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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4: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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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3년 6월 16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연속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2)
홀로의 성인은 없다"(No Saint Is An Island)
성도의 교제와 …
에베소서(Ephesians) 4:11-16
1.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는 '사도신경'을 권위 있는 신앙고백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침례교회는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다는 이유로 예배 시간에 고백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만한 권위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천주교회와 함께 같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문은 동일하지만 각 신조(article)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게 될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입니다. 해석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지만, 우리 말 번역에서부터 큰 차이가 납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우리말 ‘사도신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공덕을 힘입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상의 성도와 연옥(purgatory)의 성도와 천국의 성도가 기도를 통해 서로 통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전통이 생겼고, 그것이 중세에 그렇게도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indulgence) 발행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같은 교리에 근거하여 천주교회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심사하여 합격한 사람들을 성인의 반열(order of the saints)에 올립니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 성인들에게 기도함으로써 도움을 입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성인마다 특기가 있어서, 질병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때 부를 성인이 따로 있고, 수태(conception)를 위해 불러야 할 성인이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개신교회는 이같은 천주교회의 전통을 믿지 않습니다. '성인 숭배'(saint worship)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특정 인물들을 성인으로 추앙하고 그들을 예배하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할 근거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중재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 혹은 다른 성인에게 기도하다 보면,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언제나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 7:25)
우리의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고 계시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중재자가 필요 없습니다.
간혹, 연합감리교회의 이름에 성인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 교회가 매나싸스에 캠퍼스를 시작할 때 예배당을 빌려 준 교회 이름이 Manassas St. Thomas 교회입니다. 김미혜 목사님이 파송받은 교회는 St. Mark 교회입니다. 이런 이름을 보고 “연합감리교회도 성인을 숭배합니까?”라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Saint라는 칭호를 붙여줍니다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칭호를 붙였다고 해서 그 성인을 숭배하거나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존경하는 표시로 Saint라는 칭호를 붙입니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헬라어로 ‘호이 하기오이’(hoi hagioi) 즉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을 달리 번역하면 ‘성도’가 되고 ‘성인’도 됩니다. 높은 덕을 이루고 거룩하게 살며 기적을 일으킨 사람만이 성인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인이라는 것이 성서의 입장입니다. ‘김대건 성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저와 여러분의 이름 뒤에서 '성인'이라고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원치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성인'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십니다.
2.
지난 주, 저는 교회에 대해 말씀 드리면서, “교회는 완전하지 않지만 거룩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믿는 사람에 대해서도 똑 같은 말이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이며,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죽고 나서 하나님 앞에 이르렀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것이 영적인 사건이어서 느껴지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믿다가도 자꾸 잊습니다.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는데,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묵상(6월 12일)에서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는, 믿는 사람이 "나는 성인이 될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룩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거나,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여기거나, 둘 중 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그 사실을 자꾸 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마치 새 생명을 임신한 여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되면 새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새 생명이 몸 속에서 시작되었는데도 엄마는 몇 주일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몇 주일이 지나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헛구역질도 나고, 어지럽기도 하고, 생뚱맞게 먹지 않던 음식을 먹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또 몇 주일이 지나면 배가 불러옵니다. 또 얼마 지나면 아기가 노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새 생명을 낳고 품에 안는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이와 유사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죄는 해결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거듭 난다고 하는데, 그리고 분명히 주님을 영접한 것 같은데, 거듭 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를 못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치, 몸에 아무 변화가 없지만 임신 테스트 결과를 보고 자신의 몸 속에 새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믿듯,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거듭 났음을, 새 생명을 얻었음을, 의롭다고 인정받았음을, 그리고 '성인'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고 믿습니까? 우리보다 앞 서 간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 바울과 베드로, 어거스틴과 프랜시스, 루터와 웨슬리, 본 회퍼와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과 여러분이 같은 ‘성도의 반열’(the order of saints)에 들려 올려졌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체임버스가 지적한 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변화될 마음이 없어서입니까?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기 싫어서 믿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본인만 알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딱한 일입니다. 만일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삶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믿음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디, 주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참되게 무릎 꿇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약속하신 거룩함의 비밀을 경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거룩의 씨앗, 영원의 씨앗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이렇듯,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자신의 변화된 신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령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에 미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We are not perfect, but just forgiven.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용서받았을 뿐입니다.
이 문구가 믿는 사람의 본질을 요약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용서 받은 죄인'으로 만족하려는 음흉한 음모가 이 문구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데 성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름을 먼저 얻어놓고 그 이름의 내용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에서 소개한 문구보다 더 완전한 문구가 있다고,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We are not yet what we ought to be, but we are no longer what we used to be.
우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우리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라가며 거룩해져서 성인이라는 이름을 채워갑니다. 진실로 믿는다면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진실로 믿는다면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정도에 이르러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끊임없이, 한 없이, 중단 없이, 끝까지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13절)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15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자라가야 합니까? 목사도 아니고, 장로가 될 것도 아닌데, 그냥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죽을 때 천국 갈 정도만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죽어서 천국 갈 정도만큼의 믿음'은 얼마 정도의 믿음을 말합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그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천국 가는 입장권을 사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물건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살아있기에 그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인'이라는 이름을 채워갑니다. 따라서 예수 믿은지 꽤 되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수태가 된지 몇 달이 지나도 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태아가 죽어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변화는 더디기는 하지만 필연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4.
'성인'이라는 이름과 관계하여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 즉 ‘성인’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항상 복수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단수형으로 쓰인 경우(빌 4:21)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도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안에 '성인'은 없습니다. '성인들'만 있습니다.
이 특별한 현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홀로의 성인은 없다”는 뜻입니다. 영어 표현에 “No man is an island”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빌어 쓴다면, “No saint is an island”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 성인이 될 수 없고, 홀로 성인으로 자처한다면 그는 착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 점이 아주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12-13절)
믿는 사람들은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섬김으로써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자라갑니다. 각자 알아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자라갑니다. 서로 돕고 서로 섬기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보듬어 안아 함께 자라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진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공덕을 힘입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다른 성도와 사귀고 섬기고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의 본질은 믿는 이들이 서로 사귀고 나누고 섬기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성인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한국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Jesus Abbey)이라는 기도원이 있습니다. 성공회의 고 대천덕(Torrey 신부님이 이 기도원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독특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한자로 ‘교회’라고 할 때면 ‘가르칠 敎’에 ‘모일 會’를 씁니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을 고려한다면, ‘사귈 交’에 ‘모일 會’로 썼어야 옳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예배당은 연애당"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사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사랑의 사귐을 나누는 것을 말하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5.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나의 사랑의 능력을 시험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상처를 받고 나면, 마음을 열고 사귈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만 만나고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닫으면 하나님께도 마음이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를 받더라도 마음을 열고 사귀어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었으면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난다.
사실, 이 말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토록 높게 생각하는 교만도 문제이고, 다른 사람을 하시하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교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가 아니고는 절대로 상종할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대면하여 사귀고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갈고 다듬고 광을 내는 '성인 공작소'(Factory of Saints)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성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키워가십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의 사랑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될만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례를 받은 교우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교회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약 2년 정도를 그렇게 지낸 다음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무엇이 계기가 되어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는 목사님들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고, 믿고 따를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순진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비판력과 예리함으로 따지자면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낮추어 주시고 눈을 밝혀 주셔서 '작은 성인들'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는 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만 성인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이 성인다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고개 숙여지게 만드는 성인의 흔적을 한 두 가지씩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보면 언제나 보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도전이 되며 또한 격려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귀고 나누고 섬기지 않으면 도무지 이런 발견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오늘의 말씀을 위해 묵상을 하는 중에 제가 그동안 거쳐 온 교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교회들을 거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제게 영향을 끼친 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어느 교회에서든 '아, 나도 저분처럼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든 '작은 성인'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고향 교회에서는 주일 학교에서 늘 설교를 해 주시던, 대머리가 곱게 넘어간 장로님이 제게는 성자처럼 기억되어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지도하셨던 선생님이 거룩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마다 '작은 성인들'이 계셨습니다. 지금도 저에게는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제 마음에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지금 내 안에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몸으로 보여 주셨던 작은 성인들 덕분이구나!'
요즈음 가끔 확인하는 사실인데, 하나님께서 그동안 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옛날 함께 교회 생활을 했던 후배를 만나거나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저를 통해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으며 힘을 얻었다는 감사의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다 곧이 듣지는 않지만, 제가 다른 사람에게서 성인의 모습을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성인의 모습을 드러내셨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이라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한 번 자신의 과거를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친 '작은 성인들'이 기억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겸손의 덕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동안 여러분을 통해 용기를 얻고 자극 받고 도전 받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구요? 그게 진짜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혼자만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성도'라는 이름의 무게와 영광을 제대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셨습니까? 매일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존재가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등재되셨습니다. 아니라고, 그럴 수 없다고 부정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난 신분의 변화를 받아들이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제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에 맡기고 매일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거룩의 씨앗이 자라나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성인'으로 신분이 변화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성인다운 삶을 사모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성인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임재가 거하시는 거룩한 교회가 없이는 성인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서로 사귀며 나누며 섬기며 소통하여 온 몸의 지체가 함께 자라가는 것을 믿습니다. 서로 엮여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작은 성인들'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거룩함 안에서 발돋움하게 될 것이며, 나도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성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불러서 유명한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의 첫 머리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앞서 간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태양이 빛나는 해변에서
모두 다시 연합할 것입니다.
오, 성인들이 함께 행진할 때
성인들이 함께 행진할 그 때
오, 주님, 제가 그들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성인들이 함께 행진할 때.
We are traveling in the footsteps
Of those who've gone before
But we'll all be reunited
On a new and sunlit shore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Oh lord I want to be in that number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성인들의 행렬에 진실로 함께 하고 있습니까? 장차, 모든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만날 터인데, 여러분은 그 자리에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과 함께 교회 즉 '성인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자라갈 때, 우리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에서 느끼는 흥겨움과 신명으로 즐겁게 우리의 인생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거룩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게 하시고 이 비밀에 참여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죄인인 저희에게
의인의 이름을 주시고,
부정한 저희에게
성인의 이름을 주신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주님 안에서 일어난
저희의 신분의 변화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써
의인답게, 성인답게 살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성인들이 연합할 때
저희도 그 안에 있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6월 16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2)
"홀로의 성인은 없다"(No Saint Is An Island)
--성도의 교제를 믿으며--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21장(통 525)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태복음 16장 13-19절을 읽습니다. 이 말씀 안에 담긴 교회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10분)
4. 말씀의 요약 (한 사람이 말씀을 요약하여 발표합니다. 10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천주교회는 왜 성인을 숭배하고 개신교회는 왜 그것을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말로 설명해 보십시오.
3) 당신이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십시오.
4) 당신에게 성인의 역할을 했던 사람을 한 사람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누어 주십시오.
6. 기도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신분의 변화를 확신하도록 기도하십시오.
2) '작은 성인'을 볼 수 있는 겸손한 눈과 마음을 구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220장(통 278)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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