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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한 삶

에배소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721 추천 수 0 2011.11.20 20: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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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5:18-2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성령의 충만한 삶
엡5:18-21

한 한달 전에 목사님 몇 분이 우리 교회에서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목회 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는데 한 목사님이 성령충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교회에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는 다른 교회 교인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각자 개인기도 시간에 들어가면 아주 큰 소리로 기도를 한답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장로님 권사님을 호명하며 잘못된 점을 들어내고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똑같은 기도를 큰 소리로 새벽기도 나온 성도들이 다 알아들을 정도로 반복하여 기도했답니다. 새벽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조용하게 기도하고 싶은 성도들은 그분의 기도 때문에 기도를 할 수 없으니까 개인 기도를 하지 못하고 가게 되었답니다. 자기 교회 성도들의 불평이 있어 그대로 놓아두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기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중하게 다른 사람도 기도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에게 방해 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 성도님이 말하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는데 제 맘대로 하지 못해요. 목사님은 성령 충만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 심정 이해 못할 거여요. 저도 제 맘대로 못해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령 충만이란 이런 것일까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삶을 말할까요?

1.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한 부분은 여기에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 보면 귀신이 자신 안에서 마구 시킨다고 말을 합니다. 차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하고 옷을 벗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차속에 뛰어 들고, 옷을 벗고 거리에서 뛰어 다닙니다. 자신을 조절할 수 없고 비윤리적인데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성령 충만일까요? 전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성령 충만일까요? 성령 충만하다고 저녁 12시가 되었는데 피아노와 기타를 치면서 찬양하고 통성 기도하는 것이 성령 충만일까요? 예전에 보면 기도원에서 성령 충만 받았다고 여집사님이 치마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성령 충만일까요? 전철역을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면 저주하고 다니는 것이 성령 충만일까요?

어떤 사람은 성령을 힘으로 생각하고 초능력적인 힘이 나타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남의 마음의 다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시의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 손에서 장품이 나와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좌로 움직이면 좌측으로 쓰러지고 우로 하면 우측으로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귀신이 들렸다고 눈을 뒤집고 입김을 붑니다. 기도하면 이가 금니라 바뀐다고 합니다. 어떤 부흥사는 건전지를 속옷에 넣고 선을 손끝으로 빼어 기도를 시키고 약한 전기로 찌릿찌릿 감전을 시키며 안수 기도를 해주며 그것이 성령충만이라고 기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방언을 하였는데 성령 세례의 대표적인 특징이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같은 것이고 중생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믿음으로 거듭나 중생함을 받은 사람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받은 증표가 바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단정 짓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원에 가면 방언 교육을 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받게 해 준다고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빨리 하라고 해 놓고 나중에 뒤에 와서 뒤통수를 칩니다. 그러면 놀래서 이상한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성령 충만 받아 방언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 충만일까요?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 보면 성령 충만을 술 취함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이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행2:12-16)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치 성령 충만하여 술 충만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니까 술 먹고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에배소서에서는 술먹은 사람의 상태와 비유해서 성령 충만을 설명한 것입니다. 술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술 먹고 술이 술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합니다. 술이 사람을 지배해버립니다. 술은 각성제이기 보다는 억제제입니다. 알콜은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자율신경을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지혜력, 이해력, 판단력, 균형 감각 등을 억제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술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도 성령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생각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감정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더욱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술 충만하면 결과가 방탕하게 됩니다. 무질서하게 하고, 혼돈 상태에 처하게 하고, 이해력과 품위를 잃게 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하고 자제력을 잃게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술 앞에는 꼼짝을 못합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술 앞에서 실수하고 망신 사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술을 좋아하는 어느 교수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만취해 집에 왔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있는 것입니다. 창피해 계단을 올라갔는데 그만 넘어져 얼굴을 다친 것입니다. 아내 몰래 치료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답니다. 거울을 보고 상처에 빨간약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였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부인이 소리치며 또 술을 마셨다고 남편을 혼냈답니다. 남편이 시치미를 떼고 "난 어제 다 기억난단 말야!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부인했답니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답니다. "아니, 멀쩡한 사람이 화장실 거울에다 반창고를 저렇게 다닥다닥 붙여놔요!" 술 취하면 술이 사람을 지배해 버립니다. 건강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멀쩡한 사람을 야수로 만듭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우매자로 만듭니다. 부자를 거지로 만듭니다.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를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행복에 넘치는 가정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돼지같이 더럽게 하고, 원숭이 같이 춤을 추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술 충만처럼 지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성령이 지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성과 감성, 의지를 지배하여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성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감정을 조절하게 해 줍니다. 의지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해 줍니다. 지혜를 주어 총명하게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선한 양심이 생겨 다른 사람의 의식하고 사는 자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허랑방탕하게 낭비적 생활을 하던 사람이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합니다. 불안하던 사람이 평안해지고, 슬픔에 잠겨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고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도덕적인 삶이 회복되고, 인생의 목표가 회복됩니다.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평강이 넘치게 합니다. 고약한 술 냄새 풍기지 않습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진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바나바처럼 선하게 인격이 변화됩니다. 어둠 가운데 걸어 다니지 않고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취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것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본질은 같지만 의미적으로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의 의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1회적이지만 충만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미 성령의 인침을 받았습니다.(엡1:13; 4:30)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중생함과 성령 세례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는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으면 이미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님께 모든 영역을 내어 놓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성령 충만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성령 충만의 결과를 네 개의 분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화답하며, 둘째, 노래하며), 셋째, 감사하며, 넷째, 복종하며 입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예배이고 둘째는 사역과의 관계에 있어서 감사이며 셋째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복종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이 충만하게 이루어집니다.
19절 보십시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화답하고 노래하는 것은 성령 충만함으로 드려지는 예배의 모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로 화답하는 것은 초대 교회 공예배시 서로 말씀을 교창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말씀과 찬양이 있는 것입니다.
대상이 누구입니까? 주님입니다. 아데미 신이 아닙니다. 인간이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배는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드리러 온 것입니다. 나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경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떻게 예배드리라고 말씀합니까?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중심을 받으십니다. 상한 심령을 받으십니다.
무엇을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입니다. 시는 구약의 시편과 새로운 노래들을 의미합니다. 찬미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지는 노래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일반적인 성가를 말합니다. 말씀과 찬양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닙니다. 아데미 신화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고, 예배를 기뻐하고,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보십시오. 오순절날 성령충만 받고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방언 보다 오히려 예배의 회복입니다. 유대인의 회당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과 찬양을 통해 구원에 감격하는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
가정에서도 예배, 집에서도 예배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실제적인 나눔의 삶을 통해 성령 충만한 예배 공동체의 삶이 나타납니다. 사교 클럽이 아닙니다. 삶을 공유하는 예배가 실제적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4-4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2-35)”
우리 열린교회가 이렇게 성령 충만한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이런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도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이나 양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할 때만 이루어 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예배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습니다.

2) 일과의 관계에서 감사로 드러납니다.
성령 충만으로 나타나는 두 번째 결과입니다.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입술에는 늘 감사를 붙여 놓고 살게 됩니다. 어떤 일에 감사합니까? “범사”입니다. 모든 일입니다. 실패한 일도, 성공한 일도, 힘든 일도, 쉬운 일도, 자녀를 낳은 일도, 사업하는 일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도, 직장에서 상사를 섬기는 일도... 다 감사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감사합니까? 항상 감사합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피곤해도, 지쳐도, 지루해도... 젊을 때도, 늙을 때도... 언제든지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감사합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입니다.
누구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나타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세가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 사역의 열매, 생명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격 성숙의 열매 즉 성화의 열매입니다. 사역의 열매는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리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태어나게 할 때 달란트를 주십니다. 재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 다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모로부터 이어받는 재능들과 능력들입니다. 곧, 머리의 명철함, 건강의 양호, 예능의 재질, 문학적 소질, 외국어의 재능, 이공 분야의 재능과 소질 등입니다. 이 모든 재능들은 온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부모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런데 감사로 그것을 받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하며 땅에 묻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로 받는 사람은 잘 개발하여 다섯달란트를 남겨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로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은사를 주십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면서 능력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로 영적 은사들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선물을 주십니다. 영적 은사를 주십니다. 분별의 은사들인 지혜, 지식, 영분별의 은사 등입니다. 능력의 은사인 믿음, 이적, 병 고침 등입니다. 선포의 은사들인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 수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어 주십니다(롬12:3-8; 고전 12;4-11; 엡 4:11). 일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보았지만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리오 왕 때 총리로 일하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재산도, 심지어는 생명까지 한 순간에 잃어 버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다락에 올라가 하루에 세 번씩 감사기도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습관화되고 인격화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니다. 은혜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홍해를 건널 때는 감사하고 마라에서 쓴 물이 나오고 무리바에서 물이 없을 때는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9명은 나병 환자처럼 치유받고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남자 장정만 5천 명이 굶주립니다. 아이와 여자들까지 합하면 2만명도 넘었을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하늘을 찌르렀을 것입니다. 그 때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을 때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그 때 역시 감사 기도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도 감사합니다. 성령충만하면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나약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3천명, 5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복음을 외칩니다(사도행전 4장 8절).

3) 성령 충만하면 인간관계에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어떤 결과나 나타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인간관계에 있어 피차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차 복종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면 피차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로마의 장교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부자인 바나바가 성령 충만하니까 재산을 내어 놓고 가난한 자들을 섬깁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상대를 정복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합니다. 자리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상대를 조정하고 싶어합니다. 제자들도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서로 자리 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니까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밑에 성령 충만한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십시오. 부부 관계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으로 복종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으로 복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하듯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남편 성령 충만을 하지 않고 술 충만하다고 업신여기기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머니 세 명이 모여 남편 흉을 보고 있었답니다. "얘, 말도 마. 우리 그이는 허구한 날 술이 취해 들어와. 속상해 죽겠어." 그러자 듣고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하소연을 했답니다.
"그래도 너네 남편은 집에라도 들어오잖아. 남편이 길거리에 쓰러져 자고 있는 걸 경찰이 연락해서 찾아온 적인 한두 번이 아냐." 마지막 아주머니가 지긋이 눈을 감고 이야기했답니다.
"우리 그이는 아예 술을 못 마셔." 그러자 듣고 있던 두 아주머니가 황홀한 표정으로 그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답니다. "어머, 정말 좋겠다. 난 술 안 마시는 남편이 제일 부럽더라."
아주머니가 대답했답니다. "좋기는. 맨날 술독에 빠져 살다가 두 달 전에 간암으로 죽었는데. 술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거야."
성령 충만한 부자 관계를 보십시오. 자녀를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합니다. 당시 자녀를 물건처럼 취급한 때입니다. 주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주종관계를 보십시오. 종들은 주인에게 주님께 하듯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의와 공평으로 그들을 대접합니다. 왜요? 자신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들은 물건처럼 취급된 때입니다. 완전히 관계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히게 되면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성숙한 인격을 가지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법이나 제도,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윤리,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남편도 성령의 뜻에 굴복하고, 아내도 성령의 뜻에 굴복하고 아버지도 성령에 굴복하고, 자녀도 성령에 굴복하며, 주인도 종도 모두 성령에 굴복하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조종하는 성령충만한 인간 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인간관계가 얼마나 멋진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입니까?

3.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성령님께서 지배하고 인도하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8)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9)” 어떤 사람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됩니까? 믿는 자입니다.

2)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께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해 달라고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해 주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사시면 안됩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렇게 살면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소멸해서도 안된다(살전 5:19)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을 손님이나 나그네처럼 대접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은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의식하면서 살 때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행2:38-39)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4)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오순절의 성령도 기도하다 받았습니다(행1:14). 행4:23-31에도 기도하다 받았고, 행8:15-17에도 기도하다 받았습니다. 왕하2:9 엘리사도 구하여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그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능력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성막을 짓는 브사렐을 보십시오(출31:3).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니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발휘하여 성막을 짓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신 34: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습니다(삿 14:6)”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 밑에서 낳아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눅1:15, 41, 6) 담대하게 천국을 전하고 그 악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보십시오.(사도행전 6:5절 행7:55)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의 본성을 알았고 그를 꾸짖은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 충만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 11:24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힘없다고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5)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32)” 행1:12-14의 행동은 곧 행1:4,5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18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말씀과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에 성공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께 복종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섬기는 공동체, 은혜의 공동체 성령님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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