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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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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목표와 푯대를 뚜렷이 정하고 달려가세요
본문: 빌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개미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미떼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그토록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개미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잠시 사무실 창가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개미떼처럼 저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위해서 일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 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많은 재산을 쌓아둔 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 재산의 위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휘두르다가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복잡한 문제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갈등을 겪는 유가족을 대하면서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의 죽음 뒤에 이같은 복잡한 문제들과 갈등이 뒤따를 줄 알면서 죽어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그 사람이 평생 동안 달음질하여 얻은 것, 그것은 결국 “썩을 면류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불쌍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요, 몰랐다면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 어느 쪽이든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창밖에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저렇게 분주하게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 즉,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면 칠십 년을 아무 목표도 없이 삽니다. 그런 사람의 생활은 마치 산 위의 풀과 같이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합니다. 지조를 찾을 수 없고 의리와 절개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또 목표를 정하기는 정하지만 잘못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학생들은 지식을 탐구하며 열심히 공부하지만 지식이 방패는 될 수 있어도 일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일류대학입학, 결혼, 돈, 세상에서의 출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일시적이요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중에 해바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자란다고 해서 해바라기입니다.
옛날 인도의 왕이 중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주면서 이 그릇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온 성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죄를 사면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죄수는 온 정신을 그릇에 집중하며 복잡한 성 밖 목표 지점을 돌아왔습니다.
왕은 죄수가 정말 다녀왔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죄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왕은 그것도 모르면서 갔다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때 죄수는 분명히 말하기를 “왕이여, 나의 생명이 이 그릇에 달려 있는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그릇만 보고 다녀왔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야 임금은 죄수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죄를 사면했다고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곳곳에서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들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합시다. 오직 성경이라는 그릇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주바라기가 됩시다.
자신이 목표한 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의 푯대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의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참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 19181995)이란 여성 장거리 수영모험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950년에 당시 기록인 13시간 20분 만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수영해 건넜고, 1951년에는 16시간 22분 만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수영해 건넘으로 영국 해협을 양방향으로 수영해 건넌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1952년 7월 4일,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 섬에서 롱비치까지 34킬로의 수영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출발 후 15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몸은 찬 바닷물로 거의 얼었습니다. 게다가 짙은 안개로 건너편 땅을 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안내선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어들은 주위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그녀를 격려했고, 배 위에서는 어머니와 트레이너가 목표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목표를 800미터 남겨두고 포기했습니다. 몇 시간 후, 그녀는 방송 리포터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땅만 보였어도 저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거예요.” 실패의 제일 원인은 피로나 추위가 아니라 목표를 볼 수 없게 한 안개였습니다.
2달 후, 그녀는 다시 같은 코스에 도전했습니다. 그때도 역시 짙은 안개로 해안선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서 “땅이 저 건너편에 있다”는 목표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13시간 47분에 그곳을 건너 당시 남자 기록을 2시간이나 단축시켰습니다. 한 번의 실패를 통해 형성된 강한 목표의식이 성취의 동인이 된 것입니다. 성공은 실패의 옷을 거꾸로 입을 때 나타납니다. 성공은 운명보다 목표가 크게 보일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목표를 잃지 않고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때, 실패는 성공으로 변합니다. 뚜렷한 목표는 삶에 활력과 극복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까닭 없이 힘들고, 쉽게 지치고, 몸과 마음이 처진 느낌이 들 때는 목표를 새롭게 할 때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자신의 생애를 걸만한 목표와 푯대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분야에 관심은 많고 정보도 많지만, 소중하고 뚜렷한 목표와 푯대가 없습니다. 목표와 푯대가 뚜렷하지 않으면 잘 낙심하게 되고, 잘 기다리지 못하게 됩니다. 목표가 희미하면 유능함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유능함은 마음속에서 목표의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실패가 뚜렷해지고, 목표가 뚜렷하면 성공도 뚜렷해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요즘은 유치원생도 바쁘게 여러 학원을 뜁니다. 그런데 대개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냥 열심히 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목표 없이 뛰는 것은 낭떠러지를 향해 뛰는 것입니다. 땀과 성실은 인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유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 일시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시간과 정력을 다 소모하되 얻는 것이 별로 없는 후회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을 푯대로 정하고 인생의 모험을 실천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인생의 역사와 교회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사들과 성인(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바른 푯대를 향해서 달라간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좌나 우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일편단심으로 달려간다”라고 하였습니다.
푯대를 아직도 정하지 못하셨습니까? 정했다고 할지라도 흔들리는 것을 목표로 정하셨습니까? 이제 여기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인생의 참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영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인류사회에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장사꾼들이 큰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훌륭한 길잡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길잡이를 구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바다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 심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에 장사꾼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나에겐 처자식이 있네. 내가 죽으면 우리 노부모는 누가 모시겠는가 ?"
장사꾼들은 각각 살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우리중의 누구를 죽이겠는가. 차라리 저 길잡이를 죽여 제물로 쓰도록 함세"
그들은 곧 길잡이를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요행히도 파도는 멈추고 바다는 잔잔해 졌습니다. 그러나 길잡이를 죽인 그들은 얼마 안 가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방황과 굶주림으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길잡이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영적 길잡이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옳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날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옵소서.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지도 말고 희미한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고 숨겨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고 내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주님을 푯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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