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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짐과 나타남

골로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99 추천 수 0 2023.09.21 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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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3: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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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E_ntS1K4OfY 
성경본문 : 골로새서 3:1~4 
감추어짐과 나타남
부활주일, 2023년 4월 9일
 
감추어짐
 
오늘 설교 본문에는 손에 딱 잡히지 않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생명이 감추어졌다는 표현이 가장 그렇습니다. 우선 골 3:3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이 문장에서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은 세례를 통해서 발생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자기를 이미 죽은 자로 여깁니다. 물론 실제로 죽지는 않습니다. 죽을 수는 없고 죽어도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사건이기에 삶의 모든 부분이 위축되어서도 안 됩니다. 가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죽었다는 말은 세례받기 전의 자기와 받은 후의 자기를 다른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믿음이 없을 때 추구하던 세속적인 성취감에 지배당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과거의 자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죽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겁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삽니다. 이전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은 삽니다. 이전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실제로 목숨이 끊기는 게 아니듯이 새 사람으로 산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새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서 여전히 시행착오가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 골 3:2절이 말하듯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합니다. 골 3:1절은 ‘위’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위’는 우주 어느 공간을 가리키는 건 아니고, 골로새서가 기록되던 시기의 신플라토니즘 철학이 말하는 ‘에테르’의 세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바로 ‘위’입니다. 그 ‘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 데서 나타납니다. 부활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신약성경이 예수의 부활을 말할 때는 대부분 ‘죽은 자’가 언급됩니다. 죽음의 극복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동물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죽음을 의식한다면 살아있을 때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장례 문화가 다른 동물들에게 있다는 말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삶을 죽음과 연결해서 받아들이고 대처합니다. 죽음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난폭한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 문명은 죽음을 소외시킵니다. 더 정확하게는 죽음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당하는 겁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소비 중심의 삶입니다.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서 자기는 죽음과 관계없다는 느낌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알면 소비 중심의 삶으로 떨어질 수 없겠지요. 저는 얼마 전에 작업복과 테니스복만 남겨놓고 옷을 다 버렸습니다. 계절에 따른 개량 한복 세 벌이면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모두 저처럼 살아야만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제 70세가 되었으니 가능한 한 소비를 줄이려는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대인이 인공 지능과 의학 발전을 통해서 영생불사를 꿈꾼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만약 저에게 영생불사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노땡큐’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겪지 않으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걸 성경에서 배웠고, 그게 옳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의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기계적으로 믿으면 곤란합니다. 예수께서는 가능한 한 죽음의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실 때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 그들에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숨지기 바로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죽음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신 걸까요? 이왕 인간 구원의 길이라면 담대하게 가는 게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약사발을 받으면서 제자들에게 이웃집에서 빌린 닭 한 마리를 대신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자적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 태도는 영육이원론에 근거한 그리스 철학의 전통입니다. 인간의 육체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로 보는 신구약 성경의 관점에서 육체의 죽음은 인간 삶의 완전한 파멸입니다.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자신들의 스승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힌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은 모두 본래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으로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끝나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으로 인생살이를 끝내듯이 말입니다.
 
살아있는 자
 
어느 순간부터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처절하게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을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께서 외치신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듯이 제자들의 이런 경험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죽기 이전의 몸으로 살아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문이 닫혀 있는데도 부활의 예수께서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부활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평소에 자기를 따르던 이들에게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5절 이하에는 부활 목격자 명단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가리키는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예수 동생인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바울입니다. 부활의 주께서 산헤드린 공회 현장이나 빌라도 집무실이나 예루살렘 중심가에 나타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더 확실하게 전파되었을지 누가 압니까. 당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예수 부활이 신앙의 차원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지 역사책이나 매스컴에 보도될 수 있는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근거가 희박하구나, 하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뉴스로 보도되는 것만이 중요하고 확실한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상당한 세월이 흐르면서 결과가 나타날 때만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때 이를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의 출생이 인류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미리 알았다면 많은 사람이 주목했겠지요. 우리의 일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정작 중요한 일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떤 경험이 나중에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이 세상의 속성이 은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생명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의 정체를 직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다 아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이런 말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 자체가 생명 아니냐고 말입니다. 물론 생명이지만 성경이 영생이라고 말하는 그런 생명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모두 늙고 죽는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의 생명이 감추어졌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현재의 생생한 삶 자체가 은폐를 속성으로 합니다. 현재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10억 원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합시다. 또는 베스트셀러 작가나 유명 유튜버가 되었다고 합시다. 좋은 사람과 결혼했다고 합시다. 그게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충 좋은 그림을 무조건 따라가는 겁니다. 그런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미 다 드러난 게 아니라 은폐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로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씨앗과 비슷합니다. 씨앗에는 꽃이 감추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조건이 맞춰지면 씨앗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양의 꽃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꽃이 피는 순간이 기다려지지 않으시나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그래서 실감이 나지 않으시나요? 도대체 여러분은 무엇에 실감을 느끼면서 사십니까?
 
바울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말입니다. 돈에 매달려서 사는 사람은 돈과 함께 감추어졌겠지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이르는 예수의 운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신앙적 연대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구성원들끼리 친교를 나누는 모든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즉 우리의 미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집니다.
 
영광 가운데 나타남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졌다는 말은 생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외롭고 슬프고 화도 납니다. 자기에게 실망도 하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많은 인생 목표를 성취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인간 실존은 생명의 완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티브이나 유튜브나 SNS 등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자기 삶을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영상을 볼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씨앗입니다. 씨앗도 씨앗 나름의 행복은 있으나 꽃의 행복과는 다릅니다. 씨앗의 삶을 우리는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이 발현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가리켜서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절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했고, 4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3절과 4절을 한데 묶어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현재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세상 마지막 때 예수께서 세상을 생명으로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살전 4:13절 이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살아있는 자들은 공중으로 올림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 순간을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하늘나라이고 영생이고 부활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그분과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씨앗의 차원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꽃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δ?ξα)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글로리>라는 시리즈 영화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글로리’는 복수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와 연관한 모든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치유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유하실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그 구체적인 방식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희망을 두지만, 세상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각본과 프로그램을 성취하는 데만 마음을 둡니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만 영광스러운 인생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찾고 희망하고 찬양합니다. 그런 순간을 벅찬 심정으로 맞이하려고 오늘을 참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우리가 참여하게 될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나타나심을 두 손 놓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오늘의 삶과 역사적 책임감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순간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 순간이 이미 여기서 시작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실, 그러니까 감추어짐과 나타남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을 탱탱하게 유지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삽니다. ‘아직’(not yet)과 ‘이미’(already) 사이의 긴장을 어느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완성되었다고 잘난척하지 않으나 허무에 떨어지지도 않고 자학하지도 않습니다. 교만하지도 않고 주눅이 들지도 않습니다. 한편으로 늘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늘 기쁨 충만하게 삽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랑거리가 많아도 그것에 도취하지 않으며, 아무리 불행한 상황에 떨어져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사실입니다. 3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말했고, 4절은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혼자 이 엄청난 운명을 버텨내는 게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살아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마지막 절인 28:20절은 부활의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느 때까지요? 죽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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