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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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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6.15 주일 |
성공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빌3:12-15
수요 성서강좌를 벌써 여러 해 동안 하고 있습니다. 구약 새로 읽기, 신약 새로 읽기, 성서관통을 마치고 ‘바울 바울을 넘어서’를 끝내려는 시점입니다. 2시간 정도를 참아내는 신앙의 인내력도 필요하고, 역사, 철학, 정치사, 고전 등을 섭렵하다보니 어려워서 수요일에 안 나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요 강좌는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지는 일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본이 잘 다져지지 않으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주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기초가 없으면 뭐든지 제멋대로 즉, 편견과 선입견에 근거해서 움직이고 해석하게 됩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갇힌 것을 무식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러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발전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6월에 종강을 하고 두 달 숙고하면서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릴까 고민하려고 합니다.
신약성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바울서신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편견으로 읽고 자기식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중 하나를 같이 짚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쓴 13권의 서신서 중에 바울이 직접 쓴 편지들은 대략 7(롬, 고전, 고후, 갈, 빌, 살전, 빌레몬)권입니다. 그 중 한 권이 빌립보서인데, 우리는 오늘 빌3:12-15을 읽었습니다. 흔히 이 본문을 목표를 향해 인내하고 절제하며 앞만 보고 달리는 삶만이 모범적인 것이라고 해석하고 설교 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일반 도로를 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인데, 여러분도 아시지만 고속도로는 두리번거리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천천히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죽어라 내빼듯 달려서, 나는 몇 킬로미터로 왔다는 게 화제가 되는 길입니다. 뭘 보고 달렸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달렸는지, 가을이던지 봄이 던지는 상관없이 속도계와 시계만을 번갈아 보면서 달리는 길입니다. 과정은 중요치 않으니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빌립보서의 이 내용이 바로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강요받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맨 끝에 나오는 [성숙한 사람]이 누구냐 또는 어떻게 살아야 성숙해지느냐를 말하려는 게 바울의 의중입니다. 앞뒤 문맥을 볼 때 바울은 ‘앞만 보고 달리듯이 살아가는 고속도로 인생’을 반대하는 겁니다. 목표지향적인 삶,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만을 지향하는 태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해에 있어서 유대교는 목적지향적인 종교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걸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바울이 세운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신앙방향과는 다른 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교우들을 겁박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예루살렘의 히브리파 할례당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요한의 추천장을 들고 와서 바울이 혁신적으로 세워 이끌던 빌립보 교회를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부활 이후 예루살렘에 120문도가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고 그게 오늘날까지 갈등 없이 이어온 줄 알지만, 초기 예수 공동체 안에서의 서기 50-60년 상간에 많은 내분이 있었습니다. 그 내막에는 헬라파(스테판), 히브리파와 그 중에서도 헬라파가 득세하여 서로를 공격하고, 그 와중에 헬라파가 쫓겨나서 안디옥 교회를 만들고 거기에 머물면서 혁신적인 새로운 유대사상을 실현하려던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는 감사관을 보내 바울의 신앙노선을 비판합니다. 이대 바울은 안디옥을 떠나 고린도와 빌립보등지에 기존의 신앙행태와는 다른 공동체를 세우고 삶을 변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예루살렘 종교 기득권자들이 쫓아와서 자신들이야 말로 진짜 성숙한 사람, 바른 신앙인들로서 구원받은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우리가 정통이고 너희들은 이단이다’그런 겁니다. 여기서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은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와 같은 율법을 지키는데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 눈 팔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의 교우들은 바울의 혁신적인 가르침을 따라 형식과, 율법주의의 외형을 벗어 버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소한 삶의 과정 과정들을 하찮게 여기고 율법이라는 속도계와 시계만을 보고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가르침은 국도를 따라 서울을 가는 사람들처럼 두리번거리면서 그 찰나 찰나를 보고 느끼며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과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침은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론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한 눈 팔지 말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목표만을 위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예루살렘의 종교 기득권자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할 만큼 적대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악하다’고 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빌3:2) 이걸 쉽게 바꾸면 ‘앞만 보고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그렇게 죽도록 율법만 지키며 살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개와 같이 사람들이고 그 가르침은 악한 가르침이니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신앙하지 말라는 것인데 오늘날 우리는 그 ‘개와 악한 사람들의 선동’을 그대로 따라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하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앞에서 읽은 빌3:12-15은 이렇게 읽고 해석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앞만 보고 죽도록 달리거나, 목표만을 향해서 치닫 거나, 이미 목표에 이르렀다고 자만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이 아니다”,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세 번이나 거듭 자신이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과정에 충실한 것이지 목적만을 위해 찰나의 삶을 무효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아직 미성숙한 신앙의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이만큼 유대교도로나 예수의 추종자로서 완성된 사람도 없습니다. 3:5에 그는 이미 자신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삶의 방향성과 내용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도 한 때 목표만을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듯 앞만 보고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목표지상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는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내려온 겁니다. 하루하루의 삶 즉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속도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목표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 그에게 소중했던 것입니다. 만약 목표만으로 인생을 가늠한다면 바울은 실패자입니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고통만 당하다 허무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존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하는 겁니다. 성숙한 인간이란, 성숙한 신앙이란 목표로 사는 게 목표로 가는 과정을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 과정이 성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결과거 성숙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거지반 죽을 정도로 매를 맞습니다. 바울은 그 과정 자체를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그를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로 가꿔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이뤘다고 그 인간이 성숙된 건 아닙니다. 목표의 달성과 관계없이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이 한 존재를 완성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이걸 뒤집어서 읽고 설교하니까 오늘날 과정 없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인간세상이 된 겁니다. 오직 성공이냐 실패냐 만으로 인간을 판가름합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과정이야 어떻든 그 결과만으로 모든 걸 규정 지으려 합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나 기도로 살아야 할 종교가 매 일반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던지 교회를 짓고 사람이 많아지면 무조건 성공한 목회라고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과정으로 살 던지 부자가 되거나 출세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이게 당시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인식이었고 로마의 사회체제였습니다. 이른바 스토아철학이라는 겁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감동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악한 감옥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프랭클이 보게 됩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그게 궁금하지 않았겠어요? 가만히 그들을 관찰해 보니까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삶의 찰나찰나 즉 과정을 소홀히 내던지지 않고 살 더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랭클은 자신도 감옥 속에서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순간의 사건과 감정에 의미를 지우며 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죽지 않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선한 목표에 사로잡히는 것은 중요하죠.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 기다림과 노력, 고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목표 못지않게 과정을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진정한 목표가 성취되는 법입니다. 아니 바라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과정을 누리며 산 사람은 이미 ‘성숙을 단계’를 밟은 것입니다. 성공은 못했어도 성숙한 인간이 되는 자양분을 흡입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공하려 하지 말고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거죠. 자기는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는 겁니다.
과정을 생략한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은 무모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루하루 사는지는 묻지 않고 할례만 받으면 구원이 된다는 말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평등하고, 성과 속이 삶 속에 용해된 그런 인간들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구원을 선물하는 것이지 ‘할례’라는 단 하나의 방법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다.
신앙은 여행입니다. 성숙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성숙하기 위해 사는 겁니다. 성숙해지려고 예수를 따르고 믿고 교회 다니는 겁니다. 그러려면 목적지를 향해 치닫기만 하며 살 게 아니라 가는 동안 굽이굽이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여행은 목적지에 당도하는 기쁨이 아니라 가는 동안 누리는 예측 불가능의 희열이 주는 행복을 맛보는데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조금씩 내가 달라지는 겁니다.
나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복권 사듯이 그렇게 하지 않고, 신앙하는 과정들을 속에서 성숙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과정이 있는 믿음, 과정을 누리며 사는 신앙, 과정을 귀하게 여기며 마침내 성숙한 어른이 되는 영혼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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