고 사학은 겨우 4만명 정도인데 지난 4반세기 동안 미국 대통령은 물론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사학 명문고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립학교는 인성교육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성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세계 명문 학교, 1% 인재들의 공부법(최효찬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인도,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명문 보딩스쿨들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명문 학교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명문 보딩스쿨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 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명문학교들이 갖추고 있는 독특한 인성 교육 시스템이야말로 핵심인재를 만들어내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성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니까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불행은 인성 경쟁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청문회만 하면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위직에 올라갔지만 감옥에 가고 감옥 간 사람은 자신만 재수 없어 그렇게 희생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수 없게 나만 들켰다는 의식입니다. 어떻게든 자식들 군대 안 보내려고 합니다. 보내도 자신의 아들은 편한 보직을 주어 편한 곳에서 근무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성 경쟁력을 가지고 고위직에 오른 미국 사람들을 보십시오. 6·25 때 미국 장성의 자제 140여명이 참전해 그중 35명이 죽거나 다쳤답니다. 그중에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아들과 8군 사령관 조지 워커 장군의 아들,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이나 사회성을 갖춘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의 바탕과 사람됨의 품격과 성질이 좋은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세상을 좋은 세상이 됩니다. 인간다운 지, 덕, 체, 정, 의(智,德,體,情,意)를 골고루 겸비한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성품이 제대로 되고, 인간다운 품격을 갖춘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 도덕적 선량함이나 품위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원만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지(知), 정(情), 의(義)가 조화롭게 발달한 좋은 심성의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인 우리는 무엇보다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같이 있고 싶고, 사귀고 싶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가도 인간성이 좋다는 말을 듣고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벤자민 블름(Benjamin.S.Bloom)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은 4세까지 50%, 그리고 8세까지 80%가 발달한다고 하는데 인성 역시 어릴 때 부모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인성을 가진 아이'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세상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업도 학력· 학점· 토익 점수와 같은 스펙이 아무리 좋아도 인성이 안 된 사람은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도가 인성 경쟁력이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인성 경쟁력을 가지려면 거룩한 성도는 더러운 인간성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31)
사람이 “악하냐? 선하냐?”는 오랜 세월동안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荀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크(J. Locke)는 백지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태어날 때 백지(白紙)와 같이 아무런 관념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1)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2)”라고 말씀합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를 좋아하는 친죄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려 죄의 지배를 받고 죄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완벽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학교에서도 종교 교육은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쟈크 엘룰(Jacques Ellul)은『새로운 악마들』에서 인본주의에 대해, '의문없이 수용된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 전망의 기초이며, 공통언어의 기초이며,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의 기초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고 인간은 자율적이고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고 인간은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오류, 무지, 격정들을 제어하고 선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기관들, 사회, 교육, 경제체제, 사회의 계급적 위계, 관료제도 등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를 숭배하는 오늘의 우리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더러운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기주의가 춤을 추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과 같은 경제 혼란이 돈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돈은 차고 넘칩니다. 돈의 불균형 때문에 돈 홍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간음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미화되고 상품화되어 영상으로 가정 깊숙이 침투하고 인간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진정한 인성이 회복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인성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질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 4:31)"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은 거룩한 인성을 좀먹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경쟁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상종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오염시킵니다.
1)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피크리아)은 날카롭고 독기가 있는 마음씨를 가리킵니다(행3:23; 롬3:14) 풀어 해석하자면 까다롭고 온후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느 일에도 선한 것을 보지 못하는 즉 나쁜 것만 보려는 태도입니다. 어떤 결점이나 흠집만 꼬집어 내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 어디에 가도 경쟁력이 없습니다. 누가 회사에서 쓰길 원치 않습니다.
2) 노함을 버려야 합니다.
노함(뒤모스)는일시적인 분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눅4:28; 계16:19) 순간적, 무계획적 분노입니다. 분냄(오르게)은 일시적인 분노가 마음에 자리잡아 오랫동안 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마3:7; 롬2:5) 분냄이란 지속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두고 두고 한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인성 경쟁력이 없습니다. 환영받지 못합니다.
3) 떠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떠드는 것(크라우게)은 ‘부르짖다.’, ‘소리 지르다.’에서 유래된 말로 마음에 있는 분노를 밖으로 터뜨리는 결정적인 고함을 말합니다. 흥분한 사람들이 소리를 돋워 서로 싸우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쓰는 것을 포함합니다. 노함 분 냄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비방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일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롭도록 고의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여 해를 더해 주고 악하게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5)악의를 버려야 합니다.
악의(카키아)은 ‘사악함’, ‘악덕’을 말합니다. 본 절에서 언급한 악덕들의 근원입니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기뻐하며 이를 꾀하기 까지 하는 악한 경향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할 음모를 꾸미고 혼자서 그 일을 좋아하다가 실제로 그 계획을 옮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거룩한 성도로 경쟁력 있는 삶을 살려면 이런 것들을 버려버려야 합니다.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을 과감하게 버려버려야 거룩한 성도로서의 인성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인성 경쟁력을 가지려면 거룩한 성도는 입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입어야 합니다(32).
3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①친절 ②불쌍히 여김 ③용서 등은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인성입니다. 이 세 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잘 개발하면 어디 가나 환영받는 인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경쟁력 있는 인성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성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친절해야 합니다.
친절(크레스토스)은 ‘빌려주다’에서 유래한 말로 친절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친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되라는 것은 "그것은 개발하라 그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라는 것입니다. 악독하게 되는 것의 반대입니다.
악독한 사람은 까다로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사람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흠 있는 것을 발견해 내려고 야단하지 않고 언제나 칭찬할 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주고 그들의 난제를 풀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얼마나 친절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불친절하면 그 상점에 가지 않습니다. 불친한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우린 신앙인이 친절 경쟁력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독한 교회, 분냄과 노함이 있는 교회, 떠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친절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실화를 모아 펴낸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얘기"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떤 부인이 술에 취해 폭력을 가하는 남편과 싸워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택시를 타고 친정집으로 향했는데 한 30분 정도 달려 친정집에 거의 왔을 때 운전수 아저씨가 갑자기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밤늦게 어딜 간다니, 아마 남편과 싸운 모양이죠. 자세한 얘기는 묻지 않겠지만 오늘은 그냥 가만히 남편 곁으로 돌아가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부모님한테 가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택시비는 안 내도 되니까 집으로 돌아가세요.” 운전기사는 뒤에 앉아 훌쩍거리는 그녀를 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다시 처음 탓 던 곳으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고 남편과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운전기사의 친절을 두고두고 새겼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친절만 받아도 사람들을 살맛납니다. 친절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배려하는 친절로 인성이 개발되면 결코 손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친절일지라도 남에게 베푼 친절은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하였습니다. 친절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이익이 없어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면 아무리 작은 친절일지라도 친절은 사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친절은 경쟁력이 있고 친절은 생명력이 있어 심어 놓으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도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을 베풀면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물건도 사지 않고 스쳐가는 손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낭비가 아닙니다. 기억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은 화려한 옷에 진한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이 아니라 친절한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최후의 승자는 친절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오래 간직하고 싶은 사랑은 친절한 사랑이며 친절한 눈길은 가슴을 파고들어 시간이 지나면 닫힌 마음의 지갑을 열어줍니다. 겨울 땅바닥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 주는 말은 친절한 말이며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친절한 말을 한다고 혀가 다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은 벙어리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친절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미국에서 80대 부부가 한 의사의 친절한 진료를 받고 500억원을 병원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집에까지 전화 걸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훌륭한 의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서적 외판원을 하는 남루한 복장의 고학생이 나타났답니다. 더위와 굶주림에 지친 청년은 마을입구의 허름한 집을 방문했답니다. 한 소녀가 책을 파는 학생을 맞아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 책을 살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시원한 우유 한 잔을 부탁했답니다. 이 때 소녀는 쟁반에 우유 두 잔을 담아 정성껏 대접했고 그는 소녀의 친절에 감동해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두었답니다. 그 후 세월은 20 여 년이 흘렀습니다. 메릴랜드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답니다. 이 때 병원장 하워드 켈리 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답니다. 그녀의 치료비는 1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토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받아든 청구서 뒤에는 병원장의 짤막한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답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두 잔이 치료비입니다" 20년 전에 베푼 작은 친절이 1만 달러가 넘는 보은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원장이 된 20년 전의 고학생은 우유 두 잔의 친절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작은 미소 하나가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작은 친절이라도 베풀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긴 강도 한 방울 물에서 시작됩니다. 친절은 무형의 자산이며 친절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친절은 때로는 아주 값진 것으로 돌아옵니다. 톨스토이는 "친절은 지나쳐도 좋다"라고 했고, 괴테는 "친절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행위이며 똑똑하기 보다는 친절한 편이 낫다."라고 했으며, 헬런 켈러는 "삭막한 인생을 친절로 적시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친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방문객에게 친절을 베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히 13:2).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쟁력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감각없는 자였고 마음이 굳어 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흠을 보고 비방하고 떠들어 댔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연민의 감정이 생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굳어 버린 상태에 있지 않게 됩니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까?
많은 병자들과 굶주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시고 먹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홀로되어 외아들을 의지하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나인성에서 장례 행렬이 동네 밖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갑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눅 7:13)”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살려 주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삶의 행렬로, 절망의 행렬이 희망의 행렬로 바꾸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이 여겼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인성 경쟁력이 있습니다. 부자도, 권력자도, 가난한 자도, 남편도, 아내도,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아이들도, 부모님도 생각해 보면 다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두 다 결함이 있는 존재이고 무언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부족합니다. 질병이 없는 것 같지만 대부분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 범죄한 사람들, 이웃, 가난한 자, 형제, 병자, 고통당하는 자, 실패한 자들 모두 불쌍한 자들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남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긍휼을 베풀고 남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불이익과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매정하고 냉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며, 표독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마저 긍휼은 단지 종교적 용어에 불과하고 현실 속에서는 바리새인들처럼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휼은 단지 장식품에 불과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정죄하고 매장하며, 해치는데 익숙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불쌍히 여기고 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맙다고 문을 나가는데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라고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혹하게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 소식을 주인이 듣고 다시 불러 "내가 네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왜 긍휼을 베풀 줄을 모르느냐, 내가 너의 만 달란트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불쌍합니다. 긍휼은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긍휼은 꼭 강자의 윤리만은 아닙니다. 힘이 있어야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매정하고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고, 표독스럽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거꾸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긍휼을 통한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악의와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하였다면 그러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들이 행한 나쁜 일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을 용서해 주며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하나의 사람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사탄의 속임수에 의한 죄의 희생자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마태복음 18장 21절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입니까? 당시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생각하여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합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거룩한 성도의 인성 경쟁력입니다. 용서 받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 할 수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 11:25)”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에서도 사기꾼 같은 동생 야곱을 용서했습니다(창33:3-15)
자신을 인신매매한 형들을 요셉은 용서했습니다(창45:8-15) (창50:15-21)
자신의 권을 도전하고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을 모세는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십자가에서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시어머니, 며느리, 구역식구, 나에게 해를 끼친 자.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자. 결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거들랑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한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살아 계실 때 유효한 것입니다. 죽은 후에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용서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답니다. 그리고 성도를 향해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라고 했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답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저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답니다. 목사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했답니다. "응, 있었는데… 다… 죽었어."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용서를 통한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최악의 정치범인 D급 죄수였습니다. 면회는 6개월에 한 번, 편지도 한 통밖에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듬해에는 큰 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둘째 딸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되어 데스 몬드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비큐처럼 불에 그슬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상처의 흔적은 남는다할 지라도 상처가 올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인성 경쟁력이 없습니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으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용서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준만큼 거두기가 힘들고 같이한 시간이 긴 만큼 골은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성적으로도 용납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용납된다하여도 감정적으로 정리되는 데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했으니 그 말씀 순종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과정을 통해 감정적인 부분도 정리되어져 갑니다. 상처가 완전히 망각이 되지 않지만 그 기억이 아픔이 되어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자신을 생각하면 긍휼과 은혜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목이지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겠다는 의도적인 결정이며, 잘못으로 인해 악한 감정을 갖는 다든지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는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 이 여섯 가지를 과감하게 버려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서로 ①친절 ②불쌍히 여김 ③용서 등 이 세 가지로 내 인성을 무장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9.25
엡4:31-32
“오늘의 도전은 내일의 영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신은 시각 장애인으로 부시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내었고 자신의 아들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최연소 특별보좌관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위 공직자 500 명 안에 든 사람이 되었고 아들은 130명 안에 든 사람이 되어 나라를 섬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미국에 가서 부자가 최고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공화당에서도 민주당에서도 백악관에서 봉사한 분들입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대통령 임명만 받는 자리가 3,141개이고 상원 인준 절차를 받는 자리는 1,10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 봉사하고 싶어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33만 명을 상회한다고 합니다. 미국 행정부에서는 그들을 단지 성적순으로 뽑지 않고 미국인의 정신인 평등, 존엄, 책임, 정직, 긍휼, 존경 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행정부의 인재 선발 기준은 3C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즉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의 자세(commitment)라고 합니다. 단순하게 성적순으로만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이라는 아이비리그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sat 만점을 맞아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sat와 내신 성적은 베이스 라인만 어느 정도 웃돌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창의력, 실용능력, 윤리판단 능력, 분석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인터뷰, 추천서, 에세이, 과외활동 등을 통해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한 해 1,600 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공립학교 교육을 받고 사학은 겨우 4만명 정도인데 지난 4반세기 동안 미국 대통령은 물론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사학 명문고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립학교는 인성교육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성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세계 명문 학교, 1% 인재들의 공부법(최효찬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인도,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명문 보딩스쿨들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명문 학교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명문 보딩스쿨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 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명문학교들이 갖추고 있는 독특한 인성 교육 시스템이야말로 핵심인재를 만들어내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성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니까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불행은 인성 경쟁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청문회만 하면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위직에 올라갔지만 감옥에 가고 감옥 간 사람은 자신만 재수 없어 그렇게 희생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수 없게 나만 들켰다는 의식입니다. 어떻게든 자식들 군대 안 보내려고 합니다. 보내도 자신의 아들은 편한 보직을 주어 편한 곳에서 근무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성 경쟁력을 가지고 고위직에 오른 미국 사람들을 보십시오. 6·25 때 미국 장성의 자제 140여명이 참전해 그중 35명이 죽거나 다쳤답니다. 그중에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아들과 8군 사령관 조지 워커 장군의 아들,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이나 사회성을 갖춘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의 바탕과 사람됨의 품격과 성질이 좋은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세상을 좋은 세상이 됩니다. 인간다운 지, 덕, 체, 정, 의(智,德,體,情,意)를 골고루 겸비한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성품이 제대로 되고, 인간다운 품격을 갖춘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 도덕적 선량함이나 품위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원만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지(知), 정(情), 의(義)가 조화롭게 발달한 좋은 심성의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인 우리는 무엇보다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같이 있고 싶고, 사귀고 싶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가도 인간성이 좋다는 말을 듣고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벤자민 블름(Benjamin.S.Bloom)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은 4세까지 50%, 그리고 8세까지 80%가 발달한다고 하는데 인성 역시 어릴 때 부모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인성을 가진 아이'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세상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업도 학력· 학점· 토익 점수와 같은 스펙이 아무리 좋아도 인성이 안 된 사람은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도가 인성 경쟁력이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인성 경쟁력을 가지려면 거룩한 성도는 더러운 인간성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31)
사람이 “악하냐? 선하냐?”는 오랜 세월동안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荀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크(J. Locke)는 백지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태어날 때 백지(白紙)와 같이 아무런 관념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1)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2)”라고 말씀합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를 좋아하는 친죄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려 죄의 지배를 받고 죄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완벽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학교에서도 종교 교육은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쟈크 엘룰(Jacques Ellul)은『새로운 악마들』에서 인본주의에 대해, '의문없이 수용된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 전망의 기초이며, 공통언어의 기초이며,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의 기초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고 인간은 자율적이고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고 인간은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오류, 무지, 격정들을 제어하고 선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기관들, 사회, 교육, 경제체제, 사회의 계급적 위계, 관료제도 등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를 숭배하는 오늘의 우리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더러운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기주의가 춤을 추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과 같은 경제 혼란이 돈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돈은 차고 넘칩니다. 돈의 불균형 때문에 돈 홍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간음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미화되고 상품화되어 영상으로 가정 깊숙이 침투하고 인간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진정한 인성이 회복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인성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질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 4:31)"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은 거룩한 인성을 좀먹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경쟁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상종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오염시킵니다.
1)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피크리아)은 날카롭고 독기가 있는 마음씨를 가리킵니다(행3:23; 롬3:14) 풀어 해석하자면 까다롭고 온후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느 일에도 선한 것을 보지 못하는 즉 나쁜 것만 보려는 태도입니다. 어떤 결점이나 흠집만 꼬집어 내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 어디에 가도 경쟁력이 없습니다. 누가 회사에서 쓰길 원치 않습니다.
2) 노함을 버려야 합니다.
노함(뒤모스)는일시적인 분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눅4:28; 계16:19) 순간적, 무계획적 분노입니다. 분냄(오르게)은 일시적인 분노가 마음에 자리잡아 오랫동안 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마3:7; 롬2:5) 분냄이란 지속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두고 두고 한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인성 경쟁력이 없습니다. 환영받지 못합니다.
3) 떠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떠드는 것(크라우게)은 ‘부르짖다.’, ‘소리 지르다.’에서 유래된 말로 마음에 있는 분노를 밖으로 터뜨리는 결정적인 고함을 말합니다. 흥분한 사람들이 소리를 돋워 서로 싸우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쓰는 것을 포함합니다. 노함 분 냄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비방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일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롭도록 고의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여 해를 더해 주고 악하게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5)악의를 버려야 합니다.
악의(카키아)은 ‘사악함’, ‘악덕’을 말합니다. 본 절에서 언급한 악덕들의 근원입니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기뻐하며 이를 꾀하기 까지 하는 악한 경향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할 음모를 꾸미고 혼자서 그 일을 좋아하다가 실제로 그 계획을 옮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거룩한 성도로 경쟁력 있는 삶을 살려면 이런 것들을 버려버려야 합니다.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을 과감하게 버려버려야 거룩한 성도로서의 인성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인성 경쟁력을 가지려면 거룩한 성도는 입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입어야 합니다(32).
3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①친절 ②불쌍히 여김 ③용서 등은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인성입니다. 이 세 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잘 개발하면 어디 가나 환영받는 인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경쟁력 있는 인성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성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친절해야 합니다.
친절(크레스토스)은 ‘빌려주다’에서 유래한 말로 친절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친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되라는 것은 "그것은 개발하라 그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라는 것입니다. 악독하게 되는 것의 반대입니다.
악독한 사람은 까다로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사람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흠 있는 것을 발견해 내려고 야단하지 않고 언제나 칭찬할 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주고 그들의 난제를 풀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얼마나 친절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불친절하면 그 상점에 가지 않습니다. 불친한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우린 신앙인이 친절 경쟁력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독한 교회, 분냄과 노함이 있는 교회, 떠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친절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실화를 모아 펴낸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얘기"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떤 부인이 술에 취해 폭력을 가하는 남편과 싸워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택시를 타고 친정집으로 향했는데 한 30분 정도 달려 친정집에 거의 왔을 때 운전수 아저씨가 갑자기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밤늦게 어딜 간다니, 아마 남편과 싸운 모양이죠. 자세한 얘기는 묻지 않겠지만 오늘은 그냥 가만히 남편 곁으로 돌아가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부모님한테 가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택시비는 안 내도 되니까 집으로 돌아가세요.” 운전기사는 뒤에 앉아 훌쩍거리는 그녀를 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다시 처음 탓 던 곳으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고 남편과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운전기사의 친절을 두고두고 새겼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친절만 받아도 사람들을 살맛납니다. 친절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배려하는 친절로 인성이 개발되면 결코 손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친절일지라도 남에게 베푼 친절은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하였습니다. 친절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이익이 없어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면 아무리 작은 친절일지라도 친절은 사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친절은 경쟁력이 있고 친절은 생명력이 있어 심어 놓으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도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을 베풀면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물건도 사지 않고 스쳐가는 손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낭비가 아닙니다. 기억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은 화려한 옷에 진한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이 아니라 친절한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최후의 승자는 친절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오래 간직하고 싶은 사랑은 친절한 사랑이며 친절한 눈길은 가슴을 파고들어 시간이 지나면 닫힌 마음의 지갑을 열어줍니다. 겨울 땅바닥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 주는 말은 친절한 말이며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친절한 말을 한다고 혀가 다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은 벙어리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친절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미국에서 80대 부부가 한 의사의 친절한 진료를 받고 500억원을 병원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집에까지 전화 걸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훌륭한 의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서적 외판원을 하는 남루한 복장의 고학생이 나타났답니다. 더위와 굶주림에 지친 청년은 마을입구의 허름한 집을 방문했답니다. 한 소녀가 책을 파는 학생을 맞아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 책을 살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시원한 우유 한 잔을 부탁했답니다. 이 때 소녀는 쟁반에 우유 두 잔을 담아 정성껏 대접했고 그는 소녀의 친절에 감동해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두었답니다. 그 후 세월은 20 여 년이 흘렀습니다. 메릴랜드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답니다. 이 때 병원장 하워드 켈리 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답니다. 그녀의 치료비는 1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토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받아든 청구서 뒤에는 병원장의 짤막한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답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두 잔이 치료비입니다" 20년 전에 베푼 작은 친절이 1만 달러가 넘는 보은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원장이 된 20년 전의 고학생은 우유 두 잔의 친절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작은 미소 하나가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작은 친절이라도 베풀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긴 강도 한 방울 물에서 시작됩니다. 친절은 무형의 자산이며 친절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친절은 때로는 아주 값진 것으로 돌아옵니다. 톨스토이는 "친절은 지나쳐도 좋다"라고 했고, 괴테는 "친절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행위이며 똑똑하기 보다는 친절한 편이 낫다."라고 했으며, 헬런 켈러는 "삭막한 인생을 친절로 적시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친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방문객에게 친절을 베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히 13:2).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쟁력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감각없는 자였고 마음이 굳어 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흠을 보고 비방하고 떠들어 댔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연민의 감정이 생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굳어 버린 상태에 있지 않게 됩니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까?
많은 병자들과 굶주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시고 먹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홀로되어 외아들을 의지하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나인성에서 장례 행렬이 동네 밖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갑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눅 7:13)”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살려 주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삶의 행렬로, 절망의 행렬이 희망의 행렬로 바꾸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이 여겼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인성 경쟁력이 있습니다. 부자도, 권력자도, 가난한 자도, 남편도, 아내도,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아이들도, 부모님도 생각해 보면 다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두 다 결함이 있는 존재이고 무언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부족합니다. 질병이 없는 것 같지만 대부분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 범죄한 사람들, 이웃, 가난한 자, 형제, 병자, 고통당하는 자, 실패한 자들 모두 불쌍한 자들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남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긍휼을 베풀고 남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불이익과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매정하고 냉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며, 표독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마저 긍휼은 단지 종교적 용어에 불과하고 현실 속에서는 바리새인들처럼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휼은 단지 장식품에 불과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정죄하고 매장하며, 해치는데 익숙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불쌍히 여기고 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맙다고 문을 나가는데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라고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혹하게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 소식을 주인이 듣고 다시 불러 "내가 네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왜 긍휼을 베풀 줄을 모르느냐, 내가 너의 만 달란트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불쌍합니다. 긍휼은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긍휼은 꼭 강자의 윤리만은 아닙니다. 힘이 있어야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매정하고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고, 표독스럽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거꾸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긍휼을 통한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악의와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하였다면 그러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들이 행한 나쁜 일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을 용서해 주며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하나의 사람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사탄의 속임수에 의한 죄의 희생자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마태복음 18장 21절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입니까? 당시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생각하여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합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거룩한 성도의 인성 경쟁력입니다. 용서 받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 할 수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 11:25)”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에서도 사기꾼 같은 동생 야곱을 용서했습니다(창33:3-15)
자신을 인신매매한 형들을 요셉은 용서했습니다(창45:8-15) (창50:15-21)
자신의 권을 도전하고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을 모세는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십자가에서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시어머니, 며느리, 구역식구, 나에게 해를 끼친 자.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자. 결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거들랑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한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살아 계실 때 유효한 것입니다. 죽은 후에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용서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답니다. 그리고 성도를 향해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라고 했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답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저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답니다. 목사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했답니다. "응, 있었는데… 다… 죽었어."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용서를 통한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최악의 정치범인 D급 죄수였습니다. 면회는 6개월에 한 번, 편지도 한 통밖에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듬해에는 큰 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둘째 딸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되어 데스 몬드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비큐처럼 불에 그슬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상처의 흔적은 남는다할 지라도 상처가 올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인성 경쟁력이 없습니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으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용서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준만큼 거두기가 힘들고 같이한 시간이 긴 만큼 골은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성적으로도 용납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용납된다하여도 감정적으로 정리되는 데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했으니 그 말씀 순종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과정을 통해 감정적인 부분도 정리되어져 갑니다. 상처가 완전히 망각이 되지 않지만 그 기억이 아픔이 되어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자신을 생각하면 긍휼과 은혜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목이지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겠다는 의도적인 결정이며, 잘못으로 인해 악한 감정을 갖는 다든지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는 인성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악독 ②노함 ③분냄 ④떠드는 것 ⑤비방하는 것 ⑥악의 등 이 여섯 가지를 과감하게 버려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서로 ①친절 ②불쌍히 여김 ③용서 등 이 세 가지로 내 인성을 무장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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