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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다(I Understand)

빌립보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280 추천 수 0 2013.07.25 21:00:54
.........
성경본문 : 빌2:6-11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2년 12월 23일 주일 설교
김영봉 담임 목사

연속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4)
내가 안다(I Understand)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Born of the Virgin Mary)
빌립보서 2:6-11

1.

Merry Christmas! 성탄의 은총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번 성탄을 특별한 충격과 고통과 아픔으로 보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Sandy Hook 초등학교의 총기 사고로 인해 생떼같은 자식들을 잃어버린 가족들도 그렇지만,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성탄을 지내야 하는 이들이 계십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그분들에게 특별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릴 적, 예수님에게는 신기(神氣)같은 것이 있어서, 우연히 그분의 몸에 부딪히기만 해도 목숨을 잃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놀기를 꺼려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다가도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슬금슬금 도망을 갔습니다. 어린 예수에게는 그것이 억울하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신기로 인해 왕따를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 안 마당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었습니다. 같이 놀고 싶었던 어린 예수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즐겁게 놀던 아이들은 예수를 보자 일제히 부엌으로 사라집니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그 집 안주인은 아이들을 얼른 아궁이 속으로 숨게 합니다. 안주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부엌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 예수가 나타나서 묻습니다. 방금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안주인은 시치미를 떼고 모른다고 잡아 뗍니다. 그 때, 아궁이에 있던 아이 중 하나가 콜록콜록 기침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예수가 안주인에게 묻습니다.

"저 소리는 뭡니까?"

안주인이 대답합니다.

"저희 집에서 기르는 염소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아궁이를 향해서 말합니다.

"염소들아, 이리 나오거라."

그 말이 떨어지고 잠시 지나자, 아궁이에서 일곱 마리의 염소가 '음매 음매' 울며 나왔습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염소로 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약 2백년 정도 후에 쓰여진 한 복음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생각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헐뜯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가 할 수 있는대로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그리기 위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작은 사건을 큰 기적으로 과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들 안에도 그러한 과장(exageration)과 날조(fabrication)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27권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제외된 책들을 읽어 보면,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정직했고 또한 냉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높이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두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하나님이었고 또한 진짜 인간이었다는 믿음을 정통 교리로 지켜 왔습니다. 한 사람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지만, 그렇게 전제하지 않고는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분에게 완전한 신성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분에게 완전한 인성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무시하면 우리는 이단 혹은 사이비에 빠지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 혹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2.  

여러분 중에도 이 문제에 대해 곤란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곤란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곤란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믿음의 도약을 하지 못한 분들은 주로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데 곤란을 느끼는 경향이 있고, 믿음의 도약을 한 분들 중에는 그분의 인성을 받아들이는 데 곤란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오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고백을 중심으로 그분의 인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 대부분은 선생님이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소변기 앞에 서서 물소리를 내고 있는 목사의 모습을 보고 혼란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 화장실에 앉아 끙끙 대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쨋든 그분은 보통 인간과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배설물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 소화를 하셨거나, 배설물이 나왔다면 향기가 났거나, 어쨋든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와 같은 진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왠지 그분을 깎아 내리는 것 같고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다름 없는 '진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복음서의 여러 기록 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분도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처럼 울기도 하셨고, 그분도 우리처럼 피곤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도 고난을 받으면 우리처럼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죽음의 현실 앞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하소연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2:17-18)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4: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진짜 인간이 되셔서 진짜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다만, 죄가 없는 분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기 때문에, 첫 아담 이래 모든 인류가 유전병처럼 앓게 된 원죄의 오염에 물들지 않았으며, 또한 이 땅에서 30년을 사시면서 우리와 동일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에 죄가 없는 오직 한 사람, 진정한 의인으로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두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인데, 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까?"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죄의 회개를 위해 베푸는 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셨다면, 그분에게 회개할 죄가 있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분은 죄 속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신 인류의 조상 즉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지만, 죄인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고는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에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죄인의 자리에 내려 앉은 것입니다. 요단 강에서 그분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인류의 죄를 위해 저를 드립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저의 어깨에 얹어 주십시오.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3.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에 기록된 '그리스도 찬가'를 읽었습니다. 이 찬가는 바울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초대 교인들이 고백했던 신앙 고백문입니다. 이 찬가는 성경에 기록된 고백문들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고백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찬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새번역이 개역개정판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의 핵심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비워 사람이 되셨고,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으며, 스스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아니, 우리보더 더 못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이름 없는 나사렛의 한 남자와 여자에게 태어나셨습니다. 가문으로 따지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분입니다. 태어날 때, 그분은 짐승의 우리에서 이슬을 피하고 짐승의 먹이통에 누워야 했습니다. 인간의 탄생 중에 가장 낮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험하게 태어나는 생명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탄생은 그보다 더 낫다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탄생의 소식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오늘로 치면 미국 땅에서 불법으로 체류하며 노동하여 조국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라티노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았을 뿐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하급 노동으로 여겨졌던 목수로 살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그분은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다음, 그분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난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 유혹은 보통 사람들이 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때로, "예수같은 분이 무슨 유혹을 받으셨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이 클수록 유혹은 더 강해집니다. 영적으로 깨일수록 유혹의 공격은 더욱 거세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강하고도 질긴 유혹을 직면하여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울기도 하셨고, 피곤에 지쳐서 곯아 떨어지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열광도 받아 보셨고, 군중들에 떠밀려 왕이 될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보는 사람들의 치를 떨게 만드는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사용하기 위해 선택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육신을 껍데기로 쓰고 나타난 하나님이었다면, 십자가는 지상 최대의 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셨고,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오죽했으면, 평소에 암송하시던 시편 22편의 첫 절을 사용하여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호소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고 종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셔서 당신이 하실 일을 다 이루시자 성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찬가는 이렇게 고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9-1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가장 작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렸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모든 인류의 주님으로 높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사건이요, 승천의 사건입니다.

4.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이런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을까요? 다른 방법으로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오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주님과 생사를 건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밤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집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과거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비로운 개입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셨다면 그런 방식으로도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정물에 손 담그지 않고 구정물에 빠진 물건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구정물 속에 던지셨을까요? 슈퍼맨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낚아채어 날아가듯 초능력을 발휘하여 구원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빠진 죄의 늪 속에 풍덩 뛰어들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딱 부러진 대답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잘 관찰해 보면, "아, 그래서 그러셨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 사는 동안에 여러 번의 전당 대회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1988년의 민주당 전당대회입니다. 그 대회에서 제시 잭슨(Jesse Jackson) 의원이 연설을 했는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잭슨 의원은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인해 위신이 추락했지만, 당시로서는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후계자로 각광 받던 때입니다. 그 때, 잭슨 의원은 연설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말합니다. "제시 잭슨, 당신은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당신은 저의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늘 잘 난 사람들과 다니지요.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의 상황을 당신은 이해 못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만 보지만, 진짜 나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백악관을 향해 뛰고 있는 것만 봅니다. 제가 어떤 집에서 태어났는지, 여러분은 모릅니다......

그 이후로 잭슨 의원은 자신이 살아 온 험한 인생을 하나씩 열거해 갑니다. 자신은 십대 소녀의 아들이며, 자신의 어머니도 십대 소녀의 딸이었다는 것, 부모에게 버림 받은 경험,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경험, 지독한 가난으로 인한 고생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중간 중간에 "제가 압니다"(I understand)라는 말을 후렴처럼 반복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울먹였습니다. 당시에 어렵게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저도 눈물을 훔쳐냈습니다. 전국민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오른 그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역경을 헤쳐 나왔다는 사실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잭슨 의원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가난이 제 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밤에 여러분이 어디 있든지, 여러분도 해 낼 수 있습니다. 머리를 곧게 세우십시오. 가슴을 앞으로 내미십시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어두워질 때도 있지요. 그러나 아침은 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믿음을 낳고, 마침내 믿음은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표를 이룰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뛸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해, 잭슨 의원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미국의 '명연설 100선' 안에 포함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미트 롬니(Mitt Romney) 후보과 왜 실패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지나친 부와 성공으로 인해 그가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미트 롬니가 미국 경제를 구원할만한 슈퍼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미국 경제를 살릴 슈퍼맨이 아니라 그들의 애환을 알아줄만한 지도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사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비유가 됩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의 한계와 처지와 아픔과 애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보고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구원자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려면 우리의 사정을 아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구원해 줄만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알아. 그러니 나를 믿고 일어나 가자"라고 이끌어 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참된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셔야 합니다.

6.

마지막으로 영상을 하나 보여 드리려 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400m 달리기 남자 결승전의 장면입니다. 이 경기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영국 육상 선수 데렉 레드몬드(Derek Redmond)였습니다. 총소리가 나자 그는 우승을 향해 질주했습니다. 그런데 150미터 쯤 갔을 때 갑자기 뒷다리 힘줄인 햄 스트링이 파열되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안전 요원들이 가서 도우려 할 때, 데렉은 뿌리치고 일어나 한 발로 경주를 계속합니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골인하고 난 다음입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고통을 참고 계속 깡총깡총 뛰어 갑니다. 안전 요원이 다시 만류하지만 그는 다시금 뿌리칩니다.

100미터 정도 그렇게 달렸을 때, 관중석에서 한 사람이 레인으로 뛰어듭니다. 안전 요원이 막아서지만 그를 뿌리치고 달려가 데렉을 부축합니다.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의지해 달리던 데렉은 마침내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웁니다. 안전 요원이 다시 다가서지만 아버지는 상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골인 지점을 통과합니다. 그 때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열광적인 박수를 보냅니다. 그는 그 경주에서 우승한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세계민들에게 안겨 주었고, 그의 골인 장면은 올림픽 역사 상 최고의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데렉의 아버지가 데렉에게 한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는 데렉이 당한 것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에게 초월적인 힘을 받아 쓰고 싶기도 하고, 기적적으로 부상을 치유해 주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돕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그분은 데렉의 아버지처럼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어깨를 부축하여 부상당한 다리로 경주를 완주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일을 다 치루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자는 이런 분입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사실을 확인하며 축하하고 감사 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기쁜 소식 즉 복음 중에도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들어야 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찌하시겠습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큰 스승 중 한 분으로 여기고 멀찌감치 서서 존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통해 지금도 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일으키시고 인도하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오시옵소서. 저의 삶에 오셔서 저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앞으로 몇 번의 성탄절을 더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간에도 35세 된 강철같은 아들을 심장마비로 보내야 했던 가정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몇 달 전에 큰 교통 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을 뻔 했습니다. 70이 된 아버지는 죽음의 경계선에서 돌아나오고, 35세 된 아들은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희생된 그 어린 생명들은 또 어떠합니까? 그 날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몇 시간 후면 반갑게 다시 볼 줄로 생각했던 것 아닙니까? 정말, 매일 목숨을 내 놓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분의 주권을 따라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다. 그것이 이 땅에서 참되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요, 언제든 닥쳐 올 수 있는 마지막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입니다. 이 결단과 고백이 없다면, 성탄을 일백 번 더 지낸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참 신과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참되게 살아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참 신과 참 사람되신 주님,
저희 곁에 오심을 감사합니다.
저희의 구원자가 되심을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 청합니다.
저의 베들레헴에 와주십시오.
저의 마굿간에 와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저의 구원자가 되어 주십시오.
아멘.
 

<속회자료>2012년 12월 23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4)
"내가 안다"(I Understand)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Born of the Virgin Mary)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122장(통 122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빌립보서 2장 1-11절을 읽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과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신 일을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그분이 참 신이며 또한 참 인간이었다는 교리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3) 당신은 "내가 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음성을 듣는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4) 예수님이 어떤 구원자인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보십시오. 
5. 기도
1)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구원자로 받아들이도록 기도하십시오.
2) "내가 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00장(통 406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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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5 빌립보서 예수의 길을 구하는자 빌2:20~22  김남준 목사  2012-07-23 5322
104 빌립보서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빌4:8-9  김동호 목사  2012-07-21 2188
103 빌립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빌2:5-11  한태완 목사  2012-05-24 4512
102 빌립보서 끝나지 않는 경주 빌3:12~14  김남준 목사  2012-05-20 2349
101 빌립보서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 빌3:10-11  이정원 목사  2012-05-07 1954
100 빌립보서 예수께 붙잡힌 교회 [1] 빌3:12-16  김동호 목사  2012-03-29 2825
99 빌립보서 望(망) 빌3:13-14  이정수 목사  2012-03-26 1799
98 빌립보서 忘(잊을 망) 빌3:13-14  이정수 목사  2012-03-26 2772
97 빌립보서 돌아봄과 기쁨 빌2:4  김남준 목사  2012-03-18 2171
96 빌립보서 두세 번 뿐인(?) 인생의 대박 기회 빌3:13-14  박신 목사  2012-03-09 2551
95 빌립보서 서울 춘천고속도로에서 빌3:12-15  허태수 목사  2012-03-08 2020
94 빌립보서 감사를 명하는 이유(Ordered to Give Thanks) 빌4:4-9  김영봉 목사  2012-03-05 4818
93 빌립보서 침묵 깨기(Breaking the Silence) 빌1:20-21  김영봉 목사  2012-03-03 2383
92 빌립보서 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십니까 빌3:17∼20  김학중 목사  2012-02-05 3082
91 빌립보서 성도가 누릴 기쁨 빌2:17~18  김남준 목사  2012-01-28 2493
90 빌립보서 욕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 빌3:1-12  김동호 목사  2012-01-24 2892
89 빌립보서 인생의 궁극적 목표 빌3:12-14  한태완 목사  2012-01-21 3608
88 빌립보서 사랑의 뿌리, 겸손 빌2:3  김남준 목사  2012-01-05 2303
87 빌립보서 오직 한 일, 앞에 있는 것 빌3:10-14  김경재 목사  2011-12-17 2383
86 빌립보서 기쁨과 관용 빌4:4-5  김남준 목사  2011-12-12 2018
85 빌립보서 봉선화 인생 빌2:13-14  박신 목사  2011-12-06 2042
84 빌립보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빌3:12-21  허태수 목사  2011-11-29 2773
83 빌립보서 버려야 삽니다. 빌3:8-9  한태완 목사  2011-11-27 2714
82 빌립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최고의 보물 빌3:5-9  김동현 목사  2011-11-17 2844
81 빌립보서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4:1-9  정용섭 목사  2011-11-09 2473
80 빌립보서 여생의 생활 원칙 file 빌3:1-3  김창인 목사  2011-10-30 1923
79 빌립보서 사명을 위한 분투 빌1:30  김남준 목사  2011-10-20 2281
78 빌립보서 복음은 싸움이다! 빌1:21-30  정용섭 목사  2011-10-13 2388
77 빌립보서 가장 고상한 지식 빌3:7-8  강종수 목사  2011-10-02 2068
76 빌립보서 나의 시민권 빌3:17∼21  조용기 목사  2011-08-06 2366
75 빌립보서 내가 왜 부족하겠는가? 빌4:19  이상호 목사  2011-08-03 1880
74 빌립보서 일체의 비결 - 자족 빌4:10-13  이상호 목사  2011-08-03 3255
73 빌립보서 살든지 죽든지 빌1:20-26  박노열 목사  2011-06-28 1804
72 빌립보서 응답의 보증 빌4:6-7  강종수 목사  2011-06-26 1934
71 빌립보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을 위하여. 빌2:12-18  김동호 목사  2011-06-25 2073
70 빌립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4:6-7  김동호 목사  2011-06-25 3345
69 빌립보서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는 삶 빌4:6-9  김필곤 목사  2011-06-23 2913
68 빌립보서 근심이여 안녕 빌4:6-7  한태완 목사  2011-06-12 2986
67 빌립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4:4-7  김동호 목사  2011-05-28 3692
66 빌립보서 희망3 -그래도 방법은 있다 빌4:10-14  김영봉 목사  2011-04-30 2254
65 빌립보서 자랑과 배설물 빌3:1-16  김동호 목사  2011-04-25 2427
64 빌립보서 무조건 감사하는 사람들 빌4:6  이정수 목사  2011-04-08 2298
63 빌립보서 우리를 깨우는 나팔소리 빌2:6-11  김영봉 목사  2011-03-30 2487
62 빌립보서 거룩해지기를 힘쓰라 빌2:12-18  오창우 목사  2011-01-09 2683
61 빌립보서 사랑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빌1:20-21  한완상 형제  2010-12-11 2206
60 빌립보서 천국 가는 길 빌3:10-12  강종수 목사  2010-12-05 2627
59 빌립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빌2:1-5  한태완 목사  2010-11-05 2235
58 빌립보서 知足(지족)하여 自足(자족)함의 유익 빌4:10-20  이정수 목사  2010-10-22 2877
57 빌립보서 淸貧(청빈=자발적 가난)의 즐거움 빌4:11-13  이정수 목사  2010-10-22 1976
56 빌립보서 목표를 정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걱정인가? 빌3:12-16  이정수 목사  2010-09-18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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