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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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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64065 |
바울은 빌립보서 3:4-6절에서 바울답지 않게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랑하는 항목이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할례,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유대교에 대한 열심, 율법의 의가 그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는 타고난 것이고, 다른 세 가지기는 획득한 것입니다. 바울은 선천으로나 후천적으로 엘리트였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로 나열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해보일 겁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황에 설명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서 유대교와 다른 입장을 보이는 기독교를 앞장서서 박해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스데반의 순교 뒤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할례파와 논쟁
바울이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자기를 자랑한 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을 전하는 이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이단이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의 평화와 화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단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 그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많은 편지를 썼지만 여기 외에서는 이런 욕설을 쓴 적이 없습니다. 바울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개들이라고 표현한 이들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는 유대교인들인데, 지금 빌립보 교회에서 그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궁금할 겁니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속사정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유대교와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안에 유대교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종교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한 종파로 자리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적인 특색이 강해졌지만 유대교적인 신앙이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유대교적인 신앙을 끝까지 고집했던 이들을 가리켜 할례파라고 합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고수했습니다. 자기들 전통대로 사는 거야 누가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의 삶은 바로 이 할례파, 율법주의자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싸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역사적인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겁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런 이단 논쟁의 한 장면입니다.
할례파의 특징은 물론 태어난 지 팔일이 되는 유대인 남자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율법 준수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과 정신과 종교의 요체가 바로 율법에 있습니다. 바울이 할례파를 거부한 이유는 율법의 본질이 육체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의 업적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전히 자기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업적만 믿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만 그 믿음의 토대를 바로 자기의 행위에, 자기의 업적에 놓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런 긴장은 지금의 교회에서도 여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기 때문에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예배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헌금도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모두 자기에게 가 있습니다. 자기의 종교적 행위에, 즉 자기 의에 만족할 뿐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것과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를 신뢰하는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구별하기는 더 어렵지만, 자기 자신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한국교회의 종교적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중세기 유럽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면서까지 베드로 성당건축에 열심을 내듯이 한국교회도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많은 경우에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행위가 종교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는 많습니다. 많은 교단들이 지금 총회장 선거나 신학대학교 총장 선거로 서로 간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 안에서의 싸움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일반 법정으로까지 나가는 일들도 많습니다. 신학적인 진리 논쟁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타산이 걸린 싸움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보이는 많은 열정들이 결국은 육체에 대한 신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신앙행태는 결국 지금 바울이 이단이라고 본 할례파의 그것과 똑같습니다.
참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신뢰를 구분하기 힘든 이유는 육체에 대한 신뢰가 표면적으로 매우 그럴듯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도 속고 자기 자신도 속습니다. 바울이 자기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다면서 나열한 자랑거리를 다시 보십시오. 할례로부터 율법의 의에 이르는 여섯 가지입니다. 이걸 우리의 경우로 바꿔보십시오. 세례,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십일조, 새벽기도회, 선교 활동, 이단 박멸 등등, 모든 종교적 직책과 행위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인정받듯이 할례파의 행위들도 당시에 모두 인정을 받았습니다. 모두 귀한 전통들이었습니다. 은혜로운 것들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빌 3:7) 왜냐하면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자기에게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이제는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7절과 8절에서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8b절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익하던 것들은 무엇인가요? 학력, 경력, 자격증, 요즘 젊은이들이 매달리는 소위 ‘스펙’일지 모르겠군요. 그것을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바울의 말이 실제로 설득력이 있을까요?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는 말은 아닐까요? 단지 종교적 수사가 아닐까요?
우선 바울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가 율법주의자들인 할례파와 싸웠다고 해서 율법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실정법이 없으면 한 국가와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하듯이 율법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의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원래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에서 교회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경고했습니다. 그런 열광주의는 무(無)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열광적 은사에만 치중했습니다.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극과 극이 통하듯이 결과적으로 서로 똑같은 오류에 빠졌습니다. 양쪽 모두에게서 복음의 본질은 훼손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할례파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극단적으로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
유익하고 덕스러운 가치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말을 실제로 삶에 적용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별로 또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려면, 그래서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자리를 위협하는 경우에 그것을 가차 없이 잘라낼 수 있으려면 절대적인 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불교계의 어른이셨던 법정이 자기의 모든 책을 절판하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말의 빚을 다음 세상에도 지고가기 힘들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기 위해서 모두들 몸부림을 치는 마당에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절대적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의 경우에 그 절대적인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장 고상하다고, 즉 가장 숭고하다고 말합니다.(빌 3:8) ‘그노시스 크리스투’, 즉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가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은 생명을 얻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역사와 인류 역사 전체를 돌아보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안간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죽습니다. 결국 모두 사라지고 죽는다면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항해하던 우리가 난파당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구명정이 앞에 있다면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구명정에 올라탈 생각을 하겠지요. 그 순간에는 구명정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난파를 당했고, 예수라는 구명정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인식하는 것에 ‘올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모든 것이 죽는다는 사실과 부활 생명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별로 또렷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경계하는 할례파의 뒤를 따릅니다. 우리의 육체를 신뢰합니다. 복음에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삶에 안주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살아갈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을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환상 중에 경험했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교적인 인식과 헬라 철학적인 인식, 그리고 로마법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랐고, 종교적으로도 고도로 높고 신비로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가 절대적인 인식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사실을 그는 빌 3:12-14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각각의 절이 똑같은 뜻입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부활 생명을 완전히 얻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의 비밀을 완전히 인식한 것도 아닙니다.
이와 달리 할례파는 자신들의 할례와 율법으로 완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완전은 성서적 용어로 ‘의’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 18:9-14절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달리 부도덕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선한 행위가 많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자기의 완전한 의에 대한 감사행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율법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테오스 크리스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빌 3:9) 이런 점에서 그노시스 크리스투와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일치합니다.
인식과 믿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지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풍토에서 신학 무용론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에 따르면 할례파의 율법주의에 빠져듭니다. 할례파의 특징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육체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통치에 대한 인식은 간 곳 없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만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집니다. 어떤 교회의 예배와 설교 장면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인 현상이 반복됩니다. 말이 되던 않던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관심이 있을까요? 그 인식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물론 여러분은 그렇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나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제로 그런가요? 그것을 제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확신하기 힘들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잡은 예수가 누군가요? 그를 인식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까? 여러분은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실제로 그것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까? 이것이 곧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주님이 주시는 질문이자, 곧 대답입니다. 아멘! (사순절 다섯째 주일, 3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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