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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빌립보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03 추천 수 0 2009.07.29 12: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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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3:2-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88 

   emoticon                                                         
오늘의 본문만을 놓고 본다면 이 편지를 쓴 바울은 매우 과격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2절에 "개들을 조심하십시오"에서 볼 수있듯이 어떤 대상을 모독적으로 발언하고, 웬만하면 개인적인 언급을삼가야 할 대목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진리를 논리적으로 펼치는 게 훨씬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어떤 사안을 다룰 때 한 개인이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리가 감안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이렇게 감정적 표현이 오히려 본래의 진리를 훨씬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도 바울의 인간적 약점을 드러냈다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설명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할례당

바울이 이렇게 흥분한 어조로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소위 '할례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 된 남자아이들에게 할례를 시술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할례는 단순히 할례라는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모든 율법을 의미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매우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기야 믿지만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그 중에서도 할례만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가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혼란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런 할례당, 율법주의자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이 개역성서와 루터역본에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 '사르크스'를 의역한 세속적이든지, 아니면 직역한육체적이든지 그 의미는 똑같습니다. 여기서 세속적이라는, 또는 육체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이지 않다거나 거룩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통 우리는 성속 이원론에 근거해서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세속적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의미로 이 사르크스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영역 안에서 육체적인, 세속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책망합니다. 바울에게는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통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종교 영역에 속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훨씬 심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예 근본적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종교인들은 그런 군사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나라와 나라의 충돌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모든 인류가 나라, 인종, 언어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국가 이념과 종교인들의 세계평화 이념이 충동할 때 우리는 그 해결의 길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양측에 문제가 없다기보다는 문제 해결의 방식이 서로 다른 데 있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는 오히려 작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양측이 모든 인간의 생명과 존재의 신비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입장 차이를 쉽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는 그런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끼리 참된 대화가 막힐 때가 많듯이 같은 종교라는 범주가 그들의 생각을 닫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큰 충돌을 빚은 사람들이 같은 종교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애거리

바울이 말하는 세속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무슨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그런 세속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파렴치하다거나 폭력적인 부도덕한 일들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매우 고상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허약한 토대를 분간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도 세속적인 자랑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5,6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고, 율법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그 종교적 열정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요소들은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성취하고 싶어하던 것들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적용시킨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위 공직자, 변호사, 판사, 의사, 대학 교수의 위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또는 세계 일류 음악가가 되었다거나 골프 선수가 되어도 인정을 받습니다.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나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이 되는 것들이 모두 이런 가치에 속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래서도 모든 삶을 그쪽으로 진력하고 있는 그런 세속적 업적을 바울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격이 파탄 지경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 규범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종교적열광주의에 빠져서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근본적으로 폐기하려는 것일까요? 여러분, 바울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는 정신이 누구보다도 말짱한 사람입니다.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랍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눈에도 인간이 쌓아온 예술과 문화는 아름답고 나름의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 문명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 정권의 힘을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한 바울이 세속적인 가치를 그렇게 낮추어 보는 이유는 그런 요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일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7,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바울은 매우 과격하게 표현했습니다. 지난날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겼던 모든 세속적 가치들을 이제는 쓰레기로 여긴다고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난감합니다. 바울이 허튼 소리를 할 까닭이 없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버리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존경받으며 살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성취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고 말입니다. 조금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가치들을 쓰레기로 여긴다는 바울의 언급은 좀 왜곡되거나 지나친 게 아닐까요?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가 아닐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 이외의 가치들을 쓰레기처럼 여긴다는 바울의 논리는 절대의 세계에서는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이 거의 똑같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밑으로 여러 요소들의 서열을 매깁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훨씬 가깝고, 사회 봉사가 그 다음이고, 예술이 그 다음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말고는 모든 것들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흡사 사랑의 열정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 이외의 사람이 모두 똑같이 시시하게 보이듯이, 또는 그림의 절대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그 이외의 것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이듯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계에 들어간 바울에게는 그 이전에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이 시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기 성취를 토대로 한 세속적인 가치들이 이렇게 시시하다는 바울의 진술을 대충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파악하고 크게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게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건이며 절대적인 세계라는 사실도 어떤 점에서 우리의 일상에서는 추상적으로 들릴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인식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믿는 척 할 뿐이지 실제로 그런 세계를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언급을 봅시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9절).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힘을 쏟으며 이루려고 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자기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수고함으로써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성취하는 게 아니라 그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미 자기의 지난 삶을 통해서 절대적이지 못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인 세계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깨달음을 정확합니다.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과학을 생각해보십시오. 오늘의 인류는 고대인들에 비해 엄청난 과학적 진보를 이루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갔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1억 년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교회 생활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종교적 업적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절대적인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당을 짓는다거나 선교사를 보내는 일들도 오늘 바울이 쓰레기처럼 여긴다는 세속적인 가치에 해당됩니다. 그런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라, 이런 업적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 밖과 교회 안의 이런 일들을 통해서 절대적인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 만족감에 도취하거나 또 다른 욕망이나 허무가 찾아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절대적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주어지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부르짖을 정도이니까 우리의 이 땅에서는 완전한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런 구원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 약속을 확신하는 사람은 곧 희망의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절대적인 세계가 완성되기 이전인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그런 희망이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또는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그 희망은 현실이 됩니다. 이런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더구나 그런 일에 대한 자랑은 부질없는, 그래서 쓰레기 같은 일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신앙의 깊이와 신비에 우리가 함께 참여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참된 자유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2004.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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