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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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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340)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에베소서 5장 22-30절)
<가정의 중요성 >
예전에 저의 첫째 딸이 대학교 3학년 때 말했다. “엄마! 저도 세상을 좀 더 알도록 기회가 생기면 친구들과 한번 클럽에 가 봐도 돼요?” 그렇게 부모와 소통을 이룬다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부부는 상의 끝에 대답했다. “허락하지만 한번만이다. 아무 때나 가고 싶으면 말해줘라.”
얼마 전 딸이 같은 과 졸업생 여자 친구 3명을 만났을 때 그들이 클럽에 가자고 해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예전에 클럽에 한번 가게 해준다고 약속했지요? 오늘 친구들과 한번 가도 돼요?” 그때 술을 먹지 않고 동선을 문자로 남기고 남자와 춤추지 않는 3가지 조건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고 허락했다. 큰 걱정은 없었다. 부모와의 진솔한 소통을 통해 딸도 잘못된 것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마음의 대비를 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진솔한 소통을 이루고 행복을 키워 가면 세상 유혹에 휩쓸릴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
성경은 곳곳에서 가정의 중요성과 가족이 지켜야 할 삶의 원리를 언급한다. 에베소서에도 그런 말씀들이 많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관한 교훈이 많기에 교회론 연구에 중요한 책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가정과 관련된 교훈을 많이 언급한다. 왜 교회론을 언급하면서 가정을 세우는 원리도 언급하는가? 가정과 교회는 속성이 비슷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가정은 작은 교회다.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되고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2가지를 특히 잘해야 한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이다.
< 아내의 의무 >
어떻게 가정을 교회와 같은 가정으로 만드는? 가정의 핵심 축은 부부다. 일차적으로 부부관계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부관계를 언급하면서 먼저 아내의 의무를 언급했다. 가정에서 아내는 어떤 의무가 있는가? 이 의무는 사실상 주님의 신부인 모든 성도의 의무이기도 하다.
1, 남편에게 복종하라
본문 22절을 보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왜 아내는 남편에게 주님께 복종하듯 해야 하는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23절). 공동체에서 최종적인 머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뜻이다. 그 최종적인 머리로 삼으신 것이 남편이다. 그러나 아내가 복종한다고 해서 주종관계는 아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순종을 잘한다. 성령의 감동과 말씀대로 살면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다.
사람에게 순종하면 가끔 비참한 느낌도 든다. 일자리를 준 사장 말에 순종할 때도 때로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다. 그래도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순종하면 그때부터 그는 위대해지고 결국 축복받는다. 어디서든지 불순종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경우는 없다. 사랑받는 최고의 길은 기쁜 순종에 있다. 아내가 순종하면 남편이 살맛이 나고 행복해진다. 그때 아내도 살맛이 나고 행복해진다.
2. 범사에 복종하라
본문 24절은 아내에게 그냥 복종하라고 하지 않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이 명령은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다. 남편이 신도 아니고 때로는 자기보다 더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데 어떻게 범사에 복종하는가? 남편의 행동을 보면 가끔 메스껍고 치사한 생각이 들고 자존심 상한다. 그래도 “예수님께 하듯이 복종하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남편을 작은 예수로 보라.
남편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여기고 섬겨주는 것이 “주님께 하듯 하라.”는 말씀의 의미다. 남편을 왕으로 받들면 자기는 왕비가 되고 아들은 왕자가 되고 딸은 공주가 되고 시어머니는 대비마마가 되지만 남편을 종처럼 취급하면 자신은 하녀가 되고 자녀는 노비의 자녀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아내는 순종하는 아내다. 그런 아내는 구하기 어렵고 어떤 보석보다 가치 있고 아름답다. 아내의 순종으로 아내가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일 때 남편도 아내에게 감격해서 아내의 말에 철저히 순종한다. 그것이 순종의 연쇄적인 힘이다.
3. 남편을 존경하라
본문 다음에 나오는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성경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단계를 넘어서 “남편을 존경하라.”고 한다. 이전 개역한글 성경에는 ‘존경’이란 단어 대신 ‘경외’란 단어를 썼었다. 최고의 존경심을 남편에게 표하라는 뜻이다. 가정적인 남편으로 만들려면 관심과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면서 남편의 약점을 지적하지 말고 남에게는 더욱 말하지 말라.
어떻게 부족한 남편을 존경하는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복음의 힘으로는 할 수 있다. 결국 행복한 가정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 복음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상대를 섬겨주면 자기의 필요도 채워지고 성숙의 은혜도 입는다. 그처럼 섬기려는 태도는 가정과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가져야 한다. 다 테레사 수녀처럼 되지 못해도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섬김의 삶을 실천하면 가정과 교회에 행복이 넘치게 된다.
< 남편의 사랑 >
사도 바울은 부부간에 취할 태도를 언급하면서 먼저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 명령은 남성위주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위한 명령을 남편에게도 하면서 남편에게는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남편은 어떤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첫째, 희생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소중한 신부처럼 여기고 교회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주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꿈과 희망이 담긴 공동체다. 교회가 아무리 부족하고 초라해보여도 교회는 주님의 최고로 사랑받는 대상이라고 여기고 교회를 사랑하라. 그런 애틋한 사랑을 가지고 남편은 자신의 전부를 주려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25절). 희생적인 사랑이 있을 때 귀신이 떠나고 병자가 치유되고 문제와 현실을 극복하는 힘도 생긴다.
둘째, 정결한 사랑이다. 남편은 자신을 정결하게 함으로 아내의 정결한 삶을 선도해야 한다(26-27절). 사랑에서 정결함은 필수다. 두 마음을 품지 말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잘 사랑하기도 벅차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래 뜻대로 한 남자에 한 여자가 이상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그를 전심으로 사랑함으로 배우자에게 성실하라. 한 사람이라도 잘 사랑하려면 최선을 다해도 늘 아쉬울 뿐이다.
셋째, 지속적인 사랑이다. 본문 29절 전반부에 나오는 ‘양육’이란 말은 지속적인 사랑으로 키운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아내를 가장 우선적인 관심 대상으로 삼고 다채롭고 지혜롭게 애정표현을 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는 것이다. 아내가 제일 원하는 남편은 충고는 적게 하고 잘 들어주는 남편이다. 그 사랑과 이해심이 꾸준히 지속되게 하라. 결혼 전과 결혼 후를 비교할 때 사랑의 질이 변하지 않게 하고 결혼생활이 오래 되어도 사랑의 내용은 더욱 깊어지게 하라.
넷째, 책임적인 사랑이다. 남편은 아내를 지켜주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29절). 딸을 가진 부모가 제일 원하는 사윗감의 덕목은 책임감이다. 믿음은 책임감을 수반해야 한다. 병든 남편을 수발하는 어떤 아내는 병든 남편이라도 살아있으니까 든든하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부족해도 아내에게 든든한 맛 하나만은 주어야 한다. 아내가 언제 남편으로부터 든든한 맛을 느끼는가? 책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다. 무책임한 순진함은 좋은 것이 아니다. 풋사랑은 ‘신선한 것’이지만 ‘선한 것’은 아니다. 성숙한 사랑은 책임적인 사랑이다.
< 삶에서 이뤄내는 성령충만 >
부부가 본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이다. 사람에게 있는 3대 갈증인 만남의 갈증, 대화의 갈증,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신비한 신앙 행위에서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가정생활과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사랑과 순종으로 이뤄내라.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말라. 성령충만하게 되는 것은 초인적인 성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충만은 초자연적인 삶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을 뜻한다. 성령충만은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일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영적인 은사는 혼자 만족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성령충만하면 몸과 마음을 쏟아 일하기에 삶에 생동감도 넘치면서 행복과 축복과 성공도 따라온다. 행복의 최대 비결은 성령충만한 삶에 있다.
성령충만하게 살면 환경이 변화되기 전에 자신이 변화된다. 능력 있는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라.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성령충만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내들에게 명령하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는 명령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내가 열등해서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위해 요구하는 그런 복종은 성령충만이 없다면 이뤄내기 힘들다.
진리에의 복종은 겉으로는 열등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열린 존재에게 복종을 요구할 때가 많다. 남편은 앞서서 이끌고 아내는 신비하게 이끌리면서 이끈다. 리드하며 이끌기보다 복종하며 이끄는 것이 더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은밀한 헌신과 숨겨진 진실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사람은 복종하며 이끌려고 해야 한다. 부부관계에서도 복종은 아내들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기에 본문 앞 21절에서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한 것이다.
3주 전에 A 원로 목사님이 방문했을 때 목사님 부부가 너무 좋으니까 같이 식사하던 성도가 말했다. “목사님! 다음 주일에 야유회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다. “그런 얘기는 담임목사님께 먼저 말씀하세요. 저도 상의해볼게요.”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인가? “내가 분당의 큰 교회 원로목사인데 이런 대접과 관심을 받을만하지.”라고 하지 않고 현재의 리더십에 철저히 복종하는 자세가 읽힌다. 그런 모습을 비굴하다고 하지 않고 위대하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 목사들의 존경을 더 받는다. 그것이 복종하며 감동으로 이끄는 자세다.
부교역자 중에 길이 막히고 교회를 떠도는 사역자는 그런 복종하는 자세가 훈련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담임목사 몰래 특정 성도를 자주 심방하거나 담임목사도 보는 교회 카톡방에서 담임목사는 가만히 있는데 열심히 카톡 활동을 하며 개인 상담까지 해주면 그것은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면 교회생활을 오래 한 성도들이 안 좋게 보고 부작용을 염려해서 참다못해 말한다. “목사님! 부목사님이 왜 저렇게 나대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담임목사는 난처해진다. 부교역자도 혼동한다. “왜 많은 사랑을 주려는 나를 막지?” 초신자도 의구심을 가진다. “왜 교회의 리더십 그룹이 부교역자의 사랑을 막지?” 그런 모습은 부교역자에게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복종하며 이끄는 지혜가 부족한 것이다. 신앙관계와 목양관계는 애인관계만큼 깊은 관계이기에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리더십을 존중하며 사랑을 펼쳐가야 그 사랑에 부작용과 후유증이 없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나쁜 것은 은근히 남의 애인을 가로채려는 것이다. 자기는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랑을 이용한 계산적인 사랑으로 보여질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나쁜 것은 이단이 복도 주지 못하면서 기적적인 치유와 성공과 응답을 내세운 사탕발린 말로 성도를 가로채가는 것이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리더십에 대한 복종훈련이 잘 되면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영혼이 가로채임을 당할 확률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
삶의 기초 원리로서 복종적인 삶을 힘써 훈련하고 실천하라. 복종이 실천되는 가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된다. 가정의 행복은 인생의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기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연히 행복해지는 가정은 없다. 행복한 가정은 예술작품을 만들듯이 정성스럽고 지혜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삶에서 이뤄내는 성령충만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에 힘써서 가정을 세상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작은 교회로 만들어가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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