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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은 관용의 길

빌립보서 한완상............... 조회 수 1754 추천 수 0 2008.09.02 18: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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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4:4-5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1.1주일설교 

빌립보서 4:4~5, 갈라디아서 6:1~2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빌립보 4:5)
“형제 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주고, 자기도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 6:1)

새해를 맞아도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때까지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독선과 탐욕, 오만과 배타의 흐름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듯 합니다.
지난 한해 우리는 자연이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대해 이제 더 견딜 수 없다는 듯 분노하며 대항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듯 했습니다. 동남아의 쓰나미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그 괴력보다 세배나 큰 엄청난 파괴력을 쏟아냈습니다. 30만 가까운 인명이 한순간에 사라졌지요. 지구가 신음하듯 내뱉은 이 가공할 괴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 합니다. 자연재난의 규모와 강도는 더욱 거칠어지고 커지고 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을 초라하게 만든 카트리나 태풍이나 약소빈국 파키스탄을 처참하게 만든 지진은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교만과 탐욕을 힘으로 거부하는 자연의 저항 몸짓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자연재난 속에 담겨있는 인간재난의 씨앗을 볼 수 있는 성숙한 자기성찰이 요청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우들과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권면한 자기성찰적 관용(epieikeia)의 가치를 새삼 생각케 합니다.

지난해 11월에 서울에서 열린 적십자 연맹총회에서 UN 조정관은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이 다름 아닌 조류독감의 세계 확산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독감에 걸리게 되면 인간의 유전인자가 변형되어 치명적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전 세계로 번지는 괴질(pandemic)이 될 때 인류의 앞날은 심각하게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마치 말세가 도래한 듯한 경고를 발했습니다. UN은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이 질병 퇴치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으나, UN기구가 각 나라 안에 질병퇴치를 해낼 수 있는 자발적 봉사자들을 동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래서 적십자운동 같은 인도주의 봉사자들의 자발적 헌신이 요청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당신들을 필요로 합니다(We need you.)”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경고와 호소를 들으면서 저는 바울의 봉사적 관용(epieikeia)의 가치를 다시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며칠 전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쵸커(Chalker)씨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종교의 종말을 위한 기도〉라는 제목의 절박한 글이 이었습니다. 기독교이거나 무슬림교이거나 율법주의로 전락한 제도 종교는 그 고착된 신조의 이름으로〈다름〉을 적대시하고 박멸하려는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저항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므로, 종교의 그림, 사진, 아이콘, 이념, 신조, 경전, 교리들에 갇힐 수 없는 힘이요, 살아 움직이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경외심의 감동과 신비로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의 힘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케 하는 힘이요, 사랑의 폭발적인 힘이기에,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자살폭발을 주저하지 않고 저지르는 제도 종교의 사악함과는 전혀 관계없음을 강조하는 글이었습니다. 쵸커 목사는 이 같은 근본 주의적 종교의 종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집단과 집단 사이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더욱 벌여놓고 그 곳에 높은 장벽을 설치하는 오늘의 종교현실에서 그는〈영적이지만, 종교적이 아닌〉(spiritual but not religious) 기도가 21세기의 참된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읽으면서 또다시 저는 바울사도의 열린 영적 힘으로서의 관용(epieikeia)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황우석 박사의 과학적 조작사건을 지켜보면서 권력화된 과학의 처참한 모습과, 성과 지향적 편법주의 가치관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애국주의의 광기를 보면서 정말 허탈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황 박사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편법주의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 아니겠는가를 자성하면서 바울의 관용(epieikeia)의 가치를 새삼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 덕목과 가치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는 것일까요. 그가 빌립보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강조한 이 epieikeia가 왜 이토록 21세기 우리의 상황에서 절박하게 요청될까요. 이 단어는 한가지로 번역되기 어려운 낱말입니다. 그 다의성(多意性)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드러움, 양보, 인내, 온유, 겸손, 친절, 자비, 화합, 사려 깊음, 그리고 관용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 온유한 마음으로 죄에 빠진 사람을 바로 잡아주고…”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그 속에는 아주 소중한 뜻이 관류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 낱말을〈공정 또는 그 이상의 더 좋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공정을 포함하되 그 이상의 더 좋은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공정(公正)은 법적 정의 곧 재판의 공평성을 뜻합니다. 저울의 균형 같은 정의를 뜻합니다. 그것은 범죄의 무게에 값하는 심판과 징벌의 양(量)을 뜻합니다. 그런데 epieikeia는 그러한 정의 이상의 가치, 정의보다 더 좋은 가치를 그 속에 간직하고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가치는 조건을 뛰어넘는 자비의 행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눈은 눈, 이는 이의〈때문에의 논리〉에서 내 눈을 때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껴안아 주는〈불구하고의 논리〉를 촉구합니다. 이 가치는 〈다름〉을 포용해주고 존중해 주는 가치입니다. 다름이 클수록 더욱 뜨겁게 포용해주고 더욱 존중해주는 마음입니다. 남의 실수와 범죄를 보게 되면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기를 먼저 되살펴보는 지혜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낱말을 우선 관용이라고 번역해 봅시다. 다름을 존중해주면서, 조건적 대응행위를 정의의 이름으로 부추기지 않고 오히려 그 다름을 아름답게 수용하려는 열린 태도이지요. 공정과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실수하거나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거침없이 책벌하려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는 이 epieikeia의 가치가 더욱 감동적으로 빛난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같은 가치에서 우러나오는 사회적 관계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세워 보려했던 공동체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세워나가야 할 예수의 몸 된 공동체, 새 길의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할까요? 새해 첫 주일에 우리는 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세우려고 했던 새 질서, 새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열린 관용의 새 질서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 높이 세워진 온갖 부당한 장벽들, 이를테면 계급적 장벽, 지역적 장벽, 성적 장벽, 인종적 장벽들을 예수님께서는 해체하려고 하셨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설치된 종교적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신성한” 칸막이를 높이 세워 놓고 그것을 관리하면서 권력을 누렸던 성직자들, 종교적 중개인들의 역할을 거부하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적으로 특정 인간들을 불결한 부류로 분류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한정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 여성, 환자, 안식일 준수 등의 율법을 어긴 자들이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다만 제사장들만이 신성(神聖)에 대한 접근을 독점하였고, 그들만이 불결한 사람으로부터 일정한 대가(희생제물)를 받고 그들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종교적 중개업자들을 거부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Abba)로 부르셨지요. 모든 사람들, 특히 불결한 자로 정죄된 사회적 꼴찌들과 탈락자들에게 아빠처럼 친근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체험케 해주셨지요. 여기서 아빠 하나님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확신했던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 정의의 이름으로 징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과 너무나 대조되는 사랑의 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의 예수만이 아니라,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께서도 아빠 같은 또는 엄마 같은 친근한 하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처형 사건 뒤, 제자들은 정말과 좌절에 깊이 빠져 각기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라는 곳으로 내려갔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친근한 길벗으로 다가오셨지요. 좌절과 실의에 빠진 그들을 깨우치셨지만, 아직도 그들은 그 길벗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녁이 되어 함께 식사하는 순간, 제자들의 영의 눈은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 갈릴리의 예수님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지요. 갈릴리 지역에서 밥상공동체를 펼쳐 보이시면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낙인 찍혔던 온갖 사람들을 밥상으로 초대하시어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바로 그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밥상공동체는 한 마디로 열린, 관용의 공동체였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바로 그 곳에서 온갖 부당한 장벽들을 허무시고 열린 공동체, 에피에이케이아의 공동체를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첫째로 부활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가 관용의 밥상공동체에서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 뿐 아니라, 둘째로 좌절과 실망에 빠졌던 제자들이 요구하지도 않았으나, 부활의 예수님이 친히,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친근한 길벗으로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은총의 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요구하거나 칭얼대지 않아도 우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어 일부러 길벗으로 찾아주시는 그러한 따뜻한 하나님이 바로 은총(grace)의 하나님이시며, 아빠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분은 바로 살아있는 영의 힘으로 열린, 관용의 관계를 이 땅에 인간들 사이에서 펼쳐나가는 일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오늘도 영의 하나님,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삶 속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성이 부족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예수의 삶과 죽음을 기독교 신학으로 발전시킨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관용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섰던 분입니다. 그러나 한 때 그는 바리세인 중의 지독한 바리세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방인이나, 여성이나, 종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신 심판의 신에게 감사드렸습니다. 오로지 깨끗한 부족으로 자처했던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그 중에서도 남자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바리세인으로 태어나 살 수 있음을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했던 바울은 그리하여 예수따르미들을 불순하고 불결한 종파로 내몰아 잔인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다메색에 일고 있던 예수 운동을 박멸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뜻밖에 만납니다. 일방적으로 부활의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지요. 전적으로 은총의 체험 사건이지요. 이 때부터 그는 180도 전환됩니다. 그래서 “내가 나됨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는 그의 실존적 고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 후 여러 교회를 세웠던 그는 빌립보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열린, 관용의 덕목을 실현하도록 권고합니다. 그 덕목이 바로, 부드러움, 양보, 인내, 온유, 겸손, 친절, 자비, 화합 등의 뜻을 모두 담아내는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의 가치입니다. 한마디로 관용의 공동체의 가치입니다.

이것은 법의 세칙(細則)에 얽매이지 않는 너그러움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잔을 넘치게 하는 여유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잔에 축복의 포도주를 넘치게 채울 수 있는 마음은 잔이 넘쳐흘러도 좋다는 여유에서 나옵니다. 한 방울이라도 넘치면 탈선이나 일탈로 보아 불안해  한다면 잔을 넘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의 저자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여유입니다. 넘치는 잔만이 잔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넘치게 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는 그 넉넉한 마음이 바로 에피에이케이아입니다. 공정을 추구하나 공정 이상의 더 좋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바로 사도 바울이 권고한 온유와 관용의 공동체입니다. 인내와 겸손이 넘쳐흐르는 공동체이며, 사랑과 자기성찰로 가득찬 공동체입니다.

이 같은 관용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는 순간 잉태됩니다. 그 같은 체험은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탕자 같은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튀는 한 마리 양처럼 자유분방하게 놀아 길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하나님은 저희들을 친히 찾아오시어 시간 속에서 영원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시는 인자한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은총에 정말 감사한다면, 우리들은 우리들 속에서 바로 그 열린, 관용의 관계를 키워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새 길이 바로 관용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해를 맞아 우리 새길 공동체가 참으로 예수따르미, 바울따르미의 따뜻한 공동체로 한 단계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평신도 공동체임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삼무교회(三無敎會)임을 자랑합니다. 이제는 없는 것을 자랑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는 것을 겸손하게 자랑해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 관용과 사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넘쳐 흐르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그 관용 공동체의 그 따뜻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마치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라고 권면했듯이 말입니다.

첫째 관용의 공동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종교적 브로커(broker)의 역할을 거부하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아빠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서 직접 하나님의 영을 체험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그 체험을 서로 나눠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서는 사제와 평신도 같이 계급적 차이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관용의 공동체 안에서 직접 하나님의 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체험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요, 동등합니다.

둘째로 서로의 실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관용의 미덕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갈라디아 6:1~2) 사람마다 도덕적, 지적 장단점들을 두루 갖고 있습니다. 장점만 갖고 있는 사람도 없고, 단점만 갖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관용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여 장점들끼리 따뜻하고 튼튼한 연대를 맺게 할 때 아름답게 꽃피게 됩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자동차 열쇠 구멍이라 생각하여 그곳에 내 관용의 열쇠를 집어넣어 힘차게 발동을 걸게 되면, 아름답고 따뜻한 관용 공동체가 발진하게 됩니다. 그곳에 보복의 악순환은 깨어지고 따뜻한 공동체의 선순환이 작동하게 되고, 그것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마침내 평화와 사랑이 큰 강물처럼 우리 안에서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테두리를 넘어 넘쳐흘러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관용의 관계에서는〈다름〉이 차별의 계기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和而不同의 멋진 공동체가 들어섭니다. 다름이 클수록 아름다운 화음이 더욱 널리 울려 퍼지게 됩니다. 서로의 다름을 비난하고 질시한다면 어찌 오케스트라의 그 아름다운 화음이 가능해질 수 있겠습니까. 새길 공동체는〈다름〉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더욱 존경하게 되는 아름답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길은 관용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새길 식구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탐욕과 독선에 충실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자기를 비워 남들에게 양보하고 경쟁에서 남에게 지려는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경쟁에서 우아하게 지기로 작정한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려고 애쓰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자신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신들이 모여 공동체가 이뤄지면, 서로 은혜롭게 지려고 하기에 그곳에 아름다운 선순환의 공동체가 이뤄질 것입니다. 새길이 그래서 밝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길에서, 우리는 예수와 그리스도와 바울을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길에서,〈영적이지만 종교적이 아닌〉길벗 예수를 만나게 되고, 우리의 영의 눈이 뜨이게 되면서 마침내 우리는 좌절에서 분발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증오에서 관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길에서, 아빠 하나님의 영을 만나게 되고, 스스로 비우면서 남을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주는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넘쳐흐르는 관용의 잔을 함께 마시게 될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기쁨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새 길의 비전이요. 그 비전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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