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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두드리는 소리-마음된 교회-를 위하여

빌립보서 한완상............... 조회 수 1672 추천 수 0 2008.09.29 13: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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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5-1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12.17주일설교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기에 그렇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마음을 올곧게 알아내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인물을 따르는 제자들은 좌파로 그리고 우파로 갈라지게 되지요.

  예수의 마음읽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을 기리는 이 계절에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우리 가슴으로 깨닫는 일에 분주해야 할 터인데, 예수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은 아예 실종되고, 그 자리에 천박한 상업문화가 들어선 것 같습니다. 온갖 세속적 크리스마스의 축제 속에서 예수 마음은 증발되고 대신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리는 상업적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기야 기독교 역사와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할수록,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신자일수록 예수의 마음을 알아내는 일에 실패한 듯합니다. 제도교회의 역사적 행적과 행태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마음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에 대한 신학과 교리를 근거로 하여 교권을 휘둘렀던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고, 억압당하고, 마녀로 사냥 당하는 일이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예수마음보다 교리와 교권에 더 관심이 컸던 종교지도층에 의해 예수님이 끊임없이 시달려온 것이 바로 교회 역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같은 교회와 기독교의 행태를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셨으며 지금도 탄식하리라 생각됩니다.

“너희 기독교 신자들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이제 또다시 예수 탄생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 생일은 예수의 참 마음을 올곧게 이해하는 날이 되어야합니다. 왜 예수가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 분이 오시어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가치 있는 삶과 유익한 죽음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적어도 이맘때가 되면 심각하게 우리자신에게 물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탄생을 진심으로 기리고 축하하는 뜻은 그의 마음을 올바르게 알고, 그 뜻에 따라 우리도 살겠다는 다짐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의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새삼 주목해야합니다.

  이 본문은 유명한 기독론(Christology)의 구절, 곧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의 본뜻을 잘 나타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회자되었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마음에 대한 신앙적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예수마음의 주요 특징이 무엇인지 새삼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마음은 자기 낮춤입니다. 원래 예수는 하나님의 형태를 지녔습니다. 그 형태는 시간에 따라 쉽게 변화되는 구름 같이 변형되기 쉬운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에 가까운 형태기에 본체라고 해야겠지요. 예수는 자기 속에 신성(神性)을 본질로 지니고 있었다고 초대 교인들은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마음은 이 신성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성을 짐짓 드러내거나 자랑하거나 광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가 하나님과 동등함을  낙아 채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데도 동등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의 진정이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충동에 빠져 사탄의 유혹에 빠졌던 아담과 이브가 예수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점이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탐하는 모든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 곧 우리 인간들과 예수가 다른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차이에 주목해야 합니다. 神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과,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神간의 엄청난 차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神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은 한 마디로 엄청난 고통을 다른 인간들에게 끼치는 추악한 존재입니다. 독재, 독선, 독주를 즐기면서 다른 인간들에게 절망과 고통과 죽음을 안겨다 주지요. 히틀러 같은 인간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존재입니다. 이런 神은 <사람의 일> 곧 人事를 즐겨하는 겸손의 신입니다. 人事는 서로 몸을 낮추어 남을 높일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몸짓이지요. 서로 절하는 것이지요. 한문의 人이라는 글자는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어 타인을 존중하는 두 존재가 마주 서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될 때 서로 절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다운 일, 곧 人事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고파하는 겸손의 신은 사람들에게 절하고자 합니다. 절 뿐이겠습니까? 낮고 천한 사람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려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주셨지요. 예수의 神性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발바닥 같은 천민계급을 차별하는 계급제도를 정당화시키는 그 어떤 종교의 神과는 달리, 예수는 그 천민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들에게 새 존재에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마음을 지니신 지극히 인간적인 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낮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시는 예수의 모습, 낮아지시려는 예수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를 저 높은 곳, 저 거룩하고 거룩한 곳으로 쫓아 올려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경건한 예배의식을 통해, 그를 지극히 높디, 높은 곳으로 모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되고파하신 神이 얼마나 섭섭하고 불편해 하시겠습니까. 경건한 종교의식으로 자기를 왕따시키는 교인들의 모습,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경건하게 따돌리는데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시지 않겠습니까?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나.”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우리 곁에 조용히 다가오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神인 예수를, 친구 예수를, 섬기는 종 예수를, 우리는 따뜻하게 맞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그 분을 경건의 이름으로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의 진정을, 그 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그 낮춤의 마음을 말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마음은 자기비움입니다. 낮춤과 비움은 항상 함께 갑니다. 비움 없는 낮춤은 한낱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위선일 뿐입니다. 참 낮춤은 언제나 자기비움으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워야합니까?

  먼저 내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쁜 것을 비워 제거해야합니다. 탐욕과 독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이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는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공적 삶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탐욕과 독선의 시련을 몸소 격었습니다. 끝없는 물질적 욕구, 막강한 지배 욕심, 불사(不死)의 종교적 탐욕으로 시달렸지요. 만일 예수께서 이 시험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그의 공적 사역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그의 하느님다움은 이 같은  탐욕의 비움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의 대부분은 지도자들이 이같은 탐욕과 독선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같은 유혹에 함몰되게 되면 神처럼 행세하고파하는 추악한 인간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존재 밑바닥에서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는 탐욕, 독선, 교만의 달콤함을 비워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보내며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이 유혹을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도 잠을 못 이뤄 몸을 뒤척일 때, 무슨 욕심 때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불타는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집어 던져 활활 불태우듯, 내 욕심 하나하나를 영적 불 아궁이에 던져 봅니다. 명예욕, 물욕을 위시한 자질구레한 욕심들이 하나하나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모습을 내 마음속에 떠올리며 스르르 잠들게 됩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자기들의 서러움과 한(恨)을 중얼대며 쇠죽 끓이는 부엌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집어던져 넣듯 말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좋은 것은 어떻게 비워야하나요? 좋은 것을 비운다 함은 버림이 아니라 나눔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눔으로 비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동의 선순환이 작동됩니다. 비움과 나눔이 남을 채워주면, 감동의 파장이 일어나면서 채움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또 나눔을 통해 되갚거나 다른 남들에게 나눠줄 것입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회관계, 곧 평화의 관계가 들어서게 됩니다.

<비움-나눔 → 채움 → 감동 파장 → 서로 채움>  
  이렇게 평화만들기 작업이 선순환으로 작동되지요. 이것을 작동 시키는 원동력이야 말로 예수의 본심인 사랑의 힘이지요.
  저는 이런 선순환의 힘을 제 아내와의 관계에서 느낍니다. 아내는 때때로 어깨와 등이 굳어지는 아픔을 하소연합니다. 파스 같은 현대 의약품으로도 쉽게 낫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10여 년간 매일 아침 빠짐없이 간단한 요가 동작으로 몸을 풉니다. 그 동작 중에서 손가락을 세워 30번 푸시업을 하는 동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손가락 끝은 단단한 편이지요. 그런데 아내의 등이나 어깨의 딱딱해진 부분을 지압하게 되면, 제 어깨가 아파오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아내가 가장 아픈 곳, 가장 딱딱하게 굳어버린 부분을 누를 때마다, 내 위는 격동합니다. 저절로 껄껄하는 위용트림의 소리가 나오게 되지요. 아내는 내 위의 용트림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바로 그곳이 아파요. 그곳을 더 세게 눌러주세요>하고 소리 지르지요. 한 10분 지압하고 나면, 내 손가락 끝은 빨갛게 변하고, 때로는 검붉은 색깔로 변하는데, 그럴수록 내 위의 상태는 한결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내 힘을 비워 아내와 나누는 것이 따지고 보면 내 병을 고치는 일이 되지요. 이 때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아,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는 것이 극히 피곤 한 일이지만, 남을 낫게 하시므로 당신의 건강이 날로 더 좋아지겠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렇게 분주했음에도 그렇게 건강하실 수 있었구나.”

사실 성서 어느 곳에도 예수께서 친히 아프셔서 누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건강 비결은 나눔을 통해 남에게 건강을 주는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마음의 효능을 깨닫게 됩니다. 낮춤과 나눔은 감동을 불러 일으켜 채움과 서로 채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자아실현만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나음(치유와 건강)의 상태로 올라가는 효능을 낳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타실현(自他實現)의 효과이지요. 그리고 자기부정을 통해 남을 감동시키면서 서로 채움과 서로 살림의 효능을 낳지요. 이것이 바로 상생(相生)과 부활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 말입니다. 예수마음은 비움과 자기 부정의 힘이지요. 그래서 남을 살리게 되는 생명의 힘이지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같은 예수마음을 뜨겁게 깨닫고 받아들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의 마음은 그 철저함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철저하게 낮춤과 비움의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이 마음은 한두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고 나누고 비우는 긴 과정입니다. 정말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철저했을까요?

  그것은 착함이 마침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선(善)이 악과 마주칠 때 악의 방법을 활용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한 방법을 쓰는 순간, 선은 악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주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철저하게 낮춤과 비움을 실천하신 까닭은 악의 방법, 악의 전술을 끝까지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끝까지 힘없이, 맥없이 체포당하시고, 구금당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수모를 겪으면서 골고다에서 공개처형당하는 길을 선택하셨지요. 그가 체포당하실 때, 그의 수제자는 자기 스승의 안보를 위해 칼을 뽑아 적의 하수인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떨어진 귀를 말고의 귀에 붙여주시면서 자기에게 과잉충성한 수제자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오히려 나무라시고, 자신은 그 칼의 세력에 의해 죽는 길, 십자가의 처형 길로 의연히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처절한 패배요, 철저한 패배였지요.

  그러나 그 길이 바로 부활에 이르는 길이요, 바로 그 길이 참 평화로 가는 길이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가기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는 길에 놀라운 힘이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 우리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 경험을 들려 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신다면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1980년 초여름. 당시 중앙정보부 지하 2층(남산 소재)에서 초죽음이 되어 갇혀 있었습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거의 두 달 동안 지옥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몰래 훔쳐 읽었던 성서 말씀이 나에게 용기와 희망, 그리고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성서 읽기는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성서는 꿀맛같이 달다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던 저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사도행전 20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지요. 성서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자기가 3년간 공들여 섬겼던 예배소 교회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환난당할 것을 그들에게 알리고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것임을 알립니다. 20장 36-3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끓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그들은 배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는 순간, 나도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하염없이 소리내어 울고 싶었으나, 수사 받는 신분이어서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했지요. 내 몸은 비록 중앙정보부 지하2층 수사실에 갇혀 있었으나 내 마음은 바울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행에서 얻은 힘과 용기, 희망과 믿음으로 1980년, 그 긴 지옥의 나날을 이기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 길에서 바울을 통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뜨거운 힘으로 견딜 있었습니다. 同苦愛의 예수께서 십자가 길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와 자기의 힘을 비워 나눠주시면서 함께 걸어가는 同苦行의 벗이 되어 주시지요.

  이렇게 겸손하게 낮춤과 비움으로 철저하게 살았기에 그리고 죽었기에 마침내 예수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높이 영광을 받게 되셨지요, 그러나 그렇게 영광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셨다고 하여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신처럼 증오와 진노의 신, 복수와 심판의 神으로 군림하시지 않습니다. 더욱 겸손하게 엠마오로 가는 길에 찾아오시어 실망과 좌절에 빠졌던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을 주셨지요.

  크리스마스를 맞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셨으나 저 높은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다정하게 다가오시어, 완고하게 닫혀있는 우리 마음의 문을 당신 마음의 손으로 조용히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만나야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예수께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가져야합니다. 그 문 두드리는 주님의 손은 철저하게 자기 낮춤과 비움의 삶을 사시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손, 곧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힌 바로 그 상처의 손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 상처의 손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보고, 만지면서 울 수 있는 영의 가슴을 가져야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 예수 탄생의 뜻은 되살아납니다. 그의 탄생은 그의 뜻, 그의 마음, 그의 본심, 그의 진정, 그의 본질을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되는 환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주의 몸된 교회임을 자랑하는 기독교가 예수의 마음을 이해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이제 몸된 교회가 아니라 <마음된 교회>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낮춤과 비움을 죽기까지 실천하시어 마침내 부활에 이르게 되신 예수의 그 마음을 본받는 <마음된 교회>로 거듭나야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 존재의 문을 지금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소리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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