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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립보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42 추천 수 0 2013.12.20 23: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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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4:4-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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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4:4-9,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추수감사절),

2013년11월17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저 사람 설교하고 있네.’, 또는 ‘설교하지 마!’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별로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미국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중에는 설교자에 대한 게 많습니다. 설교자를 희화화하는 거지요. 설교자는 원하지 않는대도 자꾸 가르치려는 사람으로, 그리고 들어보나 마나 뻔한 말만 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설교가 잔소리나 자장가로 취급받는 겁니다. 이런 이미지가 기독교인들에게도 따라다닙니다.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들, 현실 감각이 턱없이 떨어지는 사람들, 또는 도덕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이게 근거 없는 비난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과의 관계가 애매합니다. 성경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습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성경을 진지하게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인 진정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제2독서인 빌 4:4-9절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실감이 가는지, 아니면 또 뻔한 소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요.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요? 기뻐하라고? 그거 좋지. 그런데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이야. 더구나 항상 기뻐하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 나는 삶이 기쁘지 않고 짜증스러운데, 그렇다면 성경과 완전히 반대로 사는 건가? 역시 이 말씀도 ‘좀 부담스럽군.’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옳다, 기뻐해야지,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지, 할 겁니다. 또는 그래, 나는 이 말씀대로 늘 기뻐하면서 살고 있어, 구원받은 게 너무 기뻐서 세상에 외치고 싶다, 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십니까? 좀 복잡하게 들리지요?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는 일단 확실한 것부터 정리하면 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정신병원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정말 많습니다. 이건 반드시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좋은 일들이 많아도 역시 항상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연관됩니다. 인간은 현실에서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실존이 그것입니다. 사업이 계속 번창하거나 자식들이 우리의 기대대로 잘 해도, 모든 것들이 자기 뜻대로 풀려도 참된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만족이 없으면 기쁨도 없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건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의 문맥을 잘 보십시오. 빌립보서는 기쁨의 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쁨을 강조하고 있긴 하나 그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5절에는 관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거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쁨, 관용, 염려 않음, 기도, 간구, 감사 등입니다. 기쁨을 제외한 것들도 기쁨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모든 덕목들은 기독교인의 일상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어떤 한 두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일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일상을 살아갑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하고, 또는 심하게 다투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배신당합니다. 결혼하고 자식 키우고 재산을 소유하고 이웃과 어울려서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가 산신령처럼 일상을 떠나서 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기독교적인 가치를 일상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열거한 항목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잘 보십시오. 4절이 말하는 기쁨은 ‘주 안’에서, 5절이 말하는 관용은 ‘주의 재림’에서, 6절이 말하는 모든 항목들은 ‘하나님’을 향한 겁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에 토대한 일상을 여기서 일일이 짚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상이 시시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뭔가 색다른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는 한눈을 파는 겁니다. 일확천금의 망상을 꿈꾸거나 권력을 향한 의지를 불태웁니다. 일상을 넘어서는 자극적인 일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바울이 기독교적인 일상의 중요성을 여기서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게 쉽다면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생활이 새롭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시해보입니다. 매일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지루해하듯이 신앙생활 자체를 지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4-6절에서 기독교인의 일상을 강조한 다음에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이라는 단어로 이 문장이 시작됩니다. 앞에 나오는 내용은 일종의 조건에 해당되고, 뒤의 내용은 그 결과에 해당됩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네가 영어 단어를 매일 10개씩 외우면 1년 안에 영어를 마스터 할 수 있을 거다.’ 학생에게 중요한 건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영어를 마스터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쁨, 관용 등등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7절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들을 지키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에이레네 투 데우’입니다. 평화는 구약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구원과 거의 같은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모두 평화를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평화 신학, 평화 윤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신학에서도 평화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번 WCC 10차 부산총회의 주제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해주십시오.)입니다.


교회도 그렇고, 인류도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평화는 요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역사라 할 만합니다. 노벨 평화상이 매년 주어지지만 세상은 여전히 전쟁 중입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평화스럽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무조건 싸우지 않는 게 참된 평화는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진리를 위한 투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승리주의에 의한 이전투구입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싸우는 일에, 자기 속을 끓이는 일에 모든 삶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말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상황도 사실은 그렇게 평화스럽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계속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빌립보서도 사실은 바울의 마음이 아주 복잡한 가운데서 쓴 겁니다. 빌 3:2절에서 그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그는 할례파와 싸웠습니다. 할례파는 당시 유대교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당시는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유대기독교는 가능한 유대교적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 반면에 이방기독교는 유대교적 전통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복음에 근거한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유대기독교인들 중에서 할례파는 극단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기독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강제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의 싸움에 지쳐 있었습니다. 빌 1:13절에 따르면 이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관용 운운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평화가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실존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그의 생각과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옳은 이야기일까요? 자기도취에 빠진 말일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평화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평화를 ‘모든 지각에 뛰어난’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다른 번역을 참고해서 보면 도움이 됩니다. 현대 영어성경은 “아무도 완전하게는 이해할 수 없는 평화”라고 했고, 공동번역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라고 했으며, 새번역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라고, 루터 번역은 “모든 이성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러 번역들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를 뛰어넘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걸 전제한다면 여기서 평화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할례파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고, 특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울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평화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이 사실을 한번 더 강조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화가 지켜주신다고 했고, 9절에서는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약간의 표현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두 구절 모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상식, 합리성,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는, 곧 평화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흔들리지 않고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우리가 단순한 상식, 합리성, 이성에만 묶여 있기 때문에 계속 흔들리면서 산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 바탕을 잃으면 우리의 신앙은 광신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정신을 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옳고 그른 걸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돈도 어느 정도는 벌어야 하고, 건강도 챙겨야 하고, 교양도 좀 있어야 합니다. 다 좋은 거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것만으로는 우리가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평화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속이 시원해질 뿐, 또는 분이 풀릴 뿐입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다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고 맙니다. 하나님 경험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성서 중에서 욥기는 특별한 책입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일컬어졌던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습니다. 재산과 자식과 명예와 건강을 모두 잃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큰 재앙에 빠진 욥에게 친구들이 와서 조언합니다. 욥에 불행이 닥친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니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라고 말입니다. 욥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큰 불행에 빠졌는지는 모릅니다. 그런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랜 논란 끝에 38장부터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이나 욥의 논란이 다 쓸데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능력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성을 경험한 욥은 이제 42:5,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고백 후에 욥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서 이전보다 더 복되게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욥의 하나님 경험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의 전통인 지혜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상식, 합리성, 이성으로도 해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논쟁으로 흔들리던 욥의 마음과 생각은 제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걸 그림으로 묘사하면, 육이오남북 전쟁 중에 피난길을 떠나는 한 가족의 어머니 품에 안겨서 젖을 빨면서 무한한 평화 가운데 있는 백 일 된 아이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오직 한 가지로만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지는 않는 경험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우리가 수없이 들었지만 그걸 실감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살아가는 데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관심사가 몇 개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열 손가락으로 모자랄 겁니다. 그런 게 많을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여러 가지로 염려하지 말라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만 추구하라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먹을 걸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어디 오늘 하루만이겠습니까. 매일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감사 행위는 종교적 형식에 머물고 맙니다. 감사한다는 말이 입술에만 머물고 그의 영혼을 감싸지 못합니다. 삶이 계속 흔들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천 년 전 감옥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에서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기쁨, 관용, 염려 않음, 기도와 간구로 채워지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을 충실하게, 진정성을 갖고 살아가보십시오. 그렇게 살면 상식, 합리성,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즉 평화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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