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죄수가 되어(As A Prisoner in the Lord)

빌립보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63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
성경본문 : 빌3:10-1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10월 23일 주일 설교 <60주년 기념 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3)>
“그분의 죄수가 되어”(As A Prisoner in the Lord)
--빌립보서 3:10-12

1.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틀란타에 있는 수양관에서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젊은 목회자 25명과 함께 <목회자 학교>(School of Pastoral Leadership) 첫 학기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National Association of the Korean American Methodists)의 현 회장단이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 바로 이 <목회자 학교>입니다.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목회자를 잘 준비시키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소수의 자원자들을 선발하여 년 2회, 한 주간 동안 초청된 멘토 목사님들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삶과 믿음을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학교의 책임이 저에게 맡겨져서 차영섭 목사님의 도움으로 첫 학기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교장으로서 그리고 멘토 중 한 사람으로서 그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지내고 보니 제가 오히려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작은 이민 교회에서 힘겹게 목회하는 분들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교회에 변화가 없고, 매 주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문제로 씨름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상황에 오래 머물다 보면, 심리적으로 병이 들고, 소명감은 소멸되고, 몸과 영혼은 지쳐 버립니다. 한 주간이나마, 휴식과 위로와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그분들에게는 생명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한 주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멘토들과 참여자들 모두는 흐려진 영적 시력이 회복되고 무뎌진 마음이 새로워지며 희망과 용기가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어 보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그 아픔을 알아주고 함께 고민해줄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한 주간의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교회는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주님의 거룩한 몸이며, 내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거룩한 몸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회복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입니다. 그냥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임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연합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듯,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고 동고동락하는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야 공동체가 됩니까? 두 세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20)

단지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것은 충분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수 때문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 안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때문이며, 모인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외형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영적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영적인 눈으로 교회 안에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왜 정기적으로 교회로 모입니까? 왜 적지 않은 돈을 교회에 드립니까? 왜 많은 시간과 노력을 교회에 드립니까? 때론 교회 일로 인해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왜 그럽니까? 때론 교회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배반을 당하기도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만일, 교회의 외형만 보고 교회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볼 때에 우리의 그 모든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거룩하고 영원하신 주님의 몸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럴 때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2.

16세기에 활동했던 스페인 출신의 수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깊은 기도와 묵상과 노동을 통해 건져 낸 주옥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분의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손”(You Are the Hands of Christ)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고,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없다”(Christ Has No Bodies)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 밖에는,
손도 없고, 땅을 밟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 밖에는,
당신의 눈으로 그분은 이 세상을 긍휼히 보십니다.
당신의 발로 그분은 선을 행하시려 이 땅을 걸어 다니십니다.
당신의 손으로 그분은 이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당신의 손이 그분의 손이요, 당신의 발이 그분의 발이며,
당신의 눈이 그분의 눈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 밖에는.
손도 없고, 땅을 밟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 밖에는,
당신의 눈으로 그분은 자비롭게 이 세상을 살피십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 밖에는.

우리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가치관과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 닮음’(Imitation of Jesus)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죄 씻음을 받은 후 성령의 선물을 받아 변화되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성품이 변화되며, 기질이 변화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며, 말버릇이 바뀌고, 사람 대하는 방법이 바뀝니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직업에 임하는 자세가 바뀌고, 투표하는 태도가 바뀌고, 장사하는 방법이 바뀌며, 취미도 바뀌고, 돈 씀씀이도 바뀌어야 합니다. 관심사가 달라지고, 고민하는 문제가 달라지며, 기도하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봅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예수 따름’(Following Jesus)의 길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두에 읽어드린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의 기도처럼, 예수님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 16:24)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기분, 자신의 취향, 자신의 혈기, 자신의 꿈을 따라 살아가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목표와 삶의 이유와 삶의 방향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자주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손해 보는 일이요, 힘겨운 일이며, 희생하는 일입니다. 그 같은 손해와 고생과 희생을 각오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려는 곳으로 가고, 그분이 고민하시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그분이 품고 계신 것을 우리의 기도의 품고,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보게 됩니다.

3.

잠시, 지난 한 주간 동안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다. 내가 지난 한 주간 동안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만남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나 나에게 필요하고 나에게 유익한 사람들만 만났던 것은 아닙니까?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손익을 계산하고 있습니까? 혹시나 그저 심심풀이로 혹은 재미 삼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까? 혹시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나의 필요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 때문에 만난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 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잘라 내어주기 위한 만남이 있었습니까? 나의 몸과 시간과 재산을 주님께 내어드려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사용하도록 내어드린 적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몸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내가 다녔던 장소를 생각해 보십시다. 어디 어디를 다녔습니까? 무엇을 위해 그곳에 갔습니까? 일주일 동안 내가 필요한 곳에만 다녔던 것은 아닙니까?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언제나 나의 필요만을 위해 달린 것은 아닙니까? 혹시나,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의 필요 때문에 달려갔던 장소가 있습니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쓰기 위해서 갔던 장소가 있습니까? 한 달 수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으로 사는 일을 위해 사용된 돈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의 몸이 하려는 일을 위해 드린 돈의 액수보다 내 자신의 유흥을 위해 사용한 돈의 액수가 더 많다면, 나는 주님을 따르고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돈이 그분의 돈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관심사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인정받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더 잘 될 수 있을까? 오직 나와 내 가족에 관한 관심사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한 관심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만일 내 마음 안에 ‘나’ 밖에 없다면, 나는 나에 갇혀 있는 죄수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진실하게 ‘주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내 마음은 주님께서 관심하시는 일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목회자 학교를 인도하는 동안,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가르치시다가 은퇴하고 아틀란타에 오셔서 교회를 개척하신 은사님을 만났습니다. 자녀 셋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기에 은퇴를 한 후에 아틀란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곳에 정착한 후, 그분은 아내와 함께 약 6개월동안 골프만 쳤다고 합니다. 은퇴자의 여유를 마음껏 누려 본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좋더랍니다. 걱정할 것 없고, 즐기던 골프를 마음껏 치고, 오후에는 집에 와서 푹 쉬는 맛이 꿀맛이더랍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지겨워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자고 나서 할 일이 골프 치는 것 밖에 없는 것이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삶에서 얻는 보람과 의미도 점점 고갈되었습니다. 그분은 결국,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에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6개월 동안 ‘나만을 위한 삶’이 얼마나 권태로울 수 있는지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4. 

지지난 주에 알링턴 지방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배 순서 중에 함께 읽는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찢겨지고 피곤해질 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 새로운 사랑을 주시며,
저희가 상처 받고 아파할 때 용서를 주시고,
저희가 ‘자신의 죄수’로 살 때
주님의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맛보게 하소서.

이 기도문을 읽을 때, ‘자신의 죄수’ 즉 ‘prisoners of ourselves’라는 문구가 마음에 화살처럼 박혔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잠시 침묵하는 동안,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감옥 중에서 가장 위험한 감옥은 자신이라는 감옥이지.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만 집중시키는 것이 자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일이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는 그 안에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불행한 선택이지! 오, 주님, 저로 하여금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침묵을 끝났을 때, 성경 봉독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나와서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 4장 1절부터 7절까지였습니다. 그 첫 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엡 4:1)

우리 말 번역으로는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나”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날 읽은 영어 성경은 “the prisoner in the Lord”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prisoners of ourselves”라는 말에 붙들려 있었는데, 곧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the prisoner in the Lord”라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저를 저 자신의 죄수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눈을 뜨자마자 “나는 주님의 죄수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이 글을 쓸 때, 바울 사도는 죄수로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나” 혹은 “주님 때문에 갇힌 몸이 된 나”라고 번역합니다. 그가 죄수가 된 이유는 단지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예배에서 이 말씀은 저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습니다. 방금 생각했던 “prisoners of ourselves”라는 말과 함께 대조가 되면서 “prisoner in the Lord”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죄수 된 여러분, 저도 한 때 자기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저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고 살았습니다. 저 자신만을 생각하고 저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감금시키고 제 자신을 처벌하고 있던 저를 주님께서 살려 주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주님 안에 나를 가두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죄수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죄수가 되지 말고 주님의 죄수가 되십시오.

바울 사도가 실제로 그런 뜻으로 이렇게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있는 죄수라고 고백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0-12)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수’로 살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죄수’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누구나 이렇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는 길이며, 자신의 삶을 진실로 풍요롭게 하는 길이고, 영생을 누리고 영생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그분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그분이 하고 싶은 것을 행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이끌림을 받아 그분의 몸이 되어 그분을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5.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그분에게 몸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로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받을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교회도 역시 ‘주님의 죄수’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수’가 되어 살아가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날, 한국과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혹은 목사가 ‘자신의 죄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의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께서 품고 계신 간절한 기도를 교회도 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위한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어둠과 거짓과 죽음에 속박되어 있던 이들이 깨어나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봄으로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되어 가는 이들이 한 몸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질서와 기쁨과 평화와 아름다움이 이 땅에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일들이 더 많이, 더 깊이, 더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주님의 죄수라면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전도와 선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께서 가려는 곳으로 교회도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셨습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 싫은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만일 교회가 낮고 어둡고 위험하고 냄새나는 곳을 마다한다면, 교회는 자신의 죄수로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께서 사신대로 살고 주님께서 죽은 대로 죽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세상의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찢겨져서 세상 사람들의 ‘생명의 빵’이 되었고. 그분의 피는 쏟아져 ‘생명의 음료’가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동안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죽을 때는 자신의 몸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교회가 주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일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초기에 활동했던 그레고리 맨틀(Gregory Mantle) 목사의 글, “네 몸을 나에게 빌려주지 않겠니?”(Wilt Thou Not Lend Me Thy Body?)를 읽어 드림으로써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시다.

네 몸을 나에게 빌려주지 않겠니? 나에게 준비된 몸을 입고 몇 년 동안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즐거이 행했다. 그 몸으로 인해 나는 병든 사람들, 지친 사람들, 죄에 빠진 사람들,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발 덕분에 슬픔과 죽음이 깃든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손으로 나병 환자의 몸을 만졌고, 장애 입은 몸을 만질 수 있었으며, 먼눈을 만져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입술로 내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고, 탕자와 같은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다. 그 몸으로 나는 세상의 죄를 나무 위에 걸 수 있었고, 그 몸의 제사로 세상의 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도 몸이 필요하다. 너의 몸을 나에게 빌려주지 않겠니? 수백만의 영혼이 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나를 찾고 있다. 저 건너편 해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사랑을 모르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다. 너의 몸을 나에게 빌려 주어 저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 찾아가 그들이 찾던 빛이 마침내 이르렀다고,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생명의 빵이 그들의 집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게 하지 않겠니? 나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득 채울 가슴이 필요해. 나에게는 온갖 부정한 것을 씻어낸 입술이 필요해. 그 입술로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묶인 자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치유를, 죽은 자에게 생명을 전하고 싶어. 그러니, 너의 몸을, 입술을, 손을, 발을 나에게 빌려줄 수 있겠니?  

6.

교회 설립 60주년을 지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몸을, 입술을, 손을, 발을, 시간을, 물질을 주님께 얼마나 내어드리며 살았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직접 발을 내어딛고, 주님께서 만지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어 만지고,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곳에 돈을 쓰는 일에 얼마나 잘 해 왔습니까?

저는 이 점에서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반성하고 회개하고 결단할 일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와싱톤한인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자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주님의 성품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비교적 잘 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의 바르고, 상식적이고, 법을 잘 지키며, 조용히 믿음의 길을 가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고,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손을 담그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일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모범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다른 교회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질서 있고 조화로우며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며 따라가는 일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교회 역사 40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 하나를 개척했습니다. 교회 역사 57년 만에 멕시코에 선교관을 하나 지었습니다. 매 년, 단기 선교를 행하고 있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에 선교와 봉사를 위한 조직이 있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 비해 보아도 그렇고, 우리 교회의 믿음의 수준에 비해 보아도 그렇고, 이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지나 온 60년을 감사하고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도전할 일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을 닮는 일도 지속해야 하지만, 주님을 따라 사는 일에 더욱 발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에게 사로잡힌 죄수가 되어 그분이 가고자 하시는 곳에 가고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오는 시간 동안에 우리는 더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떼어내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있어 진보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로 인해 기뻐할 것이며, 우리 교회를 계속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주님이시여,
저희를 결박하소서.
저희를 가두소서.
주님께 사로잡혀
주님 가시는 길로 가고
주님 품은 꿈을 품고
주님 하시는 일을 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주님처럼
저희의 모든 것을 내어주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5 빌립보서 예수의 길을 구하는자 빌2:20~22  김남준 목사  2012-07-23 5322
104 빌립보서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빌4:8-9  김동호 목사  2012-07-21 2188
103 빌립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빌2:5-11  한태완 목사  2012-05-24 4512
102 빌립보서 끝나지 않는 경주 빌3:12~14  김남준 목사  2012-05-20 2349
101 빌립보서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 빌3:10-11  이정원 목사  2012-05-07 1954
100 빌립보서 예수께 붙잡힌 교회 [1] 빌3:12-16  김동호 목사  2012-03-29 2825
99 빌립보서 望(망) 빌3:13-14  이정수 목사  2012-03-26 1799
98 빌립보서 忘(잊을 망) 빌3:13-14  이정수 목사  2012-03-26 2772
97 빌립보서 돌아봄과 기쁨 빌2:4  김남준 목사  2012-03-18 2171
96 빌립보서 두세 번 뿐인(?) 인생의 대박 기회 빌3:13-14  박신 목사  2012-03-09 2551
95 빌립보서 서울 춘천고속도로에서 빌3:12-15  허태수 목사  2012-03-08 2020
94 빌립보서 감사를 명하는 이유(Ordered to Give Thanks) 빌4:4-9  김영봉 목사  2012-03-05 4818
93 빌립보서 침묵 깨기(Breaking the Silence) 빌1:20-21  김영봉 목사  2012-03-03 2383
92 빌립보서 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십니까 빌3:17∼20  김학중 목사  2012-02-05 3082
91 빌립보서 성도가 누릴 기쁨 빌2:17~18  김남준 목사  2012-01-28 2493
90 빌립보서 욕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 빌3:1-12  김동호 목사  2012-01-24 2892
89 빌립보서 인생의 궁극적 목표 빌3:12-14  한태완 목사  2012-01-21 3608
88 빌립보서 사랑의 뿌리, 겸손 빌2:3  김남준 목사  2012-01-05 2303
87 빌립보서 오직 한 일, 앞에 있는 것 빌3:10-14  김경재 목사  2011-12-17 2383
86 빌립보서 기쁨과 관용 빌4:4-5  김남준 목사  2011-12-12 2018
85 빌립보서 봉선화 인생 빌2:13-14  박신 목사  2011-12-06 2042
84 빌립보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빌3:12-21  허태수 목사  2011-11-29 2773
83 빌립보서 버려야 삽니다. 빌3:8-9  한태완 목사  2011-11-27 2714
82 빌립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최고의 보물 빌3:5-9  김동현 목사  2011-11-17 2844
81 빌립보서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4:1-9  정용섭 목사  2011-11-09 2473
80 빌립보서 여생의 생활 원칙 file 빌3:1-3  김창인 목사  2011-10-30 1923
79 빌립보서 사명을 위한 분투 빌1:30  김남준 목사  2011-10-20 2281
78 빌립보서 복음은 싸움이다! 빌1:21-30  정용섭 목사  2011-10-13 2388
77 빌립보서 가장 고상한 지식 빌3:7-8  강종수 목사  2011-10-02 2068
76 빌립보서 나의 시민권 빌3:17∼21  조용기 목사  2011-08-06 2366
75 빌립보서 내가 왜 부족하겠는가? 빌4:19  이상호 목사  2011-08-03 1880
74 빌립보서 일체의 비결 - 자족 빌4:10-13  이상호 목사  2011-08-03 3255
73 빌립보서 살든지 죽든지 빌1:20-26  박노열 목사  2011-06-28 1804
72 빌립보서 응답의 보증 빌4:6-7  강종수 목사  2011-06-26 1934
71 빌립보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을 위하여. 빌2:12-18  김동호 목사  2011-06-25 2073
70 빌립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4:6-7  김동호 목사  2011-06-25 3345
69 빌립보서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는 삶 빌4:6-9  김필곤 목사  2011-06-23 2913
68 빌립보서 근심이여 안녕 빌4:6-7  한태완 목사  2011-06-12 2986
67 빌립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4:4-7  김동호 목사  2011-05-28 3692
66 빌립보서 희망3 -그래도 방법은 있다 빌4:10-14  김영봉 목사  2011-04-30 2254
65 빌립보서 자랑과 배설물 빌3:1-16  김동호 목사  2011-04-25 2427
64 빌립보서 무조건 감사하는 사람들 빌4:6  이정수 목사  2011-04-08 2298
63 빌립보서 우리를 깨우는 나팔소리 빌2:6-11  김영봉 목사  2011-03-30 2487
62 빌립보서 거룩해지기를 힘쓰라 빌2:12-18  오창우 목사  2011-01-09 2683
61 빌립보서 사랑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빌1:20-21  한완상 형제  2010-12-11 2206
60 빌립보서 천국 가는 길 빌3:10-12  강종수 목사  2010-12-05 2627
59 빌립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빌2:1-5  한태완 목사  2010-11-05 2235
58 빌립보서 知足(지족)하여 自足(자족)함의 유익 빌4:10-20  이정수 목사  2010-10-22 2877
57 빌립보서 淸貧(청빈=자발적 가난)의 즐거움 빌4:11-13  이정수 목사  2010-10-22 1976
56 빌립보서 목표를 정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걱정인가? 빌3:12-16  이정수 목사  2010-09-18 1969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