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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1: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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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
“침묵 깨기”(Breaking the Silence)
--빌립보서 1:20-21
1.
금식 기도를 시작하셨습니까? 무슨 금식을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금식하면서 회개해야 할 두 가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전도(evangelism)에 열심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교회가 더욱 열매를 맺는 데 헌신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계십니까? 금식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영적 갱신을 위해, 와싱톤한인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해, 그리고 연합감리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나 하나 빠지면 어떠랴?’라고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포토맥 강을 보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쉬는 날이면 Great Falls에 가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 봅니다. 지난 주간처럼 비가 많이 온 후에는 특히 그 도도한 흐름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 거대한 물줄기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웨스트 버지니아에 위치한 작은 샘물 Fairfax Stone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작은 샘에서 나온 물이 383마일 즉 616 킬로미터를 굽이굽이 흐르면서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거대한 물줄기가 된 것입니다. Fairfax Stone의 작은 샘물만 본 사람은 그 작은 물줄기가 포토맥 강을 만드는 첫 방울이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포토맥 강물을 바라 보면서, 그것이 멀고 먼 산골짜기의 한 샘물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이감이 듭니다. 거대한 강도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모여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어 죽어있는 영혼을 깨워 일으킬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그 비전을 바라보며, 나 한 사람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십시다. 캐머러 감독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금식기도 운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연합감리교회를 깨워 일으키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내 몫의 헌신을 다하십시다.
이번의 금식 기도의 초점은 전도에 있습니다. ‘전도’라는 말은 요즈음 아주 인기 없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단어를 들을 때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도하는 경향으로 인해 이같은 거부감이 만들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감화시키거나 감동시켜서 전도하기보다는 위협하고 협박하듯 전도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내면에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 음성을 애써 외면하고 거부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전도하려면 거부하게 되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단어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가장 큰 부담은 ‘해야만 하는 것을 아는데 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신앙 생활을 웬만큼 한 사람이라면, 믿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가 전도라는 점을 모두 인정합니다. 하지만 막상 전도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부담스럽고, 귀찮고, 번거롭습니다. 개인주의 사고에 깊이 빠져 사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귀찮은 일입니다. 게다가, 거부 당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는 거부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른 체 하고 사는 길을 택합니다.
2.
복음에 대한 이 무거운 침묵,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위험한 침묵’(dangerous silence) 혹은 ‘치명적 침묵’(fatal silence)이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 침묵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금식 기도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와지면.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총을 힘 입어 영적으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새로와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뭔가 간절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해 전도하자고 하면 필히 실패할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키우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을 잃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전도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나에게 참된 희망이 되고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준 ‘도’(道, the Way)를, 그것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전’(傳)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웨슬리 신학대학교 총장께서 초청을 하셔서 분당에 있는 만나 교회의 김병삼 목사님과 식탁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로 나눈 대화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후배 목회자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키우는 데 힘을 모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 중간에 김병삼 목사께서 자신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은 한 동안 과체중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성경의 원리에 따라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어떤 목사님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체중도 줄었고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그 목사님을 초청해 부흥집회를 해 보라는 겁니다. 제가 농담으로 여기고 웃었더니, 곁에 있던 사모님까지 합세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두 분 다 그 목사님의 건강 비법을 통해 고질병을 치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목회자들에게 일종의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저를 심하게 괴롭히는 고질병이 있었다면 솔깃해 져서 그 자리에서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게 전도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님을 치료했다는 그 건강 비법은 정통 의학계에서 보면 비웃을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이 그 방법을 통해 효험을 보았고 자신처럼 효험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주저함 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선전하셨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분의 눈빛이 반짝거렸고 얼굴에는 열정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체험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전도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컨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이유와 소명을 찾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절망하고 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삶에 영원한 차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살아오면서 얻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신음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하고도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간절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받은 치유를 그 사람도 받게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3.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전도는 가장 먼저 내가 전도를 하려는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하면서 쭈볏 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아쉬워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해 주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그 사람이 내가 전하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거부 당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거부 함으로써 손해를 보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보험 세일즈가 좋은 비교가 될 것입니다. 보험 세일즈를 하는 분들은 보험 가입 실적에 따라 정해진 커미션을 받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커미션을 위해 세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실패한다고 합니다.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를 턴다는 느낌이 들어서 항상 쭈뼛거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수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 가입자의 미래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보험 세일즈에서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론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느 보험 세일즈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고 일하려 해도 막상 낯선 사람 앞에 서면 주눅이 들었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자기 암시를 스스로의 마음에 보냅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미래를 위해 돕는 거야!’ 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일즈를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자신을 통해 생명 보험을 들은 20대 직장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보험금을 마련하여 슬픔에 빠져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전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보험을 들면서 써 놓은 쪽지를 전달했습니다. 그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이 돈은 어머님께 드리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노모는 그 돈을 받아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자, 그 보험 세일즈맨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일을 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전도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자신 없어 하는 이유는 나의 전도를 통해서 전도된 그 사람이 변화하고 새로와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음의 길에 들어서서 변화되며 그 변화로 인해 그의 삶의 빛깔과 열매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면, 전도에 대한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아쉬운 것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교세를 키우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으로 얻을 수 있는 확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확신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사 안에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증조 할머니로부터 할머니로 그리고 어머니까지, 여성만 3대째 믿던 가정이 마침내 아버님까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가족들의 신앙 수준은 다 각기 다릅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도 있고, 문지방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서 우리 가족이 경험한 영적인 축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내놓을만한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가족이지만, 영적으로는 나눌 이야기가 참 많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얘들아, 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너희도 엄마 아빠에게 물려받을 것 중에서 믿음이 제일 귀한 것임을 알아라.” 그랬더니 아들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것 말고 물려 줄 것이나 있나요?”
그 아이의 말이 맞을 지 모릅니다. 저에게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가보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들이 살아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다면, 다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재산도 물려주고 진귀한 가보도 물려 주었는데 믿음을 전하지 못했다면, 그 모든 유산이 오히려 타락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식만 그렇습니까?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에게 혹은 형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4.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그는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언제 끌려나가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신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바울의 삶의 동기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그렇게 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 입는 것,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 그분의 능력으로 그 소명을 이루는 것, 그렇게 하여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높여지는 것, 그렇게 살다가 죽어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는 것, 그것이 바울 사도가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의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므로, 죽는 것은 오히려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이 땅에서 추구한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바울의 표현을 빌어 여러분의 인생관을 요약하라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돈 버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골프다”라고 하시겠습니까? 혹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먹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게 되면, 그 다음 구절이 어떻게 이어질 것 같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돈 버는 것이니, 죽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니, 죽는 것은 실패입니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영원하고 참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사로잡히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에 대해 회개하는 이 기간에 먼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보고 그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고후 5:7)이 되십시다. 죽음 너머에까지 이르는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를 영원히 불태울 사랑을 품고 사십시다. 마지막 숨이 다할 때가지 삶의 의욕을 펌프질해 주는 진정한 소명을 따라 사십시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고, 그 고백이 진실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5.
복음에 대한 치명적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회복하고 그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요 보람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전도는 가장 먼저 전도를 받는 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만, 전도하는 본인에게도 더 없는 기쁨을 안겨 줍니다. 나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을 통해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자라가며 변화할뿐 아니라 그의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변모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때로 교우들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목회만큼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칭찬인지 동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목회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변하는 것을 보는 기쁨 때문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음을 가지면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더 없는 기쁨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정체되어 있다가 하나님을 체험하여 얼굴 표정이 변하고 삶이 변하며 가정 전체가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은 다른 모든 고민과 아픔과 상처를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입니다.
게다가, 잃어버린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혹은 다 큰 자식이 방황을 하다가 가출을 했다 합시다. 그 부모들에게는 잃어버린 자식 혹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외에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되찾아야 할 자녀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길을 잃었고, 어떤 자녀들은 반항하고 가출을 했고, 또 어떤 자녀들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간절히 찾으십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삶은 허비될 것이 분명하고 불행으로 끝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 있다면 자신이 전도하여 얻은 사람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살전 2:19-20)
그래서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감독님과 함께 하는 금식 기도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더 기도의 열기를 집중시키기 위해 ‘수요 금식 기도회’를 제안합니다. 12월 31일까지 적어도 3개월 동안 수요일 저녁 한 끼를 같이 금식하고 수요 예배에 참석하셔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십시다. 미스바에 모여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함께 모여 금식하며 기도하십시다. 금식하면서, 전도에 열매 맺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그동안 지켜온 무겁고도 위험하며 또한 치명적인 침묵을 깨뜨리십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 사도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 믿고 살아가도록 힘쓰십시다.
이같이 믿음을 새롭게 하고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다 보면,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고 전도에 대해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전도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늘에서 하나님은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누구에게서라도 이런 말 한 마디를 전해 들었다고 합시다. “당신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금식 기도를 통해, 나에게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립하고, 내 삶의 이유를 다른 이들에게 담대하게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거룩한 기쁨과 희열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도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사는 것이 오직 하나님 나라,
그 뿐이었던 주님,
저희를 깨워 주소서.
사는 것이 오직 주님,
그뿐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전부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살아
내 믿음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 다시 오실 때
그 앞에 내 놓을 이름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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