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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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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새 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8) 거룩 경쟁력
엡5:3-7
영화 도가니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인학교 인화학교의 62세된 교장은 13살 된 청각장애아를 성폭행했다고 고발당했습니다. 60세인 교장 동생인 행정실장은 정신연령이 3세에 불과한 22살 자매를 성폭행하였고, 38세 된 기숙사 생활재활교사는 7살 난 남자아이를 성추행했다고 고발당했습니다. 교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장 동생은 실형 1년 8개월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갔고, 기숙사 생활재활교사도 실형 2년 6개월을 받아 교도소에 갔습니다. 행정실장과 생활재활교사는 이미 청소년 강간죄 등으로 각각 징역 1년, 2년을 선고받은 전과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적 욕망을 규제하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입니다. 마땅히 보호하고 가르쳐야 할 선생님들에 의해 일어난 성폭행이었습니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한 인생이 되었겠습니까? 더군다나 교장은 교회를 다니는 집사였다고 합니다. 그 학교 홈페이지를 보니까 “웃음이 넘치는 학교, 행복한 학교”로 되어 있습니다. 가해자가 그들은 처음에는 다 장애인을 위해 교사로 헌신했을 것입니다. 성적 욕망을 채우기 취업한 선생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욕망 앞에 이성과 신앙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행정실장과 교사 등은 지속적으로 어린이들을 성추행해 왔지만 교장은 한 순간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이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인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고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인생이 비극적입니까? 가해자의 자녀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피해 아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겠습니까?
성적 욕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 심리를 평생 연구한 프로이드는 인생의 근본을 성적 욕구로 풀어갑니다. 유아 때부터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性) 충동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말합니다. 이 리비도는 전 인생을 통하여 신체의 특정 부위에 집중되어 나타나는데 이때의 특정 부위를 성감대라고 합니다. 성감대의 위치 변화에 따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로 성격 발달의 단계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성욕을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매일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폭력이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직장에서,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가정에서, 초등학생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범죄 공화국'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 해 전국 일선 검찰청에 사건이 접수돼 수사를 받은 성폭력사범은 2만 1116명으로 2007년(1만5819명)에 비해 33.5%나 늘어났습니다. 하루에 57.8건 일어납니다. 2010년 아동 · 청소년 대상 성폭력 사건은 모두 7225건이 발생했고, 이 가운데 13세 미만 아동 성폭력 사건은 1012건으로 전체의 1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2.7명꼴로 아동들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고모부, 작은아버지 등 일가족에게 10대가 성폭행 당한 일도 보도되었습니다. 사위가 여장하고 가서 장모를 성폭행한 일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족 성폭력의 절반은 친 아버지라는 사실도 보도되었습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신고율이 10% 안팎이라고 하니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여성을 상품으로 한 향락산업이 얼마나 번창하고 있습니까? 2007년 여성가족부 전국 성매매 실태조사에 의하면 업소수는 46,247개이고, 성매매 여성수는 269,707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여성민우회는 성매매여성의 수를 1,208,865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무허가 업소의 종업원 수, 종업원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수, 상시 고용되어 있지 않고 ‘보도’ 등을 통해 아르바이트하는 수 등을 감안한다면 120만 명의 수치는 최소한의 성매매 종사자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검찰 집계에 의하면 150여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0년 통계청 인구주택조사에 의하면 여자가 24,237,000명입니다. 이중 15세부터 39세까지는 여성은 8,656,000 명입니다. 단순계산으로 이는 15세에서 39세에 분포된 연령대 여성의 거의 1/5이 성산업에 유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가족부 자료에 의하면 연간 성구매자 수는 93,950,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25만 7천 여 명이 성매매에 나선다는 것입니다. 성매매 경제규모 추정액은 연간 14조 952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2010년도 국내총생산(GDP) 1,172조 8030억원의 약 1.2%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같이 살았던 톨스토이도 '성욕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투쟁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 왕도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부하까지 죽였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반쪽냈습니다. 롯의 두 딸은 잘못된 성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았는데 술취한 아버지를 범합니다. 성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프랑스의 빼어난 인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그리스 자연철학자입니다. 그는 만물은 물, 불, 공기, 흙으로 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사였고, 민주주의를 수호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종교가였답니다. 의사로서 도시에 창궐했던 전염병을 막았고 모든 의사들이 손을 들고 만 아그리젠토의 판테이아라는 여성을 고쳐준 것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그를 거의 ‘신’으로 추앙했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화산에 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을 그의 이름을 따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고 말합니다. 외도하고 성폭행하면 뻔히 어떤 결과나 나타날 줄 알면서도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인간은 성을 탐닉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빈 해리스는 ‘아워 카인드(Our Kind)’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작은 인간’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충동과 욕구의 면에서 성욕과 식욕 중 어느 것이 강한가를 다룹니다. 배고픔이 극도에 달하면 식욕이 성욕을 완전히 눌러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욕이 오래도록 채워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식욕이 성욕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왕성해 진다고 합니다. 식욕도 적당히 채울 수 있고 성욕도 적당히 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성욕이 식욕을 쉽게 물리쳐버린다고 합니다. 성욕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성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며 자신의 재산과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욕은 에이즈를 비롯한 온갖 성병을 무릅쓸 정도로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쾌락에 대한 추구는 향정신성 약물을 탐닉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이 일생 동안 40,00여번의 성교를 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절정을 느끼는 순간은 남자의 경우 단 몇 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초로 잡는다고 해도 남자들이 한평생 절정을 맛보는 시간은 200분, 그러니까 4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일생 동안 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쾌락, 한 줌도 되지 않는 쾌락을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걸기까지 하고 사창가를 기웃거리며 청춘을 낭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욕이 얼마나 강한가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뇌에서 '성 센터'라 불리는 시상하부가 있습니다. 뇌의 쾌락 센터에 전류가 흐르도록 자극하는 버튼과 음식과 물이 나오는 버튼을 개와 고양이에게 주고 실험을 해보았더니 그 동물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죽을 때까지 쾌락 버튼만 눌러대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들과 차이가 있겠지만 성적 욕망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는 실험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신앙생활하는데 얼마나 이 부분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 전쟁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적당이가 아이라 철저히 목숨걸고 구별되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별된 삶 거룩한 삶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면에서 거룩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처럼 성적 유혹과 성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한 순간의 쾌락은 누릴지 몰라도 국무총리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도의 거룩한 경쟁력 일곱 번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성적인 면에서 거룩 경쟁력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네 가지 동사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하나님의 처방전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3).
둘째는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하지 말고 감사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4).
셋째는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6).
넷째는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7).
1.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거룩 경쟁력을 가지려면 온갖 음란한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한 말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로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음담 패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3절과 5절을 보십시오. 이름도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3,5)을 말합니다.
음행(포르네이아)은 ‘간음’, ‘매음’의 뜻을 지니는 말로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불법적인 성관계를 말합니다.
더러운 것은 음행의 불결한 성격을 묘사한 말입니다.
탐욕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망이지만 여기서는 성적인 것과 결부되어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육체를 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하는 말씀의 탐냄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말을 입에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누추함은 추잡한 말을 말합니다. 천하고 속된 말입니다. 저급한 말입니다.
어리석은 말은 아무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희롱하는 말은 상스러운 말입니다. 가장 값싸고 품위 없는 형태의 성적 농담을 말합니다.
다 성적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 음담패설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언어 자체에는 인간을 구속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성적 유희'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다보며 필연적으로 그것에 얽매이게 되어 간음, 음란한 상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직-간접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으면 이제 언어생활이 바뀌어야 합니다. 왕자다운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었는데 시정잡배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습니까?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서울의 한 음식 점에 갔습니다. 할아버지 몇이 들어 왔습니다. 이야기를 하는데 성적으로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창가에 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늙기 전에 젊은 것들 몇 명이라도 더 따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성당의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답니다.
"신부님, 저는 올해 75세인데 50년동안 결혼생활을 했지요. 그동안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안줬는데, 두 달 전에 18살 아가씨를 만나 외도를 하였답니다." "두 달 전이라고 하셨나요? 그럼 그동안 성당에 한 번도 안 나오셨습니까?" "성당이요? 여긴 오늘 평생 처음 오는거에요. 전 불교신자거든요."
"그럼 지금 왜 저에게 얘기를 하고 계신가요?" "동네 사람들에게 다 자랑했는데 신부님에게만 안했거든요."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남자들 군대에 가면 음담패설을 배우고 합니다. 말로 성적 욕망을 해소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성적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왜 음탕한 말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위의 원리입니다. 말은 그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시하고 결정해 줍니다. 우리는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거지가 아닙니다. 사탄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근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아 거룩성을 지켜야 할 사람입니다. 예날 우리나라 말로하면 쌍놈이 아니고 양반이다는 말입니다.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네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주의입니다. 쾌락, 행복, 공리를 위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용주의입니다. 인간에게 실리, 유효성, 이익, 유익을 위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법칙주의입니다. 마땅히 인간이 실천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도덕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상황주의입니다. 상황에 따라 도덕적 가치기준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 입법자이냐에 따라 신권설(타자)과 자연법설(인간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삽니다. 자기 드러내고, 자기가 최고 되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내가 좋다해도 세상이 좋다해도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하나님을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우리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지렁이는 진흙탕을 좋아 하지만 금붕어는 맑은 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못 들어가느냐고 반문하실 수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입술로 만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참 믿음은 행함이 따를 것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음행, 더러움, 탐함과 같은 열매가 나타나면 실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성적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은 금욕주의와 성애주의가 있습니다. 금욕주의는 성은 다 더럽다고 생각하며 기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애주의는 성은 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성적 탐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은 결혼 안에서 배우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애주의는 결국 성을 최고로 생각하는 우상이 되고 성에 대한 탐욕은 잘 못된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게 합니다. 불나방처럼 죽어야 끝이 납니다. 체험하면 그것에 헌신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독 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매력이 있습니다. 이와 관계하여 다른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 22:15)”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들을 보십시오. 목회자도 바람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바람피우는 사람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름 있는 목회자인데 같은 교회 다니는 여집사와 바람이 났답니다. 남편이 수상히 여겨 출근한 후 집을 급습하였습니다. 그 목회자가 도망을 가야하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베란다 창문틀을 잡고 있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떨어지는 장면을 누가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았습니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6)”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적인 면에서 거룩 경쟁력을 가지려면 철저히 말로라도 음담패설을 하지 말고 오히려 신앙인답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면 잡초를 위해 땅을 남겨 두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거룩 경쟁력을 가지려면 온갖 음란한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6).
6절을 보십시오.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도 에로스라는 헛된 말로 인간들을 속였지만 오늘날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우리들을 속이려 들고 있습니까?
바울이 사는 고대 세계는 성적인 부도덕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첩을 가지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고린도 같은 곳에는 신전에 몇 백명씩이나 되는 여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소위 거룩한 매춘부였으며 그들의 수입으로 신전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문헌에 의하며 아덴에서 공창제도를 제일 처음 도입하여 창녀굴을 짓게 한 사람은 솔론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사업의 이득으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 디테를 위한 새로운 신전을 짓게 하였답니다. 매춘행위로 얻어진 수입으로 신전을 짓는 것은 조금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은 때입니다.
또한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에베소를 수호한다는 수호신 헬라여신 아데미 즉 풍요의 여신을 그들은 섬겼는데 그를 숭배하는 데는 보통 성적 향연이 수반되었습니다.
당시 지성이라고 하는 시세로는 "만일 누구든지 젊은 이들에게 절대로 매춘부를 사랑하지 못하게 금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우리 자신의 시대가 허용하는 바에 대하여 뿐아니라 우리 조상 때부터 내여온 관습과 유풍에 대해서도 모순되고 있는 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관, 인생관, 행복관, 부부관, 세계관, 가지관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네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발전 우상 주의(황금만능주의)입니다. 둘째가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셋째가 과학만능주의입니다. 넷째가 쾌락 중심주의입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권력과 돈, 섹스 삼위 일체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풍요의 여신 아데미 앞에서 성적 향연을 베푸며 신을 잘 섬겼는데 그 속에 권력, 돈, 섹스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자들은 성은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은 예술인데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 심의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름철 여성의 과도한 노출에 대하여 설문 조사를 하는데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할아버지에게 “여름철 여성들의 패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연세가 드셔서 잘 알아 듣지를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물었답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그저 고마울 뿐이지~~~"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산부인과 전문의 정경숙박사가 신문에 요즘 남자들은 참 멋있다고 글을 썼습니다. 사귀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는데 자신이 여자에게 옮겨준 성병을 새신랑에게 옮겨줄까봐 걱정되어, 핸드폰에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남겨놓을 만큼 사려가 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여자들도 영리하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병을 옮겨준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남편의 국에 몰래 치료약을 타면서 “삼국지의 조조도 생각 못했을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니냐”고 자화자찬하는 여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업 20년이 된 의사가 그간 신세대여성들이 상담하며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사랑에 대해 내린 결론은 ‘사랑은 Passion(열정) 이 아닌 Fashion(유행)’이라고 말합니다. 신세대여성들은 남자를‘고를’때 첫째가 여자친구가 처녀가 아니어도 개의치 않는가, 둘째 남자의 섹스능력이 얼마나 되는가, 라는 거죠.”라고 말합니다. 조금 지나친 듯하지만 현실을 반영한 진단일 것입니다.
혼전 순결을 강요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잘못된 사고라는 것입니다. 즐기면서 피임만 잘하라는 것입니다. 즐기면서 병만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고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하는 사람은 전 근대적인 사람이고 멋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성 간에도 얼마든지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에 족쇠를 채워놓았으니 하나님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껏 즐기라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유혹합니다. 책을 통해 유혹합니다. 포르노를 통해 부부끼리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성관계의 즐거움을 미화시킵니다. 성이 인생의 모든 것인 양 포장합니다. 노출은 아름다운 것이고 젊을 때 벗은 몸 찍어 놓자는 것입니다. 성을 상품화하여 유혹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습니까? 유혹은 성공을 위한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신문을 보아도, 방송을 들어도, 인터넷에 들어가도 얼마나 많이 우리를 유혹하는 성적 속임수가 많이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제자 제자 훈련하는 집사님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회사 부서에 남자 사원 5명과 여자 사원 1명이 근무하는 부서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사원이 5섯명과 돌아가면서 다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부서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극히 일부의 현상일 줄 압니다. 모두다 그렇다고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유럽은 이미 30년 전에 성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피임약을 챙겨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선교하시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나라는 학생 기록부에 제 1부모 제 2 부모를 쓰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반 중에서 제 1부모만 있는 사람은 자기 아들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4-16)”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잠 5:15-19)”
왜 속지 말아야 합니까?
이 이유를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진노란 심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종교란 원시인에게 속한 하나의 미신이라고 합니다. 이제 과학으로 모든 것이 밝혀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질병적 차원에서 설명하려합니다. 사람의 내분비 선의 균형이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일만 행하게 하기 때문에 욕구대로 사는 것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장수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 겁주지 말라고 합니다. 과거 과학이 발달돼지 못할 때나 겁을 먹었지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는 반드시 임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진리이고 성경적 진리이며 개인적 실제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까? 바로 지금 이 시각입니다. ‘임한다.’는 말은 현재 동작 계속적인 현재를 말합니다. 양심의 후회, 죄로 오는 고통, 육신의 고통이 임합니다. 역사적 심판을 받습니다. 최후에 심판을 받습니다.
순간의 쾌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따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잘못된 성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자신들도 양심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은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얼마나 손해입니까? 인공유산이 일 년 150만 건이나 된다는 고합니다. 이중 47%가 출산 경험이 없는 10-20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못하게 하니까 중국에 가서 인공유산을 한다고 합니다. 향락산업으로 얼마나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어른들이 돈벌기 위해 만든 포르로물이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망치고 있습니까?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에이즈와 관련된 질병으로 총 2500여만 명이 숨지고 있다고 합니다. 에이즈 감염자는 333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매일 전 세계에서 4900여명이 목숨을 잃고, 7000여명이 감염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고 있습니까?
정부가 기업이 룸살롱에서 접대할 권리를 인정하고 초.중.고등학교 근처에까지 침투한 향락업소는 그대로 방치하면서, 또 문화 부문 예산을 정부 예산의 0.56% 수준에 묶어 놓고 대중의 건전한 놀이 문화 육성을 위해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대중매체만 규제하면 된다니 그건 그 얼마나 기만적입니까? 성적인 타락은 한 나라의 도덕적인 표준이 됩니다. 인간 윤리의 가장 기본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은 사회제도의 기초입니다. 성의 타락은 가정의 파괴로 이어지고 가정의 파괴는 곧 사회 국가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노아 시대가 망한 것은 근본적으로 성적 타락이었습니다(창6:2)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창19장) 폼페이가 멸망한 것도, 로마가 붕괴된 것도 성적 타락에 있습니다. 유럽 사회가 저물어 가는 것도 성적 타락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을 한 치도 틈을 주거나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자그마한 틈만 주어도 성적 유혹은 강력하게 밀고 들어옵니다.
3.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거룩 경쟁력을 가지려면 성적 타락에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성적 부도덕에 의지적으로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해 버려야 합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도덕한 친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문자 메시지가 오면 과감하게 지워버리고 스펨으로 처리해 버려야 합니다. 미련 둘 것 없습니다. 오빠라고 유혹하면 그런 동생 둔 일 없다고 과감하게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채팅앱 등 SNS를 통해 음란물과 성매매 유호이 쏟아집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성매매와 음란물 유통의 온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감하게 접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에 한 번 참여하면 마수에 걸리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 정도록 전지전능해졌습니다. 우리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들어나면 낭패를 당하고 상처와 공포, 수치심 속에 살아야 합니다. 성을 상품화하는 문화를 과감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수와 여제자를 보며 고상한 예술품을 감상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엉덩이춤을 추는 걸그룹이 나오면 열광하지 말고 과감하게 채널을 돌려 버려야 합니다. 말초 감각을 자극하여 성적 유혹으로 끌고 가는 환경을 과감하게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꽃미남 향한 유부녀의 육탄공세를 합니다. 중년 여성이 날마다 유혹을 합니다. 동침하자는 것입니다. 옷을 잡고 늘어집니다. 그 때 옷을 벗어 던지고 피해 버립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 39:10)”
그 때 요셉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아이들 행사를 하는데도 노래방 가서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득이 하지 않으면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구별된 거룩한 놀이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를 보십시오.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습니다.(삼상 2 : 22). 과감하게 다루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삼상 2:23-24)” 말로만 하고 맙니다. 과감하게 징계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격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성적인 면에서 거룩한 경쟁력을 가져야 합니다. 더러운 것은 말도 하지 말고 유혹에 넘어가지도 말고 결코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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