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빌3:12-15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서울 춘천고속도로에서
빌3:12-15
2009.8.16
서울 춘천고속도로를 달려 본 사람들은 대략 두 가지 이야기들을 합니다. 하나는, 정말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춘국도 만큼 아기자기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빠른 대신에 춘천에서 서울로 가는 동안의 재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서울로 가는 국도가 이전만큼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속도로를 좋아하는 것은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는 과정지향적인 도로가 아니라 목적지향적인 길입니다. 고속도로 위에서는 주변 경관이나 정취를 느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사고가 납니다. 그러니 죽어라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120으로 달렸느니 160으로 달렸느니 하는 것만 자랑하게 됩니다.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쉬는 곳도 아무데서나 쉴 수 없습니다. 정해진 곳에서만 쉬어야 합니다.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합니다. 정해진 몇 가지에서 골라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들은 거개가 비슷합니다. 오늘날의 인생들도 이 고속도로와 그 주변풍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고속도로위를 달리는 사람처럼 살게 만든 데는 교회도 한 몫을 했습니다. 가다가 쉬거나 곁눈질하는 것을 곧바로 죄악시 했으니까요. 교회는 주장합니다. 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앞만 보고 달리라고 말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꾹꾹 참고 절제하며 달리는 삶만이 모범적인 삶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바울의 말은 이런 제시를 뒷받침 하는 증빙자료로 쓰이곤 했습니다.
빌립보서 3:12-15을 읽는다.
얼른 보기에 이 구절들은 정해진 목표를 위해 달음질하는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맨 끝에 나오는 ‘성숙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그 요점이 됩니다. 바울이 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빈정대는 의미로 말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무작정 달린 사람들을 빈정대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거슬러서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걸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이며 구원받은 존재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목표에 다다른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와 같은 율법을 지키는데서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과 같이 지금 여기서 성령을 받고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미 구원이라는 목표에 이르렀다고 확신하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3:5을 보세요.
“개들을 조심하세요.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세요.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우리가 읽은 12-15절은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합니다. 목표만을 위해 치닫거나 이미 목표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게 아니다.” “내가 이미 목표에 도달 한 게 아니다.” “나는 아직 그것들을 붙들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면서 세 번이나 거듭하여 자신이 목표에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자랄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흠잡을 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이후로 이런 것들은 그에게 더 이상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었고 완전한 징표도 아니었습니다. 되레 그런 것들은 뒤로 하고 싶은 것들이 되었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상 받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표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바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것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삶의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은 오직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삽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나가는 중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것이든 소중한 양분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장애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삶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 번씩이나 강조하길 목표를 향해 ‘좇아가고 있다’는 또는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목표에 이르는 것보다, 선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 자체에 중요성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서울을 가는데 죽어라 달려 빨리 가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쉴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면서, 강과 산이며 바람을 느끼며 가겠다는 것입니다. 가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으며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걸 강조 하려고 현재형인 ‘좇아 간다’ ‘달려 간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목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바울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룬 게 별로 없습니다. 교회의 터는 놓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자신 높은 지위에 올라 편안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가정을 이뤘습니까? 자식 농사를 잘 지었습니까? 손수 노동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온갖 수난과 박해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것을 보건데 바울은 쉽게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목표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가 선한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가는 동안의 하루하루의 삶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피하지 않고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이 감옥이건, 매를 맞는 것이건 모두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이 ‘항상’이라는 조건이 따라다니는 감사와 기도와 기쁨이었습니다. 이게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감동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옥 안의 열악한 환경에서 쓰러져갈 때, 그 속에서도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처지에서도 살 수 있게 했을까요? 프랭클이 보기에는 살아남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프랭클도 아우슈비츠에 들어갈 때 소중한 원고들을 몰수당했습니다. 그러나 프랭클은 다시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종이 조각에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이 하루하루의 삶을 의미로 채워 주었고, 수용소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성취 할 것 사이에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여 사귀어야 한다.”
선한 목표에 사로잡히는 것은 중요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기다림, 노력, 고생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저 묵묵히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나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이 ‘항상 기쁨’입니다. 인생도 하나의 여행이라면 목적지를 향해 죽어라고 고속도로의 자동차 마냥 달릴 게 아니라 가는 동안 굽이마다 일어나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사건과 사물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