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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는 신이 아니다!

빌립보서 이종록............... 조회 수 1797 추천 수 0 2008.08.26 11: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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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5-11 
설교자 : 이종록 목사 
참고 :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구약학 교수 새길교회 2005.11.20 주일설교 

제가 신학을 공부한 지 올해로 22년입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가르친 지는 17년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기 때문에, 제가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신학(神學)입니다. 여러분. 신학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지요. 그런데 신학을 신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할 때, 나는 기독교에서 신학이 가능할까를 고민합니다. 참으로 엉뚱한 말 같지만, 이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연 신학, 즉 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가능할까요?

신학을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학을 신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면,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이 신이어야 할 텐데, 하나님이 과연 신이신가?”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을 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신이라면 어떠해야 할까요? 신이 신답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사람들은 관용적으로 이런 문구를 사용합니다. “전능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구불변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저 기도하겠다고 입만 열면, 줄줄 흘러나오는 구절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전지전능(全知全能)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신다.” 이게 전지전능이지요. 하지만 그렇다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물리적인 우주 창조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삶의 창조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새시대?새역사를 이루는 것을 창조(創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성전도 파괴하고, 사람들을 붙잡아서 1,300여 킬로미터를 끌고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했을 때,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당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바벨론을 포함해서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미 태초에.
너희들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너희들의 경제력, 문화, 정치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너희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서,
모든 것이 다 너희들 것이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지.
아무리 너희들이 날뛰어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 신앙만큼은,
이것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이미 태초에,
하나님이 이 바벨론 땅 덩어리를 포함해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야웨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활한 바벨론 천지가 울리도록
이렇게 소리쳐 외친다.
그것이 비록 세미한 음성으로 들릴지라도,
우리는 목청껏 외칠 것이다.
이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얼마나 다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다른 때 다른 곳도 아니고, 나라가 망한 다음, 포로로 끌려간 그 이방 땅에서 경험하다니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같으면 “신의 부재”(不在)를 경험해야 할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신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비극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 역시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서, 신이 무능력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대대로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대국들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셨다고 고백함으로써, 신 부재의 상황을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상황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하나님을 위대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제 모습을 역사 전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절한 신앙고백 속에서만 비로소 신이 되고, 역사 전면으로 나섭니다. 그러니 전지전능 하기는 커녕 무능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분, 인간들이 신이라고 불러주기 전에는 결코 신일 수 없는 분, 그분을 어찌 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리는 그 비참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성전이 짓밟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침묵하시는 분, 제국주의자들이 행하는 침략을 방임함으로써 스스로 역사주관자이기를 포기하시는 분, 그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로 고백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끊임없이 갱신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래와도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면, 모래가 손아귀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더 힘을 주면 줄수록, 모래는 틈새로 다 빠져 나가고, 나중에 손에는 모래 흔적만 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경망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마치 미꾸라지 같습니다. 손에 움켜잡았다 싶으면 그냥 빠져 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붙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신학에 통달한 것처럼 폼을 잡아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 하나님은 결코 인간 손아귀에 붙잡혀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을 줘서 모래를 움켜쥐면 쥘수록 모래가 다 빠져나가서 나중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듯이,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를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학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는데,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그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종교적 경험을 말할 때, 많이 쓰는 용어는 ‘초월’입니다. 종교에서 초월(超越)은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넘어서서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초월’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성서를 읽으면서 강하게 느끼는 것은 인간은 결코 초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공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어디로든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초월해서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면, 인간이 신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한가지뿐입니다. 인간이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초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이 인간세계로 넘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초월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부터가 바로 이 세상으로의 초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신이 인간과 함께 거합니다. 인간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러니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행하신 초월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신의 초월은 바로 성육(成肉) 사건입니다. 신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신이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들과 함께 삽니다. 인간이 신의 세계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 세상 속으로 초월해서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신이 태어나고 살고 죽고 묻히는 공간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유일한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성육 사건을 통해서 예수는 자신이 신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온 우주 만물로부터 경배를 받아야 할 신의 자리를 과감히 버리신 분. 신을 섬기는 사람이 되신 분. 이렇듯 신이 이 세상으로 초월해 오는 성육 사건은 예수께서 신이기를 포기하는 사건입니다.

나는 신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어도 좋다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내 사랑이
그냥 짝사랑에 그쳐도
아니, 그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너에게 버림받고
온갖 조롱으로 멸시천대 당해도
심지어
어디 한곳 성한 데 없이
작신 두들겨 맞고
끝내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해도
고통에 몸부림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처절한 외침으로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향한
내 사랑
아무도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
오 그대
내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내 목숨바친 사랑이여
그대여.

성육 사건과 십자가 사건은 바로 예수가 자신은 신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인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제가 오래 전부터 고민해온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방법 밖에 없었을까? 신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 밖에 없었을까? 신이라면, 전능한 신이라면, 그저 손만 까딱해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텐테, 아니, 그냥 마음만 먹어도 다 이룰 수 있을 텐데, 그래야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십자가를 져야 했는가?” 우리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식을 보면, 전능한 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인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십자가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 자신이 전능한 신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이기를 포기한 사건입니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신이기를 포기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실들로 가득 합니다. 보십시오. 전지전능하다는 분이 자기를 섬기는 백성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고대 신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마이너였지 메이저 리그에 들지 못했습니다. 국제정세를 비롯해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자기 백성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 뜻 하나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하는데, 어찌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어떤 왕이 그랬다면, 그 왕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이지요.

그리고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여버리겠다, 진멸(盡滅)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통 거친 말이 아닙니다. 정말 성질 더러운 조폭들이나 할 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겠지요. 신이 아니고 도사만 되어도 어떤 일에 쉽게 화내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조금 잘못했다고 번번이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뛴다면, 어떻게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신이라면 당연히 이 수준을 넘어서야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격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다 드러냅니다. 이것도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신이기를 포기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변덕스러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다가,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애간장이 녹는 듯한 아픔을 겪기도 하십니다. 신이라면 시종여일 변함이 없어야 할 텐데, 이렇게 변화무쌍해서야 어디 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가슴여린 그분, 그 지독한 파토스로 몸살을 앓는 그분을 어찌 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신이기를 포기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를 읽으면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신이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형적인 신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학이 가능하겠습니까? 신을 다르게 정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신의 반열에 오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뒷부분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예수께서 오히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즉 신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자, 하나님이 예수를 온 우주만물의 왕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정말 아름답고 위대한 찬송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연히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는 이런 찬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연히 신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면,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 무릎 꿇은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어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아직 신이 아닙니다. 아직 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자신이 아직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님을 압니다. 아직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게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상황들이 예수가 신이심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르고 달래며
“당신이 진짜 신”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길 없는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세상 부귀 영화 명예와 권세
다 나를 위해 버리겠노라 다짐해놓고
정작 신의 이름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제 목숨 스스로 끊고 마는
한 맺힌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며
오로지 제 욕심 챙기기에 급급한
맘몬 숭배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내놓을 것 하나 없어
기 펴보지도 못한 채
날마다 눌려 사는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나를 사랑의 신이라 칭하면서
제 왕국을 건설하고자
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그대들이 아무리 나를 신이라 해도
아직 나는 신이 아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신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신이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예수는 신이기를 포기한 체, 이 땅에서 우리들과 함께 사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뜻을 따라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무능하게. 그러니 그분은 아직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진정한 신입니다. 우리가 규정해놓은 그 기준을 넘어서, 전지전능과 무소부재와 영구불변이라는 관념적 허울을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참 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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