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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빌3: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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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장윤재 목사 |
참고 : |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새길교회 2007.7.15주일설교 |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에게는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 중에 교인들이 졸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총각 전도사님이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집을 정리하는데 부인의 짐 속에서 작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예요?’ 물으니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열어보면 안돼요, 알았죠?’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워낙 부인이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이 전도사님은 알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전도사님은 목사님이 되었고 어느 날 새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짐을 정리하는데 20년 전에 보았던 그 상자를 또 발견했습니다. ‘20년이나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서 상자를 열어봤습니다. 그 안에는 계란 3개와 현금 2백만 원이 있었습니다. 너무 궁금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부인은 절대 열어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 서운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좋아요, 말씀 드리죠. 당신이 저와 결혼한 후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내가 졸음이 오면 계란을 하나씩 모았어요.”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요? 20년 동안 겨우 세 번 밖에 안 졸았다는 말입니까? 근데 돈 2백만 원은 뭐예요?’ 잠시 머뭇거리던 사모님이 대답했습니다. “계란 판돈이요.” 오늘 예배 후에 계란 생각나는 분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길을 끊겼다 주저앉았을 때 새 길을 열어주고, 이제 끝이다 생각했을 때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바울의 ‘새 출발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빌립보서 3:10-14절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의 경주’라는 제목으로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은 사도 바울이 누구였으며 그가 어떻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됐는지 자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 율법적으로는 아무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직 그 목표에 다다른 것은 아닙니다. …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앞만 바라보고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며, 셋째는 목표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첫째,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운전하시는데, 자동차에는 주차 브레이크 혹은 핸드 브레이크라는 게 있습니다. 주차할 때 안전을 기하기 위해 뒷바퀴만 잠그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것을 풀지 않고 운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차가 앞으로 가기는 가는데 뒤에서 자꾸 누가 잡아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어디 고장 났나 싶어 계기판을 바라보면, 핸드 브레이크 장치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곤 쓴웃음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새 출발 시동을 걸었는데, 혹시 주차 브레이크 푸는 것은 깜박 잊고 액셀러레이터만 힘차게 밟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풀어야 할 것들을 풀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분들은 없습니까?
언젠가 한 신문에 재밌는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전북 익산에 사는 한 70대 행상 할머니가 예금통장을 만들 줄 몰라 6백 53만원이나 되는 현찰을 항상 머리에 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70살이던 강복순 할머니는 2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어렵게 행상을 하며 그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누가 훔쳐 갈까봐 보따리에 싸서 항상 껴안고 다녔다고 합니다. 밥 먹을 때도 깔고 먹고, 잠잘 때도 베고 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느 경찰관의 도움으로 이 돈을 은행에 맡기고 가볍게 행상에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도 이 할머니 같은 분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안전한 은행을 눈앞에 놔두고, 자나 깨나 무거운 근심걱정을 껴안고 사는 분들은 없습니까?
이사야서를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겠다(이사야 65:16).”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이사야 43:18-19a).” 여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과거에 머물며 꾸물거리지 말아라’(do not dwell on the past) 입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 머물며 거기서 꾸물거리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앞만 바라보고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이라는 단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맹수 조련사들이 사자나 호랑이를 훈련시킬 때 사용하는 특별한 도구가 있다고 합니다. 채찍이요?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아주 평범한 물건입니다. 간이식당 같은데 가면 볼 수 있는 ‘등받이가 없는 네 개의 다리로만 된 의자’(stool)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난폭한 맹수도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유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 의자를 들고 다리 쪽을 사자나 호랑이 얼굴 앞에 들이대고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맹수들은 이 의자의 다리 네 개가 각각 자신을 공격하려는 서로 다른 적인 줄 알고 극도로 긴장해서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에 여러 곳에 신경을 집중하다보면 정신이 나른해져서 일종의 마취효과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난폭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맹수를 길들이는 방법입니다.
새 출발을 할 때면 사람들은 으레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엔 이것을 해야지, 저것을 해야지... 하지만 여러 계획과 소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인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토마스 케플러(Thomas Kepler)는 그의 명저 『성자와의 여행』(A Journey with the Saints)이라는 책에서 성서와 역사에 나타난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시간의 중심을 언제나 하나님께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결코 서둘거나 바쁘게 살지 않았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의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사람아 …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셋째,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가기. 사도 바울은 자신을 달리기 운동선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육상경기가 주축이 된 ‘이스트미안’이라는 경기가 실제 있었는데, 그는 그의 서신 곳곳에서 신앙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린도전서 9:24).” 바울 서신은 아니지만 히브리서 12:1에도 이와 유사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신앙도 경쟁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인들은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살다가 교회에서 잠시 안식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신앙의 길은 구름 떼와 같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경주대회와 같다고 말입니다.
어느 여자 탤런트가 TV 신용카드 광고에 나와, ‘부자 되세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말이 굉장히 유행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마다 저한테 ‘부자 되세요’ 라고 인사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어느 목사님은 ‘진정한 부자’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10가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칼럼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혹시 자신에게 몇 개나 해당되는지 한 번 세어 보십시오.
(1) 친구의 일과 사업이 성공적일 때 마음이 흐뭇하고, 또 나보다 아름다운 친구의 용모에 샘이 안 나면 그는 부자이다. (2) 남을 위해 돈을 쓸 때 아까운 생각이 안 나면 그는 부자이다. (3) 아들이나 딸들이 보통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생각이 들면 그는 부자이다. (4) 식사 기도를 드릴 때마다 진심으로 그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면 그는 부자이다. (5)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새의 노랫소리가 귀에 크게 들리면 그는 부자이다. (6) ‘모자라다, 더 있어야 된다’는 생각보다 ‘이만한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라는 생각이 들면 그는 부자이다. (7) 남을 비판하는 횟수보다 축복하는 횟수가 더 많으면 그는 부자이다. (8) 현재나 과거를 후회하는 마음보다 그 마음이 내일이라는 집에 살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9) 바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10) 죽음에 대해 자신이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중에 진짜 부자는 몇 분이나 계십니까? 열 가지 질문 중에 자신 있게 다 예라고 대답한 분이 계십니까? 신앙의 길이란 바로 이런 부자가 되기 위한 경쟁의 길입니다. 신앙의 경쟁은 약육강식의 법칙과 정반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경쟁입니다. 저는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경쟁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부자가 되려는 경쟁이 아니라 교세를 확장하고 자기 교회의 몸집을 불리려는 일에 경쟁을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백 년이 넘었습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며,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도전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천 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준비라고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같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였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최근에는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5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 불교 신자는 3.9%, 천주교 신자는 74.4%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는 1.6% 감소했다고 합니다. 지난 1백 20년 동안 성장가도만 달려온 한국 개신교의 신도수가 처음으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1.6%를 숫자로 환산해 보니 ‘14만4천’ 명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14만4천’은 성서에 나오는 ‘휴거’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7:4, 14:1-3). 한국 개신교인수의 감소는 신학적으로 대단한 ‘종말론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종교가 아니라 다수종교입니다. 주류라는 말입니다. 이제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의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를 나의 ‘주’(Lord)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큰 보탬과 이득이 됩니다. 기독교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안전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습니다. 즉 매일 하는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신앙의 첫 감동도 사라져갔습니다. 이제 모두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밖에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토요일에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에 또 하려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이제 사람들은 ‘메신저’(messenger) 때문에 ‘메시지’(message)를 거부합니다.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종종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신학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당한 슬픈 예수를 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에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 등이 자리를 대신 메워왔습니다.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I hear and I forget; I see and I remember; I do and I understand(나는 듣고 잊어버립니다. 보면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실천해 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저는 단지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3:17)”이라는, 즉 신앙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말 속에는 여전히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마치 각각의 것인 양 전제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처럼 살기가 예수 믿기의 ‘인식론적 근거(epistemological basis)’가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My name is Christian.” 그때 그는 그의 부모가 그에게 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게 만든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건 이름이었습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인격자’라 지탄을 받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바로 이런 ‘크리스천’들이 많지 않아서입니다. 예수처럼 살려는 진정한 신앙의 경주가 없어서입니다.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고 새로운 소명으로 부르십니다. 새 출발을 위해서 먼저 주차 브레이크를 풀고, 머리에 이고 다녔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앞만 바라보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선순위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주시는 그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뛰다가 넘어져도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새길교회가 기도하고 추구하며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은 참 멀고 험한 길이지만, 그 길에서 넘어지고 혹 상처받기도 하겠지만, 하늘에서 주시는 상 바라보며 힘차게 일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 때 암벽등반을 즐긴 적이 있습니다. 가끔 북한산 향로봉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잡을 곳이 전혀 없어 보이는 딱딱한 바위도, 가까이 가서 보면 반드시 작은 틈새라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틈새가 없는 바위는 없습니다. 작은 틈새라도 있는 한 그 바위산을 오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습니다.
우리들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힘차게 달려가 봅시다. 우리의 가는 길이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을 지라도 우리 모두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이사야 43:17b-19).”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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