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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기비하

빌립보서 차옥숭 자매............... 조회 수 3426 추천 수 0 2003.07.24 21: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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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6-8 
설교자 : 차옥숭 자매 
참고 : 새길교회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 빌립보서 2:6∼8

집안에 있는 화분을 옮기다가 둘 데가 마땅치 않은 화분 하나를 조금 높은 곳에 올려놓고, 다른 화분에 물을 주면서 그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을 잊었습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보았을 때는 잎이 다 말라서 죽어 있었습니다. 말라죽은 화분을 바라보면서 생명을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얼마나 물이 먹고 싶었을까 하는 안쓰러움으로 마음이 아파, 다른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말라죽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그 화분에도 물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난 어느 날 그 화분에서 새싹이 돋아 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 뿌리는 살아 있었던가 봅니다. 그때 저는 정말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에서 1800년경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벨론, 에집트 지역에서 국제어로 통용되던 수메르어로 의사를 "a-zu"라고 합니다. "a-zu"의 뜻은 "물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병은 죄로 인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병이 나면 속죄제의나 정화제의를 통해 병이 낫기를 바랬을 것이고, 이러한 제의에 물이 사용이 되었기 때문에 의사를 "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a-zu"로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우물의 소유권을 놓고 싸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의 속성을 잘 묘사해 놓은 구절이 노자의 도덕경에 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 8장 上善若水 에서, 최고의 선덕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물은 만물에게 좋게 베풀고 이롭게 해주지만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비천한 곳에 처해 있기 때문에 물은 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할 뿐 자기 자신을 위해 남으로부터 뺏거나 자리다툼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아래로만 흐르며, 막으면 흐름을 멈추어 괴고, 트면 흘러내립니다. 물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아래로 아래로 비천한 곳으로 흘러 생명을 적셔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고, 모진 데 넣으면 모가 집니다. 물은 흘러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되기도 합니다. 물은 유약합니다. 물은 차별하고 분별하고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고 생명력을 북돋아 줄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고집하면서 무엇이든지 구분하고 차별하고 분별하려고 합니다. 나와 남을 가르고, 삶과 죽음을 나누고 선과 악을 차별 짓습니다. 그러나 위치를 바꾸면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만을 고집하면서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비천한 곳에 내려와 고난 당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몰트만은 십자가 위의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인간, 즉 추방당한 사람, 저주받은 사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비인간화된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성을 인식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동시에 Ecce Deus! '하나님을 보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되심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타인 가운데, 비인간 가운데 있는 것, 곧 자기를 내어주는 비하(卑下)가 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는 비하는 버림받은 상태의 모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상응하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불가견'(不可見)한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상(模像)이라면  그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이것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이러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비하 가운데서 나타난 것보다 더 위대하시지 않다.
 하나님은 이 헌신 가운데서 드러난 것 이상으로 더 영광스럽지 않으며,  이 무능력 가운데 있는 그 이상으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성 가운데 드러난 것보다 더 신적이지 않다" 인간 예수를  우리가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과 똑같은 하나님,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는 하나님

저는 학교에서 여러 종교전통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여러 종교 전통의 아름답고 심오한 사상들을 전하다 보면  가끔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신앙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는 성서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다 벗겨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인간 예수의 모습 속에서 신성을 느끼고 하나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예수, 자기에게 못을 박고 창을 찌르는 그들을  위해 "주님 저들이 몰라서 그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그분의 모습에서 신성을 느끼고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이전의 십자가는 인간의 무력함과 희망 없음의 밑바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가 아니 하나님이  자신을 무력하게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십자가는 변화됩니다. C. S. 송은  "하나님의 무력함은 그가 미워하고 파괴하고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힘있는 하나님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고, 살게 하고, 희망을 주는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미움, 파괴, 그리고 죽음의 힘에 대한 승리,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였다.  세계는 하나님의 이 무기력함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가 감옥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쓴 그의 편지에서 "하나님은  이 세계에 있어서는 무기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 고난 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와줄 수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처형된 그 하나님의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분의 교회는 풍요 속에 부를 축적하는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승리지상주의의   논리에 박수를 치는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지난 2002년 겨울에 나온「새길  이야기」에 "민족화해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대담이 수록되었습니다.
 저는 대담 내용을 읽다가 한완상 선생님의 "반드시 승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교훈입니다"하는 내용이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의 설교를 구상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승리지상주의에 오리엔테이션 되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등으로 말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래보다는  위를 더 많이 보고 살아왔으니까요. 이러한 저를 돌아보고 부끄럽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제 방에 찾아 왔습니다. 그 학생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저희학교 철학교수님의 책을 읽고 그분에게 배우겠다고 서울학교를 그만두고 지방에 있는 저희 학교에 온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 자체가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다음 그 학생의  이야기는 더욱 감동적입니다. "교수님, 제가 서울에 있을 때는 몇 가지 가치만을 좇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 잘해라.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직장 구해라.' 등등. 이곳에 와서 보니까 그러한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소중한 가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그래 너는  나보다 철이 더 들었구나. 나는 아직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이 조그마한 지방대학에서 벗어나 큰 대학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 발을 몹시 절며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학생의 가방도 들어주고, 그 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눈에 뜨이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학생은 저에게  "교수님, 윤자 언니와 같이 다니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어요.  윤자 언니는 걸을 때 저희들과 보폭이 달라요, 저희는 또박또박 걷는 다면 윤자 언니는 또-박 또-박 걷는데, 언니는 빨리 걷는 우리들이 놓쳐 버리는 작은 풀꽃들에서부터 사소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아 빨리 걷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라고  말입니다.

그 학생과의 만남은 제게 소중했습니다.  높은 곳만 바라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더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잊어버리고, 남보다 빨리 걷기 위해 우리가 사랑해야 될 주변의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따르미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더 많은 복을 받고 더 잘살고 기필코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처럼  아래로아래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가장 비천한 곳에 내려와 조건 없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고 뽐내지도 않는,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처럼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어 죽음으로서 미움과 파괴와 죽음을 사랑과 희망과 생명으로 뒤바꾸기 위해서 한발한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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