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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2: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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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20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닫힌 체제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되며, 닫힌 존재나 지도자가 되는 경우 사람과 체제는 다 함께 멸망한다는 교훈입니다. 닫힌 체제의 특징은 단일한 진리에 대한 맹신 때문에 이것에 대한 다른 생각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억압하는 데 있습니다. 1930년대 독일을 석권했던 나치의 광기와 이태리를 휩쓸었던 파시즘의 횡포는 바로 이같은 비극을 잘 드러내줍니다. 또한 1980년 말 갑자기 해체되어버린 공산체제의 운명도 바로 그와 같은 닫힌 체제의 필연적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닫힌 존재와 닫힌 체제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납니다. 정치에서도, 종교에서도, 심지어 학문에서도 나타납니다. 대체로 그것이 광기를 띠게 될 때는 종교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지니게 됩니다. 지난 10월 4일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서는 60만 명의 남자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눈물의 회개를 했습니다. 약속 지키는 사람들이란 뜻의 Promise Keeper란 신앙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남자들의 모임이었는데, 이 운동의 지도부는 일종의 남성 우월주의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해서 여권 운동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남성만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올곧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까닭은 남성의 영적 구조가 여성의 그것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수하다고 하는 확신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래서 60만 대 집회에는 여성이 배제된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더 좋은 아빠, 더 충실한 남편이 되려고 회개한다 해도, 남녀 불평등에 대한 신앙적 확신을 갖는 한 그것도 닫혀진 체제의 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죠지 소로스(G. Soros)라는 세계적인 금융 투자가는 자기의 엄청난 재산을 열린 사회(open society) 건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고 있습니다. 이 흐뭇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열린 존재, 열린 사회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21세기는 열린 사회로 향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열린 존재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예수의 몸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열린 존재의 그 아름다운 모습들을 확인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열린 존재의 모습을 초대 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고백에서 찾아봅시다. 빌립보(2:5-11) 서신은 그 모습을 간단명료하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열린 존재의 그 아름다움은 자기를 비우는 삶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토록 감동적 존재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 하나씩 간단히 살펴봅시다.
첫째, 예수님 때까지도 하나님은 너무 높은 곳에 계시는 위엄 갖추신 지고지존(至高至尊)하신 분이었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절대 권위를 가지시고 위엄 있게 앉아 계시면서 낮고 천한 인간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절대자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신의 모습과는 아주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스스로 비우시는, 그래서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천내인(天乃人)인 셈이지요. 높은 옥좌에 앉아 계시는 무관심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억울한 고통과 의로운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compassionate)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옥좌에 가만히 앉아 계실 수 없어 벌떡 일어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테반의 그 의롭고 외로운 죽음을 보시고 그 높은 옥좌에서 앉아 계시지 않고 일어나시어 사랑의 응원을 하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행전 7:54-61).이렇게 일어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옥좌를 비우시고 그곳을 떠나 인간으로 내려오시되, 인간 중에서도 가장 천한 존재인 종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고한 하나님이 아니라, 종들 속에 계시는 겸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를 비우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존재를 비우게 하는 힘과 용기입니다. 그 빈 공간에 남을 초청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속에 남들로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남의 좋은 것으로 자기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면 자기는 더 좋은 존재, 더 열린 존재로 나아가게 됩니다. 남은 내 속에서 더 가치 있게 살게 되고, 나도 남 속에서 더 뜻깊게 살게 됩니다. 남의 좋은 것으로 나를 채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까닭은 내가 스스로 자기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를 내 속에 모신다는 것이요, 나는 그의 속에서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서로 커지지 못하고 서로 향상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어..."하는 말을 자주 듣는 것은 사랑은 스스로 비움으로써 더 좋은 것으로 채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묘약의 효과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처형될 형틀에 하나님이 스스로 처형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치 자식의 죄를 대신 지고 그 자식의 처형 대신 자신이 벌받고 싶어하는 어버이 마음과 같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사랑이기에 스스로 비워 십자가에 처형까지 당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장 열린 존재로 하나님을 고백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적 활동에서 보다 구체적인 열린 모습들을 확인해 보는 것도 뜻이 있겠습니다.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심각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던진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아름다운 열린 자세를 확인해봅시다. 대체로 질문자들은 예수를 곤경이나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기를 스스로 높게 보이려고 문제를 던진 사람들입니다. 대체로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뜻을 품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생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교만한 율법사에 대해서 주님은 편견 없이 열린 대화를 진행시킵니다. 질문자의 못된 의도를 알고 계셨으나 전혀 모르신 체 하시면서 그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질의자가 진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도록 자상하게 열린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정말 위대한 스승 예수의 진면목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경계했던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도 예수는 당시 유대 전통에 따른 성 차별주의자의 닫힌 태도를 취하시지 않습니다. 그 여인에게 영생의 물을 발견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를 송사하기 위해 세금문제를 제기했던 고약한 사람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구체적인 교재(동전)를 가지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세속권세의 것은 세속권세(가이사)에게 바칠 것을 권유했습니다. 적의와 증오의 칼을 가슴에 품고 던지는 질문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여유 있게 열린 존재로 응답하셨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존재를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죄인과 병자들, 여성과 같이 당시 차별 받던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 정말 감동적인 열린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죄인들과 섞여 죄인처럼 먹고 마셨기에 주님은 게걸스럽게 많이 먹고 술 주정을 하는 분으로 기술되기도 했습니다(gluttons, drunkard). 차별 받았던 어린이들에게 접근의 통로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그 당시 여성은 가사에 전념했고 진리 탐구에는 남성들이 나서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닫힌 성(性) 분업체제(分業體制)를 예수님은 흔들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가사에 열중한 마르다 보다 진리 탐구에 열중한 마리아의 를 더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또한 병자를 낫게 해주는 카리스마의 기(氣)를 누구에게나 원하는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치유능력은 믿는 자들에게는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12년간 혈루증에 시달렸던 여성을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카리스마를 차단할 계급적 장벽, 지역적 장벽, 성적 장벽, 이념적 장벽은 아예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열려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중병환자를 완쾌하게 해주신 뒤에는 철저하게 열린 모습으로 용기를 주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했습니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열린 존재로 다가오셨습니다. 그 처절하고 절박했던 겟세마네 동산의 분위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아 마땅했던 그 외롭고 괴로웠던 순간, 쿨쿨 자고 있는 수제자들의 그 우둔한 모습, 그 한심한 모습을 보시고도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우둔함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고 깊이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 제자들의 약함에 대해 예수는 열려 있었습니다.최후만찬의 그 비감했던 순간, 자기를 배신하고 있는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당신은 어질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열려 있었습니다. "이 배신자야" 하고 외치면서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려주어도 시원치 못할 터인데도, 주님은 잔잔하게 열려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장한 사람들과 대치하면서도 "너희들이 찾는 예수는 바로 나다" 하고 앞서서 자신을 열었던 용기도 바로 주님의 열린 용기였습니다. 체포의 위기에 부닥쳐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체포자들 손에 넘기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의심했던 도마에게 못 자국 있는 손을 도마에게 보여주신 주님은 그때도 열려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닫힌 반대세력에게 까지도 자기를 열고 비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열린 존재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왜 악한 닫힌 세력에 대해서는 , 으로 대응하시지 않으셨을까요? 배신자들을 왜 혹독하게 꾸짖지 않으셨을까요? 왜 악의 세력 앞에 침묵하시다시피 했을까요? 바로 이러한 질문이 일본인 작가 안또 슈샤쿠를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감동적인 작품을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위기와 죽음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 이 예수에게 메시아의 희망을 걸었던 제자들을 처음에는 고향으로 흩어버리게 했지만, 마침내 바로 그 열린 침묵과 열린 무력함이 엄청난 사랑의 힘에서 나온 것임을 성령을 통해 확인하면서, 절망과 좌절에 깊이 빠졌던 제자들이 새로운 희망과 믿음과 결단력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다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로마 군인의 그 잔인한 창이 당신의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가슴을 열어주신 주님은 사랑의 폭발이라는 부활사건을 통해 로마의 세속 힘을 이겨내는 힘있는 주님으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러한 열린 사랑의 주님을 함께 회상하면서 온갖 고통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더욱 강한, 더욱 열린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하나의 열린 공동체, 하나되게 하는 힘찬 공동체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려 있습니까? 스스로를 비웁니까? 이 땅의 교회는 그 규모가 커지고 그 자산이 넉넉해지면서 더욱 닫힌 조직체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비우신 사건의 상징인데, 실제로 교회는 그것을 스스로 닫는 차별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교회는 진리와 생명과 길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절대자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 속에서 스스로를 비우시고 상대화하시는 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오라. 여기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 다른 곳은 모두 사이비일 뿐이다"라고 외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상대화시키시는 절대자 사랑의 하나님은 열려 있는 절대자이십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근본주의적 독선과 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얼마나 독선적인 닫힌 조직체입니까? 교회는 닫힌 세력들에 의해 이용당하거나 상처받게 되더라도 항상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주변이 모두 적대적인 세력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도 자신을 연다는 것은 로마 군인의 창 칼 앞에 자신의 가슴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행위와 같습니다. 참으로 괴롭고 외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교회는 스스로 열어놓아야 합니다.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열어놓아야 합니다. 교회는 저 높은 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닫힌 조직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곳에 우리 하나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에서 억울한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그 고통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갈수록 감동을 엮어내는 힘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그 인고(忍苦)의 행적이 후일 제자들에게 새 힘으로 작용했듯이, 열린 채 상처받는 오늘의 교회들도 지금은 괴롭지만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새 인간, 새 역사를 여는데 앞장 설 수 있습니다. 열린 인간과 열린 교회는 열린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마당입니다.
오늘도 꽉 닫혀진 한반도의 차가운 상황에서 열린 공동체와 열린 사람들이 열린 하나님과 함께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바로 닫힌 체제가 열린 체제로 변화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새길교회는 열린 신앙공동체가 되어 닫힌 조국과 민족을 하나의 열린 공동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비우는 결단을 끊임없이 내려야 할 것입니다. 새길은 곧 열린 길임을 잊지 맙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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