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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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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
골 1:15-20
*2008년 7월 20일 설교입니다.
늘 설교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저도 마땅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무더운 여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피서 떠나듯이 설교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긴 영혼의 울림과 여운은 있어야 겠지요.
평화의 사도로 살고 계신가요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이 세상 명예와,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도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송 102장).
주 예수와 세상의 것들이 비교됨으로써 주 예수가 상대화 되어 있습니다. 후렴 노랫말 마지막이 ‘예수 밖에 없네’로 끝나지만, 노랫말 전체로 봐서 여전히 절대적인 의미로 오직 예수만의 충만함을 노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 말고도 또 뭔가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거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내 안에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들립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놀라운 사랑’ 잊게 할 수 없고, ‘주 사랑하는 마음’ 뺏지 못하며, ‘주 섬기는 내 맘’ 변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표현은 어찌 되었건 주 예수만으로 충만한 신심(信心)을 잘 노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충만한 신심으로 사는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세상에서 즐기고 바라고 꿈꾸는 것들이 태산 같은데, 주 예수만으로 충족할 수 있는가요? 첨단과학이 제공하는 온갖 삶의 수단은 기하급수로 불어가는 세상에서 주 예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세계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신자들이 서슬 푸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지구촌에서, 불교와 유교(철학?) 같은 고급종교가 엄존하는 이 다원 종교적 상황에서, 주 예수만을 통한 구원의 절대성을 여전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요? 나는 이러한 물음에 충분한 답을 할 수도, 할 지면도, 할 마음도,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옛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교적 상황에서 문제가 되었던 ‘그리스도만의 충족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되는데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불안한 시대를 사는 나를 좀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뭔가 두리번거리고 있지는 않느냐 말입니다.
골로새는 작은 도시로서 이웃에 위치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미앤다의 지류 리고스 계곡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 안에 있습니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및 히에라폴리스에는 교회들이 있어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4:13,15,16). 이 지역에 누가 언제 교회를 설립하였는가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 사도가 세우지 않았고 골로새 교회를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우들은 물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2:1).
이 지역 교회 설립자는 골로새 출신 ‘에바브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서 여러분이 배운 그것입니다”(1:7, 4:12). 아마도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의 위탁을 받고 골로새에서 전도하였으며 바울은 에바브라가 자신과 일행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는 자였습니다(1:5).
골로새 교회 구성원은 이방인이 대다수고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옥살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려고 바울을 찾았습니다. 에바브라는 고무적인 교회 소식도 전했지만 자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짓교사들을 물리칠 큰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로새서는 바울이 에바브라의 교회 보고를 듣고서 기록한 것입니다.
에바브라의 보고에 따르면 골로새 교인은 거짓교사들의 등장으로 신앙과 사상적인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교회 질서를 유지하고 거짓교사들의 사상에 현혹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이보다 더 반갑고 감사한 일이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거짓교사들의 교훈으로 영향을 받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교인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세울 필요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되기를 빌어 왔습니다”(1:9). 바울은 그들이 깨닫도록 기원할 뿐 아니라 본서를 통해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 또는 바울의 적대자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그의 적대자(반대자)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 정체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찾기 어려워요. 그러니 골로새 교회 안에 나타난 거짓교사의 가르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밝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주장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바울 사도의 경고와 그가 쓰는 말 등에서 거짓교사의 가르침의 내용과 그 잘못됨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첫째, 종교적 규례와 거룩한 날과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즉 의식적인 것의 강조였습니다. 둘째, 금욕적인 삶의 강조였습니다.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려면 육체적, 자연적 욕망을 자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천사와 영물의 예배를 강조하였습니다. 천사나 영물들이 인간의 출생과 운명을 좌우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이 범하는 잘못은 무엇인가요?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천사들이나 영물들을 예배하고 율법과 절기준수와 금욕주의를 내세운 것입니다.
이런 거짓교사들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시라는 것,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요 구속자이기에, 그리스도만으로 충족됨(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밝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한편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른 신앙을 가르치고 격려하려고 골로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만일 이 이단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가 목숨 걸고 전한 복음이 왜곡되고 골로새 교인이 영적인 속박 상태에 빠지게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위기에 처한 것과 같은 상황에 우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으로 충족한 신앙이 곧 우리의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력의 마력에 짓눌려 그리스도만의 충족성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여전히 권력과 명예와 교권이 그리스도의 보좌를 찬탈하니 그리스도의 누울 자리는 말구유일 뿐입니다. 유대 종교 당국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하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선택했지만 베드로 후예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섞고 맙니다.
오직 예수만, 오직 그리스도만의 확고부동한 절체절명의 신앙이 아쉽다는 뜻입니다. 불신 지옥, 예수 천당! 이런 구호들은 여기서 말하는 ‘오직 예수만!’과 괘를 달리하는 잠꼬대 같은 말입니다. 전철 안에서 그런 유의 전도자를 향해서 'oooo’이라고 비속어를 내뱉는 소리를 들어서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의 충만이 그런 식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무이한 구속자요, 구세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그의 삶에서 살아내는 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을, 다른 종교적 이상을 더해야 비로소 안심하는 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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