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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엡1:1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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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10월 2일 주일 설교 <60주년 기념 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1)
“나는 교회인가?”(Am I The Church?)
--에베소서 1:15-23
1.
오늘날 ‘교회’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애물단지가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도가니>라는 영화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작가 공지영 씨가 광주에 있는 어느 장애인 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교장과 그 학교의 직원들이 의사 표현 능력이 없는 장애 학생들을 성적으로 유린해 왔는데, 그 학교에 부임한 어느 젊은 교사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인해 한국 사회가 공분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그 같은 극악스러운 범죄가 우리 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그러한 범죄를 묵인하고 은폐하고 엄호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소설가 신경숙 씨를 만났을 때,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저는 ‘오,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2년 전에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저는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한국 교회에게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없는 장아 소년 소녀들을 농락한 교장은 그 도시에 있는 대형 교회의 장로이며, 그를 에워싼 공범자들도 대부분 그 교회에 다닙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모습만 보고 그들을 축복하고 두둔합니다. 결국 그 교회는 이 학원의 비리를 묵인하고 은폐해 주는 든든한 성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이 그대로 영화로 그려진다면, 교회는 또 다시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저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만, 아직 교회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영화에서는 교회 측의 비호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나 봅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참혹한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의 중심에는 중앙에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는 교무실이 있습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들은 이 엄청난 역설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과 구원과 평화의 상징인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운 바로 그 현장에서 악독한 범죄가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교회는 이 사회의 희망인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악의 뿌리’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주장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교회가 나 개인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게 희망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 교회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원인처럼 보이기는 해도, 그것은 교회가 잠시 곁길로 갔기 때문이고, 교회가 바로 서기만 하면 그것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 가장 중요한 희망의 이유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교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감사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교회가 더욱 참된 교회가 되어 각 사람의 희망으로 그리고 이 사회의 희망으로 세움을 받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희망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어떻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게 희망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목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임원들만 고민해도 될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교회로 모일 때마다 내가 왜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60주년을 맞아 교회적으로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좀 더 희망이 되는 교회로 세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저는 앞으로 몇 주일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비유를 붙들고 씨름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교회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비유가 ‘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고 각각의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에, 앞으로 저는 이 비유를 붙들고 교회가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의 단기 연속 설교의 제목을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정했습니다.
2.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바로 잡아야 할 가장 큰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보통 ‘교회’라는 말을 들을 때 혹은 사용할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건물’을 생각합니다. “와싱톤한인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맥클린에도 있고, 센터빌에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가 어떻게 생겼습니까?”라고 물으면, “매릴랜드와 DC와 북버지니아의 한인 생활권에서 가장 용이하게 갈 수 있는 지역에 있고, 마치 수양관 같이 정갈하게 단장된 대지에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예배당은 자리에 앉는 즉시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대답하니, 어찌할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답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아 두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어,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건물은 그 모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모임’(gathering)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아무리 크고 웅장해도, 그 안에 사람이 없으면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한 공동체가 있으면 그것은 충분한 교회입니다.
1985년,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만들어져 크게 사랑받은 노래가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Micheal Jackson)과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작사 작곡한 노래입니다. 그 노래의 제목 “We Are the World”는 참으로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잘 살려면 지구도 잘 보전되어야 할 것입니다만, 사람들이 없다면 이 지구는 그냥 지구일 뿐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을 패러디한다면, “We Are the Church”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됩니다.
제가 살던 서울 마포에 아주 특별한 교회가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있을 줄 압니다. 충정로 사거리에서 신촌 로타리 쪽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큰 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의 입구에 붓글씨로 ‘아현예배당’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국 교회가 낳은 성자 중 한 분으로 칭송받는 김현봉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분은 아침 6시면 잠자리에 들고, 자정이면 일어나 기도하고 말씀을 읽다가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 뒷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다가 아침이 되면 내려와 교인들을 돌보는, 영성과 가난의 성자였습니다.
저는 이 교회의 이름을 참 좋아합니다. 백이면 백이 모두 ‘00교회’라고 간판을 달아 놓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의 간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교회만큼은 ‘아현예배당’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이름은 설립자인 김현봉 목사님의 사상에서 유래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현예배당은 당시로서는 서울 영락교회와 맞먹는 교세를 자랑했지만, 도무지 예배당 건축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배당이 비좁으면 지붕만 해서 임시로 늘리는 식으로 해결했고, 교회 재정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 교회는 지금도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물어 볼 것입니다. “왜 우리 교회는 교회 간판을 저렇게 썼습니까?” 그러면 누군가 설명해 주겠지요. “예, 원래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것이 자꾸만 건물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되어 저렇게 썼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장만한 시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는 이 건물이 아니라 바로 믿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선각자가 아니면 이런 발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인 것을 두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재료를 쓰고 아무리 웅장하게 지었더라도, 건물은 건물일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식되고 썩어지며 결국 언젠가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을 가진 것은 인간의 영혼뿐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을 때는 건물을 교회라고 착각할 때입니다. 교회를 위한 건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는 부자 교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예배로 모이도록 배려했기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여유롭고 정갈하며 편리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건물에 모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만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자라가고 서로 연대하여 거룩한 몸을 이루게 하는 데 관심이 없으면서 건물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교회는 곧 세상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와싱톤한인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지금 당신은 그 교회를 보고 계십니다.”라고 답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와싱톤한인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고 물으면, “저를 보십시오. 제가 와싱톤한인교회입니다.”라고 답하셔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럴 자신이 없다고 느끼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는 저와 여러분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내가 자라는 것이 와싱톤한인교회가 자라는 것이요, 내가 성숙하는 것이 와싱톤한인교회가 성숙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못하면, 와싱톤한인교회의 수준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교회입니다.
3.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은 단순히 무엇을 위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모임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약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고전 12:12)
옛날 말에 의하면 우리 몸에는 ‘사지백체’가 있다고 합니다. ‘사지’는 팔다리를 가리키고, ‘백체’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지체를 가리킵니다. 그 많은 지체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또한 서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몸이 제 기능을 해야만 각 지체도 제 역할을 합니다. 어떤 지체든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제 기능을 잃어버립니다. 한 지체가 제 역할을 하려면 몸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모든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제 역할을 감당할 때 몸이 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교회가 몸이라면, 믿는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피상적인 인사나 주고받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며 협력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아무리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예배라 해도, 예배가 끝난 후 모두 각각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서로 사귀고 나누고 섬김으로써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서 흔히 ‘무교회주의자’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교권과 제도를 거부하는 입장을 말합니다.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한국 초대 교회의 사상가였던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이들도 예배와 교제를 위해 부지런히 모입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탈교회주의자’라고 구별해야 불러야 마땅합니다.
‘탈교회주의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아예 교회로 모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홀로 기도하고 홀로 예배드리고 홀로 말씀 묵상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교회로 모이지만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로 모이고 있으니 ‘탈교회주의자’의 모습은 아닌데,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로 모여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집어가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사귐과 나눔과 섬김이 없습니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탈교회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잘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몸으로 비유하면 몸에서 제거된 장기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몸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몸에서 떨어져 있기에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로 모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과 만나고 소통하며 함께 연대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마치 반지나 시계 혹은 목걸이 같은 장신구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몸에 붙어있기는 하지만 몸의 일부는 아닙니다. 언제든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탈교회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과 동류로 취급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두 번 교회에서 상처받고는 소통이 아니라 불통을 선택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미국사회의 개인주의가 뼛속까지 침투해서 다른 사람을 참견하기도 싫고 다른 사람에게 참견 받기도 싫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시장자본주의의 영향에 너무 깊이 빠져서 언제 어디를 가든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우가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제대로 붙어서 서로 연합하고 소통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홀로의 믿음’ 혹은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결국 아무런 유익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교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믿음은 본인에게도 해롭습니다. 교회를 통해 자기의 유익만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 태도가 결국 자신을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교회에 소속되고 서로 사귀고 섬기며 나누고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기에 앞서 본인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회복시켜 하나의 백성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이웃에 눈을 뜨게 되어 있습니다. 이웃과 소통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은 반쪽 신앙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홀로 고고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에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찾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하나의 몸으로 연대하여 서로 연락하고 소통하며 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을 때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 합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지 못하고 단순히 모였다 흩어지는 행사가 될 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보통 ‘교제’(fellowship)라고 번역하는데, 어느 하나의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우리 교회 60주년 기념 배너에 새겨 넣은 세 개의 단어 즉 ‘사귐’, ‘나눔’ 그리고 ‘섬김’을 다 합해야 ‘코이노니아’의 뜻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 인격적이고도 깊은 사귐을 나누고, 삶의 기쁨과 애환을 서로 나누며,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만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다섯 번째 장기 계획’의 표어를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를 향하여!”라고 지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실하게 나누어지는 공동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요, 교회라는 모임은 단순히 모였다 흩어지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교회가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교회의 진짜 비밀이 드러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엡 1:23)
이 구절의 헬라어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의미를 가장 잘 풀어서 해석한 사람이 J. B. Phillips입니다. 이 구절을 그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Church is his body, and in that body lives fully the one who fills the whole wide universe.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 몸 안에 온 우주를 채우시는 분,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이 한 마디가 교회의 본질에 대해 얼마나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지 느껴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온 우주를 모든 필요한 것으로 가득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교회 안에 거하시고 활동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평신도들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 교회는 건물이 있든 없든, 모인 사람의 수가 얼마든, 훌륭한 성가대 혹은 찬양단이 있든 없든, 목회자의 능력이 어떠하든, 연간 재정이 어떠하든, 얼마나 많은 일을 하든, 역사가 얼마나 되었든, 온 세상을 모든 필요한 것으로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교회 안에 계시며,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 세상에 어느 단체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 예가 있습니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면서 “이거, 내 몸과 같은 거야.”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을 준 사람이 귀하면 귀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요 구주라고 믿는다면, 교회로 모일 때마다 교회에 대한 높은 경외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혹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압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모든 교회를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물질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면 항상 그 사람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외면으로 보이는 것에 붙들려, 겉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비굴해지기도 합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만나든지 같은 태도로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알게 하시고” 혹은 “알게 되기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알아야 할 바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믿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지, 믿는 이들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것과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몇 사람이 모여 있는 초라한 교회라 해도, 그 교회에서 온 세상을 채우는 그리스도께서 활동하고 계신 것을 볼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이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교회의 숨겨진 비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 안에는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에 눈 떠야 합니다. 이 사실에 눈 뜨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짓눌리거나 현혹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실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움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교회의 신비에 눈 뜨는 것조차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18절)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교회들을 보시며 하실 말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말하실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뜻이 전혀 달라집니다.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다정하게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말하면, 교회를 칭찬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탄식하는 음성으로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말하면,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을 두고 슬퍼하시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를 두고 주님께서는 이 둘 중의 어떤 감정으로 말씀 하실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탄식으로 말씀하실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다른 교회를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를 보시고 주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지난 60년의 역사 속에서 주님께서는 때로 기뻐하면서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또 때로는 슬퍼하면서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탄식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말씀 하실까요? 이 질문 앞에서 두렵고 떨립니다. 부디, 이 땅의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눈물과 탄식으로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탄식하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가 앞으로의 역사를 통해 주님의 아픔을 덜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다짐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가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제가, 바로 여러분이 와싱톤한인교회입니다. 거룩한 교회, 성결한 교회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귐과 섬김과 나눔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몸에 걸려 있는 장신구가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심을 믿고, 그것을 보고, 그분이 일하실 수 있게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별거야!’라는 세속적인 견해를 내려놓고, 교회를 거룩하고 귀하게 여기는 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영원하고 거룩한 공동체인지 깨달아 알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때, 주님께서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 위에, 나아가 이 땅의 모든 교회 위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를 불러
존귀한 당신의 몸을 이루라 하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소서.
내가 교회임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낮아져 서로 사귀고 나누고 섬기게 하시어
주님께서 마음껏 일하시는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
그런 교회만이
나를 구원하고
내 가정을 구원하며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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