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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3: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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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골3:5-11
(2020/03/29, 사순절 제5주)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참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특히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든 분들과 의료인들, 방역 담당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춘분을 지나 청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맑고 밝은 날을 기대하지만 우리 마음은 여전히 흐립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친밀한 접촉과 소통이 가로막혔습니다.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우리 삶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큰 충격에 빠지게 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소위 ‘n번방 사건’으로 통칭되는 범죄 행위 말입니다. 미성년자들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을 성 착취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낄낄거렸던 이들의 행각이 드러났습니다. 거기 가담한 이들이 26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사이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범죄가 이미 인지된 바 있고, 여성들에 의해 폭로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치해온 관계당국의 안일함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추행, 성폭력을 넘어 성 착취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저변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음습한 욕망이 독버섯 포자처럼 번져가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어려웠던 이들은 위협에 못 이겨 비인간적인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을 강요했던 이들은 그것이 게임이었을 따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부디 피해를 당한 이들이 자괴감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이 절망을 딛고 일어서도록 곁부축해주고,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함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입니다. 호불호를 떠나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형상을 인격이 아닌 물건처럼 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도전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조롱과 냉소, 혐오와 폭력이 만연합니다. 신형철 선생은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p.92ff)라고 말합니다. 대충대충 대하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려 하지 않고, 함부로 예단하고, 상대를 수단으로 삼는 모든 것이 폭력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까닭은 이런 병든 세상을 치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욕망으로 후텁지근해진 공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하늘 공기를 자꾸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환기와 같습니다.
∙땅의 것과 결별하라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한 사람들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골3:1b)라고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지만 ‘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고,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고, 낭비가 아니라 아낌이고,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고, 홀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삶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에 땅의 것들과 결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이 말은 세상이 더러우니 내세나 바라보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장악하고 또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세상의 상상력에서 벗어나라는 권고입니다.
바울이 결별하라고 말하는 것은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탐욕’인데, 이게 거의 다 성적인 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난잡하고 자기만족적인 성적 행위, 성의 왜곡, 통제 불가능한 욕망,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그는 탐욕이라 말합니다. 왜 그게 탐욕일까요? 상대방을 통제와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이면에서 남성들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우상숭배적인 일인지를 바울은 벌써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을 죽이기 전에 먼저 그것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합니다. 이전에는 욕망에 이끌려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 해도 이제는 그러면 안 됩니다.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사는 삶 즉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분들이 말하는 삶의 비결은 단순합니다. ‘버릴 것을 과감하게 버리라’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 우리 삶이 누추합니다. 버리진 않고 모아두기만 할 때 집이 복잡하고 더러워지지 않던가요? 버리는 게 도무지 마땅치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껴야 하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리의 마음에도 버려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골3:8)
어느 신학자는 이런 부정적인 모든 행위의 뿌리가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 소중한 이웃으로 대하지 않고 성적 탐욕과 경제적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감정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게 되고, 유대감, 긍휼, 연대 의식을 품을 수 없게 됩니다(브라이언 왈쉬·실비아 키이즈마트, <제국과 천국>, 홍병룡 옮김, Ivp, 2011, p.285). 폭력적인 감정은 폭력적인 언어를 낳고, 폭력적인 언어는 폭력적인 행동을 낳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달아올라 있습니다. 도무지 여백이 없습니다. 농담삼아 하는 말입니다만 다들 이마에 ‘맹견주의’ 팻말을 써붙이고 다닙니다. ‘건드리면 뭅니다‘ 하는 신호지요. 가끔 현실이 무겁다고 느낄 때면 전우익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동리에 개가 몇 마리 있는데 한 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족족 짖어대더랍니다. 다른 한 놈은 하루 종일 지그시 눈을 감고 편히 엎드려 있습니다. 가는가 보다 오는가 보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난 이렇게 게으름 피우며 살란다 하는 투였습니다. 전우익 선생은 그 이야기 끝에 앞의 놈같이 살면 암 걸리기 십상이기에 뒷놈같이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좀 느긋한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옛 삶의 습관이나 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속에서 살이 차올라야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은혜가 먼저 우리 삶을 채워야 합니다.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수도자가 아무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그는 마지막이라면서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2주쯤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결국 숨어서 마약을 하고 말았습니다. 수도사가 그를 꾸짖었습니다. “자네는 사나이가 아니군. 하려면 정정당당하게 하지 그게 뭔가?”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마약을 했습니다. 그때 그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길로 그는 마약을 끊었습니다.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던 것입니다. 비로소 새로운 삶이 그의 앞에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의 공허를 채웁니다. 그 은혜는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 발현되기도 하고,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도 발현됩니다.
새 사람은 세상의 논리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차가운 효율성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비효율적인 연민과 사랑을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돈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우정과 연대가 더욱 아름답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은 늘 자기 삶을 성찰합니다. 내 마음 씀이 너무 각박하지는 않았는지, 오만했던 것은 아닌지, 너무 이기적으로 처신한 것은 아닌지, 말씀을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저는 한국 개신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이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과 기도소리는 넘치지만 자기 성찰은 없습니다. 성찰은 살피고 또 살피는 조심스러운 태도입니다. 성찰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늘 인식하고 있기에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귀 기울여 듣습니다. 성찰하는 사람은 뻔뻔할 수도 없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분들이 대놓고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겸손과 온유와 섬김과 자기희생에서 슬며시 배어 나오는 것이지, 주장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근계 만들기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이 새로운 영혼의 생태계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일체의 차별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다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습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아시아인들이 감염의 통로처럼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보고 들으며 참 화가 납니다. 여전히 세상은 인종주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백인 우월주의라는 집단 감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표징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우리가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열린 새로운 세상을 바울은 장벽이 무너진 세상으로 묘사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꿈꾸는 인류 앞에 지금 새로운 장벽이 세워졌습니다. 당분간 그럴 수밖에 없다 해도 마음의 장벽을 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장벽 허무는 자, 바로 그것이 기독교인의 별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초원의 흙을 제자리에 붙잡아주는 것은 살았거나 죽은 풀들의 가느다란 뿌리가 얼기설기 엉킨 근계”(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8, p.160)라고 말합니다. ‘근계‘라는 말은 ‘뿌리 根’에 ‘이을 系’ 혹은 ‘지경 界‘ 어느 쪽을 써도 상관이 없겠습니다. 별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중심을 통해 연결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붙들어 주어 사랑의 생태계를 이룰 때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둠에 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는커녕 사랑으로 폭력의 허약함을 폭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하늘 빛을 마음에 품고 맑고 밝은 기운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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