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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1: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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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홍전 목사 |
참고 : |
성경: 엡1:12-23절
제목: 교회의 표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3)
1. 바른 교회의 자태를 생각해야 함
우리가 기도를 하든지 혹은 예배 때에 헌상 기도를 하고 나서 “아멘”하는 것은 그렇게 기도한 내용에 대해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고 자기가 그 기도에 동의(복창)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이 종교 음악에 붙어 있으니까 하는가 보다 하지 말고, 아멘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주님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고 마음 가운데 간절히 원하는 심정이 담겨서 표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늘 주의해서 자칫 잘못해 가지고 그냥 관습적으로 표현해 버리는 어리석음과 오류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기가 참으로 쉬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어떻게 바른 신앙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할 만한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때때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자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개혁교회’라 하는 이름으로 호칭하는데 여러분들도 근래에 와서 개혁교회라는 말을 자주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생각할 만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떠한 신앙 태도를 취하고 나아가는 것이 바르겠는가. 즉 우리가 과거의 큰 위대한 유산으로 받아 내려왔고 우리들 자신의 시대에 보전할 뿐 아니라 이 시대에 나타내야 할 빛을 확실한 성격으로 더욱 드러내면서 전진해 나가야 할 개혁교회의 바른 정신에 대하여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개혁이라는 말이 반드시 정확하고 적당한 말일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로서는 개혁교회라는 말을 자주 쓰긴 합니다만, 항상 원상의 교회, 원래 땅 위에 있어야 할 참 교회의 바른 자태는 무엇인가를 찾아 나가기 원하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서 생각할 것은 우리가 바른 교회의 자태 위에 확호히 서서 세움을 입은 자로 나타나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든지 그냥 두고 보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주의라는 이름과 정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냥 내려가면서 인간의 종교적인 행사와 형식과 감정에 그만 빠져 들어가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신령한 능력의 발휘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도무지 모르고 있는 현실을 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이는 종교 운동을 곧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같이 자꾸 말해 나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현실, 비본질적이고 그릇된 상태에서 분명히 벗어나지 아니하면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도 그런 이유 때문에 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상의 교회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종교 가운데 빠져서 열심히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을 다 지키고 살아갔지만, 마침내 더 기다리실 필요가 없으셔서 북방은 앗시리아에게 남방은 바빌로니아에게 넘겨주신 것을 기억하고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방법으로서 드러내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런 만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합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 바르게 하고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그리고 정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자기와 자기가정 그리고 자기교회와 자기사회에게 얼마나 굉장한 그릇된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사태가 여러 가지 형태로서 그런 것을 잘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언제까지나 목전에 있는 종교 운동에만 눈이 쏠려서 생명 없는 일만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각각 얼마나 깨달았는지, 우리가 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이끌고 나갔어야 할 그 길로 바로 이끌지 못한 것이 어떤 것들인지, 우리가 확호히 실증했어야 할 참된 도리의 자태를 얼마나 못 나타내고 그저 목전의 여러 가지 것에 그냥 휩쓸려서 밀려나갔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해 나가는 것인가? 참 교회라는 것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한 개인의 문제만을 가지고 야기기하지 말고 그 교회 안에 들어 있는 자기 개인을 생각하고, 자기 개인이 하나의 지체로서 전체의 몸에 대한 자기의 위치에서 생각할 때 몸 된 교회는 어떤 것인가? 가령 현상의 가시교회, 볼 수 있는 교회에 적용할 때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교회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신자들이 자기의 그 전철을 밟고 그 모양 그대로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들을 정신을 차려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더욱 정신 차려서 교회의 참 자태라는 것을 바로 바라보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옳습니다.
2. 몸의 지체라는 표현과 은사
이제 다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를 표현할 때 성경은 그 심오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체를 될 수 있는 대로 우리에게 바로 알리기 위하여, 다른 중요한 도리를 가르칠 때에 쓰던 대로 표상을 써서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상적인 지시, 표상적인 표현들은 해석상 주의를 요한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어쨌든지 그 표상적인 표현을 보면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은유법을 써서 ‘교회란 무엇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표상적이니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말을 쓰셨고, 또 “하나님의 성전이다” 혹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는 말로써 표현했고, 또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혹은 “새 예루살렘이다” 하는 말을 가지고 표현을 했고, 또 하나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때 여기서 진리라는 말은 실체를 표시하는 말이고 기둥과 터라는 것은 표상적인 용어이므로, 이 말은 실체와 표상이 섞여 있는 말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는 말에서도 그리스도는 물론 실체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점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몸, 지체, 머리, 이런 말로써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을 표현하셨는데, 이러한 표현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머리이면 그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체가 뭐냐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의 몸뚱이 어떤 부분이든지를 가리켜서 지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근육 한 덩어리 가지고 이것이 지체다, 하고 애기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지체라는 표현이 사용된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로마서 12장을 보면 항상 그 지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체가 각각 구체적으로 특색 있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표현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체적으로 특색 있는 기능을 발휘하는 몸의 어떤 부분이다 하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손처럼 손이 하는 어떤 기능을 다른 것이 충분하게 대치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쓴 표현입니다. 그것은 발, 눈, 귀와 같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는 기관을 특별히 지체라고 한 것입니다. 독특한 기관이 가지고 있는 특성 있는 기능을 잘 발휘한다는 점을 특별히 생각해서 지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를 나타내는 교회에서 그 특성 있는 은사가 독특하게 발휘된다는 의미로 “너희는 그리스도 몸 안의 지체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체라는 말을 덮어놓고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성경이 지체라 할 때에는 로마서 12장이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독특하게 주장하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개인이 각각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은사의 다름”을 지적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지체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활동을 할 때 그것이 일반적인 은사가 됐든지 하나님께서 그 때에 임해서 특별한 카리스마로 내려주신 것이든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그 능력을 증진시켜서 장성시키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한 은사
에베소서 4:11절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특별히 표시하기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고 임무를 맡아서 하는 사람들의 직종”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각각 다른 직분이나 능력을 주신 이유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도}라는 말은 복수로서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보이는 형태로는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로서 표시되는 까닭에, 눈앞에 보이는 교회의 형성 요소인 [성도를 온전케 하며 (또 그 성도들이 각각 분수에 맞고 분량에 합당한 대로)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절)고 했습니다. 즉 “교회를 바로 형성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 형성하고 그 교회를 형성하는 성도들의 봉사를 바르게 지도하고 또 권고하기 위해서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와 같은 직이 필요하다 하는 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4: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지체가 서로 결속해 가지고 교회를 형성했을 때에 중요한 요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순일한 가운데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잡다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가 믿음을 순일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동의 교리 선언을 하는 것이고, 그 교회 교인이 되려면 그 교리의 선언을 자기의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각각 별다른 고백을 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교회라고 외쳐본들 참 교회의 능력과 자태와 실질”을 나타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상하게 어기러진 것으로 만들지 말고, 다 갖추어 구비되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 즉 교회로서의 요소를 다 지녀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로서의 요소가 없는 이상한 것들을 만들지 말고 교회로서의 요소를 다 지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또 장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나면 그 아기는 사람으로는 온전한 사람으로서 이목구비가 다 갖추어 있고, 신체의 결핍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장성을 요하는 것입니다. 신체가 자랄 뿐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도 더욱더욱 발전하고 장성하는 것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의인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의 소견과 지각만 가지고 일생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변동하되 발전해 가면서 자꾸 결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신 도략 가운데 두셨다가 사람을 만드시면서 바로 교회가 존재하게 하셨는데, 그 때부터 인간은 온전한 생명체로서 나왔지만 그 다음에는 장성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도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현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온전히 구비되어 장성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온전히 구비되어 있어야 할 요소가 다 있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 아닌 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떠들고 나서지 아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있어야 할 요소를 갖춘 다음에는 장성해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도 없이 장성하라 하니까 장성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장성이란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보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개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장성함으로써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던 까닭에 바울 사도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활동했을 당시에도 벌써 괴상한 것들이 돌아다녔습니다. 아마 제일 먼저 괴상하게 크게 세력을 펼쳤던 것이 헬라에서 일어난 철학인 네오 플라토니즘이라든지 소위 노스티시즘 즉 영지주의라는 것들인데, 그런 것들이 나와서 무슨 도세티즘이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물질적인 몸과 인간성을 갖지 않고 단지 인간적인 환영만을 가졌다고 말하기 때문에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에 이상하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로부터 나서 점점 장성하신 과정의 의미는 무시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와서 하신 일이 더 중요하니까 갑자기 장성한 한 인물로 썩 나타나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흔히 예수님의 탄생과 소년 시기, 청년 시기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아니할 때는 사람에게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꼭 어린아이로 안 났더라도 서른 살 먹은 성인으로 썩 나타나서 삼 년 반 동안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으면 예수님의 공로는 충분히 다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들을 사람들이 할 것으로 짐작하고, 그렇게 교묘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낚아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이상한 설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기화로 곁길로 우 하니 따라가게 만드는 그런 교훈이나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요동하지 아니하도록 장성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장성은 개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개인이 자기 혼자 장성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원래 보편의 교회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는 구원이 없는 것인데, 그 보편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항상 보이는 교회로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이는 교회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풍성하게 공급되는 말씀을 통해 은혜 가운데서 바로 장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장성해 가는데 있어 문제가 많습니다. 그 문제가 뭐냐 하면 교인들은 순한 양과 같아서 먹이는 대로 먹고 가는 일이 많은데 교역하는 사람들이 잘못 먹이거나 그릇된 생명 없는 것을 준다 말입니다. 알곡과 진미를 먹이지 아니하고 항상 지게미와 쌀겨 같은 것만 먹여서 늘 파리하고 연약하고 어느 때는 영양실조에 빠집니다. 이렇게 배가 고프게 되면 다른 아무것이라도 먹으려고 해서 누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먹고 따라가는 일이 늘 있는 현상입니다. 누가 와서 그럴듯하게 떠들어대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커 보이는 그것만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 하면,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로 혹은 교사로 세움을 입은 사람들에게 먼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역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중대한 책임을 질 생각은 아니하고, 아무 준비 없이 속이 텅텅 비어 가지고 나가서 씩둑꺽둑 무슨 말을 한다면 대체 무얼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룩한 것을 무슨 자기의 이익의 도구로 삼아 일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로서 건실하게 자라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좀 성인다운 교회로서의 자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분명한 각성과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각성과 자각이 뭐냐 하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이고, 거짓말 같은 잘못된 것에 휘휘 몰려다니지 말고, 또 어린아이와 같이 항상 미미하고 유치한 생활 감정에 처해 있지도 말고, 그리고 언제까지든지 옛사람을 못 버려서 어린아이의 구습에 꽉 눌려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옛사람에 눌려 있는 동안에는 그가 비록 중생했다고 하더라도 어린아이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하지 못했다고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댓바람에 애기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신령한 자에게 말하듯 할 수가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한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째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과 같으냐고 하면서 말하기를, 속에 잘못된 감정, 시기하고 분쟁하고 다투고 저 잘났다고 뽐내고 하는 이런 것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라고 하면서 그와 같은 데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기에 바울 사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의 문화가 찬란했던 곳으로서 부요로운 도시요 안정된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아메리카 사회의 도시와 비슷한 도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다른 것이 긴박하게 위기감을 주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 가운데 크게 자극하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오히려 밤낮 이 세상 것을 뒤쫓았습니다. 그때 당시 고린도는 아주 큰 해항이어서 그 사회는 장사를 하여 부요로운 형편이었는데 고린도 교회가 그런 현실 속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사특하고 저급한 것들만 좇아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항상 생활이나 환경이나 사회가 불안한 데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온통 정신이 불안한 데 더 쏠려 가지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는 어찌할 건가에 대해서는 제이차, 삼차로 생각하는 큰 유혹이 또한 있는 것입니다. 불안한 사회에 살든지 너무 안정되어 자극이 없는 사회에서 살든지 어떤 사회든지 다 같이 유혹은 마찬가지로 있는 것입니다.
4. 머리와 몸의 관계
그러므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진실한 심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라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나는 자라나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표준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또 머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한 말의 뜻은 신체의 두부가 아닙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는 두 가지의 의미를 늘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몸뚱이의 머리, 신체의 수부를 가리킵니다. 둘째는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는 말처럼 우리의 표준이 되고 우리의 대표가 되고, 우리들 전체를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1:18절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 4:16절을 보면 머리와 지체의 중요한 관계를 표현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지체로서 서로서로 연락하고 있는 마디마디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도움을 입고, 그에게서 힘의 공급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도움을 입음으로 그 각 마디들 곧 각 지체로 대표되어 있는 부준들이 “연락하고 상합하여”, 서로서로 무슨 도울 것이 없는가 하고 있다가 일단 문제가 있을 때는 서로 연락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각각의 지체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능력의 분수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세우느니라”]. 이 말씀은 “자기 능력 이상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닌 고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일하여 교회가 장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였는데 그것은 ‘튼튼히 서서 나중에 이 세상에서 자립해서 나갈 수 있는 교회로서 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머리가 지체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현저한 사실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실은 머리가 신체의 두부, 수부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머리와 몸은 하나의 생명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표상만이 아니라 실체에서도 꼭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신비한 연합체가 된 데서부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죄와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 이 말은 죽어 있는 자란 말입니다. [너희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것이 에베소서 2:1-2절의 말씀입니다. 즉 그때는 마귀의 궤휼과 이 세상의 영향을 네가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현재 마귀는 불순종하는 자의 속에서 에너지를 공급해 가면서 일하는 자 즉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셔서 살리셨기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되어 있고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공급하므로 그렇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접붙인다는 비유로 썼습니다.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노라](롬11:27절). 이 말씀은 물론 이스라엘과 이방을 대조해가면서 쓴 표현입니다. 돌 감람나무의 어떤 가지를 끊어다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일 때, 원래 참 감람나무는 진짜이고 제대로 된 것이지만, 잘못하니까 어떤 부분을 찍어서 집어 내던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도 교만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도리입니다. 어쨌든지 뿌리와 줄기와 가지 사이에 작용하는 생명의 연결성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표현입니다.
이처럼 지체와 머리의 관계는 첫째로 동일한 생명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동일한 생명으로 존재하다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생명은 같을지라도 서로 멀리 떠나서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서로 그 연결 가운데서만 살아서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결 가운데 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머리와 지체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붙어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임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중요히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의미, 이것이 머리와 몸의 중요한 관계를 또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지금 에베소서 4장, 특별히 15-16절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말씀은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되 머리에서부터 각 마디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입어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표상이 무엇을 표시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표상의 어떤 것은 실체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머리와 몸의 경우를 볼 때 가령 우리 몸에서 손이 자기 스스로 의사를 형성해 가지고 무엇을 잡아야겠다고 손을 뻗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머리에서 명령을 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손 자신은 자기 스스로 의사를 형설할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유기체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있는 유기체 관계는 그와는 다릅니다. 명령 계통으로 볼 때 하나의 연합체로서의 의미를 늘 가지는 까닭에,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인격적인 연결 가운데서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체 하나 하나가 다 영혼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손은 독립해 있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한 기능체 즉 기관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지체라는 것은 그 하나하나가 인격체인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원수가 되셔서 명령하실 때에 그 명령을 알아듣고 이해할 뿐 아니라 순종할 의사를 가지고 열복하고 나아가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체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 몸의 머리와 각 지체를 보고 예수님과 나와도 그런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둘러맞추면 안 됩니다. 원래 표상을 해석할 때 그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표상의 현상은 실상과 상관없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는 것들은 결코 실상에다 부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유를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비유 자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이 그 비유가 대표하고 있는바 실상에는 없는 것들도 있는 것입니다.
5.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함
6. 교회의 참 자태를 바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함
김홍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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