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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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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빌립보 서신은 가장 아름다운 옥중서신입니다. 그 주제는 기쁨, 관용, 감사기도, 평강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기쁨보다 슬픔이, 관용보다 배타심이, 감사기도보다 분노가, 평강보다 불안이 더 뚜렷합니다. 스트레스는 바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나옵니다. 스트레스가 질환을 낳고, 질환이 사망을 낳는다면 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감옥이라는 스트레스 생산공장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환희, 관용, 감사, 평강을 증거 해주신 사도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이 현실을 이겨내는 복음적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감옥과 같은 부자유, 불안, 공포, 절망의 객관적 조건 속에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사도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첫째 그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것은 실성한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히죽히죽 웃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안에서 내밀한 기쁨을 샘솟듯 느끼는 사람은 우는 자와 함께 울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항상 기뻐하라는 뜻은 객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록 더 깊고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이 비신자와 다른 점입니다. 권력과 명성, 그리고 부귀 속에서만 기뻐하는 사람과 아주 다릅니다. 악조건 속에서 죽음의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기뻐하는 삶이 신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악조건 속에서 십자가의 참뜻을 몸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둘째, 관용해야 합니다. 관용이란 말은 희랍어로 epieikeia인데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뜻으로 번역됩니다. 인내, 부드러움, 겸손, 화합, 관용 등으로 번역됩니다. 옛날 희랍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것은 〈공정성 이상 더 좋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공정성은 법의 본질로서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법이 공정해야 기강과 질서가 생깁니다. 로마의 법 신이 눈을 가린 것도 바로 이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정말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되려면,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려면 공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어 epieikeia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는 관용으로 번역되었고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기쁨은 안으로 느끼지만 관용은 밖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공정성의 잣대만으로 산다면 삭막하고 몰인정한 삶이 되기 쉽습니다. 〈이는 이〉, 〈눈은 눈〉 식으로 징벌하는 것은 공정합니다. 의부를 죽인 여대생은 죽여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도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그들의 정상을 참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의 형식논리에 매달린 공정성만으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관용은 바로 이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내렸던 판결은 법의 형식논리(돌로 쳐라)가 아니라 바로 이 관용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정성의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불합격품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관용, epieikeia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관용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인도 교회도 환난 중에서 뭉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네로의 박해를 견디어냈습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내밀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관용을 남에게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가까우시다〉라는 종말론적 신앙과 희망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유한의식, 시간의식에서 나오는 겸손 때문입니다. 유한에서 영원을 사모하면서 삶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교만, 독선, 탐욕을 상대화시키게 되면 겸손해지고 남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도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간증이 솟아납니다. 유한의식은 짧은 내 인생에서 넘치게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헤아리게 합니다. 기도는 바로 이 은혜를 세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의 삶에서 실패건수만 세는 사람이지만, 기쁨과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은혜와 축복을 세어보는 사람입니다. 마치 순간을 영원으로 착각하여 사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지난날의 실패에만 매달리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도 1980년 봄과 여름 혹독한 지하 2층 독실에 갇혀 있을 때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면서 참회의 눈물,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면서 내밀한 기쁨을 맛보았고, 관용하지 못했던 내 삶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삶의 굽이마다 아픔이 있었으나 그 아픔 속에 담겨있는 은혜와 축복, 비록 그것을 그때는 느끼지 못했으나 나중에 체험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보초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종말론적 희망과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를 보초처럼 지켜주십니다. 여기 지켜준다는 원어는 군대보초처럼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우리들의 보초가 되어 주시는 자상한 분이십니다. 절대자로서 군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평안하게 지켜주시는 우리의 보초이십니다. 우리는 보초병 하나님께 새삼 감사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연말연시를 당해 지난 365일 동안, 아니 우리의 지난 모든 삶의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보초병 하나님의 은혜와 그 축복을 하나 하나 헤아려 봅시다. 거기서 은밀한 기쁨을 느끼고, 거기서 관용을 베풀고, 거기서 감사기도를 드립시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들을 보초처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1993.1.1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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