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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마음으로 합시다

골로새서 이화림 목사............... 조회 수 2250 추천 수 0 2011.06.25 15: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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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3:22-25 
설교자 : 이화림 목사 
참고 :  

성실한 마음으로 합시다
본문 : 골 3:22-25, 시 31:23-24

유럽에서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로 지난 1주일 동안에 35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매일 36명 꼴로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정회장의 자살은 우리나라가 가난한 사람도 살기가 힘들지만 돈 있는 기업가도 살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남북한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주고 우리사회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눅 12:15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할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 먼 옛날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깊이 상고하여 보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요긴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되는가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종들이란 말은 눌린 사람을 말하고 아랫사람을 말하고 가난한 사람을 말하고 낮은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은 헬라어로 돌로스인데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들은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말씀이 마치 노예제도를 기존 사실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노예제도는 안된다 노예를 해방시키라고 하지 않고 왜 노예제도는 놔두고 오히려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는지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 1장에 보면 노예에게는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주인에게는 노예를 형제와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노예이지만 마음으로는 형제와 같이 대하고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으로는 평등이고 영적으로는 평등이고 신앙적으로는 평등입니다. 그러나 사회 제도적으로는 엄연히 주인이고 노예입니다. 성경은 제도부터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제도는 문화적 상황 정치적 상황이기 때문에 그냥 놔두고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 노예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노예는 교회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은 달랐지만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전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는데 노예는 하나의 물건이었습니다. 주인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는 도덕성도 없었습니다. 주인의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너 아무개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도둑질 해오라고 하면 도둑질해 옵니다. 도덕도 윤리도 없고 심지어 양심도 필요가 없습니다. 노예는 이름이 없고 자녀가 없고 자유가 없고 신발도 없고 외양간 같은데서 동물과 나란히 살았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교회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왔는데 이 사람들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참 훌륭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듣지 못한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같은데 왜 더러운 세리가 같이 다니고 세리의 집에를 가시고 죄인들이 같이 다니고 부정한 여자들이 그 가운데 있는가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내가 끼어 앉아 있는 것이 불결하다 그래서 못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노예를 교인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해주고 동등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자가 좋은 옷을 입고 나와서 앉아 있으면 옆에 앉아있는 노예한테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신앙 안에서 다 형제로 인정하고 이것을 극복했으니 예삿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렇게 하기가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배시간에 옆에 이상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부담을 느끼십니까? 한국 교회 역사에 보면 제가 교회 이름은 말하지 않습니다만 초대교회 때 서울에서 양반들만 모이는 교회에 천민이 나왔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해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반들이 이 교회 못나오겠다 하고 따로 나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에 노예와 함께 예배를 드렸으니 굉장한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고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데 노예가 아주 큰공을 세웠습니다.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온유하고 진실해지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예 중에는 똑똑한 사람도 있고 힘센 사람도 많고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몰래 주인을 죽이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아주 무서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좀 사나운 노예는 쇠사슬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 형편인데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아주 착해지고 진실해지고 온유해집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밤늦게 나가보니까 어느 한곳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서 가까이 가보니 노예들이 사는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찬송이 끝난 후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데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우리 주인 가정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우리 주인에게 건강을 주시고 하는 일이 형통하게 하시고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항상 인도하여 주소서. 간절히 주인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듣고 있던 그 주인이 감동을 받아 그 노예들 속에 들어가서 나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하고 노예를 끌어안았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일이 자꾸만 생겼습니다. 마침내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제도는 그대로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높은 수준의 종교로 고상한 종교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왔을 때, 우리 주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더 열심히 하고 더 충성하고 더 성실하게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노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예수 믿는 주인이 왜 저 모양이냐 하고 자기가 충성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을 비판하는 노예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주인이니 우리가 전에처럼 뼈빠지게 일할 필요 없다 하고 일을 소홀히 하는 노예도 있고 예수 믿는 주인이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비판하는 노예도 많았습니다. 이리하여 예수 믿는 노예 가운데 신앙을 구실로 주인에게 불순종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아내이면 아내의 도리를 어쨌든 잘해야 합니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으면 더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는 남편이 예수님을 믿으면 함부로 합니다. 집사니까 장로니까 참아 주겠지 하고 식은 밥 먹이고 세탁도 안 해주고 집 비우고 돌아다니고 마음대로 합니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아내의 본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대로 아내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남편이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틀림없다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면 잘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잘 참는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집사니까 권사니까 이해해주겠지 하고 남편이 제멋대로 놀아난다면 잘못입니다. 내가 신앙적으로 사는 것은 옳지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구실로 해서 내가 불충성하고 아무렇게나 대하고 내 본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교회나 오는 노예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말은 자유스러운 순종을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노예와 노예 아닌 사람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분이 문제가 아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억지로 일을 하면 나는 노예입니다. 부엌에서 일할 때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자유인이지만 나는 어쩌다가 여자로 태어나서 밤낮 밥하고 설거지하고 세탁하고 시장바구니 들고 다니고 밤낮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고생해도 수고했다는 칭찬 한마디 못 듣고 꾸중이나 듣고 사는 나는 노예와 같다. 나는 이 집에 종이다. 세상에 이런 팔자가 어디 있나 하면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또 남자도 어쩌다가 내가 결혼은 해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기 살기 일해서 월급은 온라인으로 다 뺏기고 용돈도 푼푼하게 못쓰고 사니 이게 뭐냐 나는 가족 벌어 먹이기 위해 허리가 휘게 죽을 고생을 한다. 나는 가족들의 머슴이다. 나는 완전히 노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이런 아내 이런 남편이라면 노예끼리 사는 셈입니다.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선택적으로 신앙적으로 섬겨 나가면 섬기고 순종하는 그 자체가 나를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자유인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하면 자유인입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저 분을 위해서 하는 일은 나에게 큰 영광이다. 나의 자랑이다. 이 아이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이보다 더 큰복이 없다고 신앙적으로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하게 되면 자유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유인은 구조적인 문제나 신분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이고 삶의 자세의 문제입니다.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구체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위선자가 될 수 없고 외식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눈가림만 하는 기회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눈가림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칭찬받으려고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초라해 집니다. 어느 사이에 비참한 노예근성이 생깁니다. 이런 것 다 떨쳐버리고 누가 보든 안보든 상을 주든 말든 나는 나대로 진실하게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이야 보든 말든 눈가림하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이 자유인입니다. 누구에게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내 진실을 내가 가지고 행하면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라고 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신다하는 마음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에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엡 6:5 에 종들아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예수님께 하듯하라고 했고 골 3:22에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성실이란 말을 현대인의 성경에는 진심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정성껏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실이란 단어는 로마에서 조각가들이 사용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왁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조각가들은 작품을 완성한 다음에 긁히거나 흠이 난 자국을 감추기 위해 그 위에 왁스를 칠했습니다. 그러나 긁힌 자국이 하나도 없이 완성한 작품에는 왁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왁스를 안 바른 것이 성실입니다. 성실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일해야 합니다. 피와 눈물과 땀은 사람의 고귀한 액체인데 성실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피와 눈물과 땀을 바쳐 부지런히 일하고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유업의 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헬라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로부터 시작됩니다. 섹 스피어는 말하기를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성실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성실한 마음으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시 37:3에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성실을 음식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 쓸 수 없듯이 성실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뜻입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광장에 종교개혁의 아버지라 불리는 얀후스의 동상이 있는데 그는 성경에 입각한 신앙 양심을 외치다 로마교황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동상아래 4마디 말이 새겨져 있는데 ‘성실을 배웠다 성실히 살았다 성실을 사랑했다 성실을 지켰다’ 입니다. 이 얀후스에게는 성실이 전부였습니다.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믿음도 생활도인격도 전부성실이었습니다. 논어에 성실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은 이웃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하여 언제나 성실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베푸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시 31:23에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말하기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러 위인들의 공통적인 특색은 성실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성실하시다고 했습니다. 사 11:5, 렘 5:3, 렘 애 3:23에 하나님은 성실하다고 했고 시 71:22에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라고 했고 수 24:14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잠 28:10에 성실한 사람은 복을 얻는다고 했고 잠 28:18에 성실히 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잠 28:6에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사람은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바쁜 중에서도 예배시간 10전에 오는 성도와 5분 후에 오는 성도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5분전에 출근하는 사람과 항상 5분 후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두 사람에게 대한 평가와 삶의 미래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불가 5분이지만 5분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처음으로 은행이 생겼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아가씨가 취직하기 위해 은행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젊은 은행장은 은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자리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면전에서 퇴자를 맞아 얼굴이 붉어진 그 아가씨는 은행장실을 나가다가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핀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옆에 있는 책상위에 놓고 나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은행장이 그 아가씨를 불러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은행장은 그 아가씨의 작은 성실을 귀하게 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 아가씨는 성실하게 일하였고 그 은행장과 결혼했습니다. 작은 일에 성실했기 때문에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중심을 다해서 하고 마음을 다해서 하고 정성을 다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교회 학교 교사들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구역일꾼들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구역을 돌봐야 하고 부서의 일꾼들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찬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24절에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했습니다. 섬긴다는 말의 헬라어 뜻은 노예가 주인을 섬긴다는 것 같이 주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유업의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상을 받게 됩니다. 25절에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라고 무시하고 주인이라고 높여 보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얼굴보고 대하시지 않는다는 말이고 얼굴보고 취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잘 생겼든 못생겼든 하나님께서는 그것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높고 낮고 가 없습니다. 어떤 위치든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살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예수님의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화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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