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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068 추천 수 0 2009.10.10 14: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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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1:28-29(살전5:12-15)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002.20.30

지난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9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여자는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누나들과 다툰 후 저에게 온 것 같았습니다. 누나들을 여자로 대한다면 2대 1이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니 자신의 주장을 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아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왜 여자를 이해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아빠는 몰라도 돼 ! "라고 말하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일곱 살인 아이가 왜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지, 그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지 궁금해서 계속해서 "왜 여자를 이해할 수 없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아이는 계속 "아빠는 몰라도 돼 ! "를 반복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지금 네가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지끔 뿐 아니라 평생 여자를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성도님은 어떻습니까? 30년 살아 보니까 이해할 수 있던가요? 남성은 어떻습니까? 40년 살아 보니까 남자에 대하여 다 이해할 수 있던가요? 이해 안가고 받아 들일 수 없어도 그저 정으로 사는 것이지요. 아마 이 아이가 장가를 가서 평생 한 아내와 함께 산다고 여자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된 어느날 부부싸움을 하고 와서 진지하게 "아버지 참 여자는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해 못한다고 이 아이처럼 늘 싸우면 살아갑니까? 우린 세상에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성격도, 습관도, 사고도, 행동도 때때로 이해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매사 이해가 안된다고 싸우며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그것은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사람 만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해하려고 만난 것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부부가 함께 만난 것도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성도가 함께 만난 것도 서로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로 여인을 만들어 같이 살게 하였습니다. 세워준다는 말은 돕는다는 말속에 포함된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사역 목적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28절)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각 사람을 세워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신앙 생활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세째는 일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데 있습니다.
고전10:31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과의 관계는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5달란트 받는 사람이나 2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똑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1)" 충성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 관계에 대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세워주는 것입니다. 깍아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힘을 주어 서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사람을 세워 주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회에 순두게와 유오디아가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뭐라고 합니까? 쫓아 내버렸습니까? 빌4:2절을 보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합니까?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그들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자식과 같은 디모데이지만 자신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편지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후 1:1)"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3000명 나오는 담임 목사가 되면 어떻게 합니까? 부목사 세워 줍니까? 혹 성도들로부터 인기가 있을까바 깍아내립니다. 일년마다 한번씩 갈아치웁니다.
성경 빌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몬 1:1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인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입니다. 그런데 아들이라고 합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몬 1:10)" 그 뿐입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 보기에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학부모 회의에 오지도 마라고 합니다. 시어머니 아니었으면 합니다. 내 가족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대강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①경쟁자 ②이용자 ③무관자 ④동반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돕는 자입니다. 격려자입니다. 세우는 자입니다.
지난 금요일 90살 드신 할머니 집사님께서 3개월 반 동안 시집간 딸네 집에 가셨다고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구역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시러 갔습니다. 63살 된 며느리가 함께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도 볼 일이 있다고 같이 차를 탔습니다. 얼마동안 뵙지 못하여 반갑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딸네 집에 계시니 좋으시지요"라고 말하자 "딸이 잘해주지, 그러나 며느리 반밖에 못해"라고 말했습니다. 90세이신 할머님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딸도 깍아 내리지 않고 그렇다고 며느리의 자존심도 상하게 하지 않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 동안 할머니께서 며느리나 아들의 흉을 보는 것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사소한 일만 있어도 동료 할머님들께 며느리 자랑을 하였습니다.
사실 늘 만족스럽게 해주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30대에 홀로되어 60여년 동한 외롭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서운한 마음이 가슴에 쌓여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할머니는 서운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식과 며느리를 세워주는 데 입술을 사용하였습니다.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세워 주고 있습니까? 저의 인생 모든 부분을 낱낱이 드러내 보십시오. 여기 설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숨겨줄 것 숨겨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허물을 감싸주며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를 가끔 들어 갑니다. 며칠전 들어가 보니까 게시판에 아름다운 글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어느 여집사님이 꽃꽂이하시는 집사님에게 보낸 글이 었습니다. 늘 꽃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다는 글이었습니다. 세워준다고 밤 1시에 만나자하고 나가지는 마십시오. 할머니들을 세워주기 위해 매주 성경을 큰 글씨로 써오시는 분을 봅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장로님도 목사님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집사님은 권사님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학생들도 선생님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세워 주어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은 딸은 어머니를 세워 주어야 합니다.

2. 세워주기는 세워주되 어떻게 세워 줍니까?
1)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줍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자들입니다. 말에 실수가 있습니다. 허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 약점 투성이입니다. 다 허물이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다 흉보기 좋아 하고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중이고, 돈을 좋아 합니다. 대부분 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까지도 편히 살려고 합니다.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인정받기를 즐기고, 명예를 좋아하고, 권력을 갈급해 하고, 사랑에 굶주리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 믿었는지 10년이 되었는데 그래도 목사님이고 장로님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냐? 하며 핏대를 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 생활을 하고 아무리 많은 수련과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 처럼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우수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프리카 케냐에 우리나라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원주민을 모아놓고 설교하는데 설교가 잘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옷을 입고 살지 않기 때문에 남녀 노유를 막논하고 발가 벗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맨 정신으로 그들 앞에서 설교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팬티를 신청하여 팬티를 입혀 놓고 설교 하니까 그래도 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설교를 다 마치고 돌아 오려고 하는데 그들 모두가 배웅 나와 손을 흔드는데 놀랍게도 팬티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은 역시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걸레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걸레입니다. 애완견에 향수를 발라 주어 침대에 뉘워도 강아지는 강아지입니다. 돼지를 아무리 강력 세척제로 씻긴다 하여되 돼지는 돼지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일 따름입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한이란 말은 "충분히 자라 성숙한 자,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제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사장으로, 과장으로, 아들로, 며느리로, 시어머니로, 성숙하여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세워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전하지 못하다고 깍아내리고 넘어뜨리고 실족하게 하지 마십시오. 온전하지 못하니까 세워 주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으로 세워준다고 합니까?
바울 선생님은 28절에 보니까 ①그를 전파하고(엄숙한 선포, 공식적인 선포, 하나님 나라 선포, 케리그마, 설교) ②가르치고(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에게 삶의 방법 가르침, 디다케, 교리 교육) ③권면(영혼 돌봄, 파라 크레시스, 심방)함으로 세워 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생으로 로마 시민권과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높은 지식 수준을 갖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영적 재산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통한 인생의 참된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아무라도 이런 영적 재산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당시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영적인 재산 지적인 재산으로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서가 아닙니다. 큰 교회를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황제 노릇을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런 봉사를 통하여 자아를 성취하고 보다 사회에 기여한 유명인으로 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종교적 열심을 통하여 자신의 종교적 명예욕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인정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많은 선배 사도들이 있는데 그 사도들과 경쟁하여 보다 종교적 지위의 우위를 차지하고자 열심을 낸 봉사도 아닙니다.
바울 선생님이 사람을 향하여 설교하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심방하는 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하여서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자신의 없는 것을 보고 자꾸 채우려고만 합니다. 그것이 병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건강이 있습니다. 영적 신앙이 있습니다. 재산이 있습니다. 재능이 있습니다. 말할 수 있는 입술이 있습니다. 걸어다닐 수 있는 발이 있습니다. 손이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내 가진 것으로 세워 주면 됩니다. 아파트 들어갈 때 경비에게 인사만 받아도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저희 아파트에 경찰 고위직이 사시는데 수위가 그분을 보면 인사 잘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인사 잘 하지 않습니다. 기분 좋을까요? 말 한마디로 세워 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절망하며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반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군요.해고당한 일이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세요』아내는 남편을 격려한 뒤 돈을 꺼내 놓았습니다.
『이럴 줄 알고 당신 봉급에서 따로 마련해둔 돈이예요.당신 이 명작을 쓸 동안 이 돈으로 살아요』 나타니엘 호손의 명작 「주 홍글씨」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한국인의 약점중 하나는 남을 깎아내리는 버릇있다고 합니다. 나 이외 것을 영원한 적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깍아 내립니다. 내것이 아니면 다 나쁜 것입니다. 내가 해야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은 관심이 없고 잘 못되기를 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 심장에 치명적인 것이 두가지가 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남의 약점과 실수를 꼬집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죽게 만듭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끼리 더욱 그렇습니다.
피를 같이한 동기간이나 뜻을 같이한 동지간(同志間), 이해를 같이한 동업간(同業間)끼리 그러지 말아야 할 내분, 질투, 반목, 이간, 중상, 대결하는 심리를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보드랭은 카인 컴플렉스(근친증오)라고 합니다. 가족 끼리 세워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이런 우수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남편에게 구박받으며 속을 태우며 살던 아내의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평소에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마지막 가는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여보, 당신은 이제 곧 천당에 가시겠구려. 나도 머지 않아 뒤따라 가렵니다.”그러자 아내는 겁먹은 목소리로 황급히 대답했습니다.“아니야. 서두를 필요 없어. 제발 혼자 좀 오래 있게 해주구려.”
아무리 구박받고 힘든 세월이었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남편을 세워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 죽으면 다시 재혼하십시오. 이왕이면 젊은 여자와 결혼하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남편이 얼마나 더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3)힘을 다하여 세워 주어야 합니다.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싸우다, 고뇌하다"라는 말입니다. "수고하노라"라는 말은 "힘쓰다 수고하여 지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치 운동 선수가 반드시 이겨야 될 운동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힘을 다해 번뇌하며 싸우는 것과 같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 전파에 전력하겠다는 말입니다.
적당이 세워주면 안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세워주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하는 것을 보십시오. 한번 설교하고 수십명 모아놓고 집단 상담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28절 보십시오. 권하는 것도 각 사람이고 가르침도 각사람이며, 전파하는 것도 각 사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밀한 관심을 가지고 세워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교육원을 통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세워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과 질환에 `시야 암점증'이라는 눈병이 있다고 합니다. 길다란 두루 마리 통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일정한 초점만 보이고, 주변의 시야가보이지 않는 증상이랍니다. 따라서 부분적 식별만 가능하고 전체적 판단이 불가능한 눈병입니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야에도 이 시야 암점증을 앓는 이가 적지 않다는 임상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에도 시야 암점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폭을 넓혀야 합니다.
속셈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도 있지만 교회 밖에 있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복음을 심어 주는 것도 세워 주는 것이고 그들의 필요를 넣어 주어 바람직한 인생을 살게 하는 것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8시 반쯤 집에 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한 주부의 전화였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저녁에 인터넷을 하면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떤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보다는 딴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사람들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나를 위해 나에게 주어진 것 사용하는 것 가치 있는 일이지만 더 가치있는 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편안하게 안주하려고 한다면 끝없이 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열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 하였습니다. 갖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병든자, 가난한자, 저는 자, 우는 자, 고통 당하는 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제자시켜달라고 왔습니까? 예수님이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인성에 들어 갔습니다. 삭개오를 변화시키기 위해 삭게오에게 접근합니다. 우물가의 여인 변화시키기 위해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3. 우리가 어떤 힘으로 세워줄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참 힘듭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입니다. 성령님의 힘입니다. 바울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힘이 있습니다. 참 인간은 연약합니다. 금방 하려고 하다가도 쉽게 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오래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2:1-4을 보십시오. 성령이 임하시니 어름같이 차가웠던 마음이 뜨거워 지고 더러운 죄를 태우고 마음 문을 밝혀 성경을 깨닫고 입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 납니까? 서로 세워 주는 역사가 일어 납니다. 행 2:42-47절을 보십시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죄의 문제, 습관의 문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성령님의 힘으로 세워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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