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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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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화목과 거룩함
2006-11-26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3 (2006. 11. 26)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I. 본문 해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3차 여행의 중심지로 삼아 눈물로 복음을 증거하며 3년 동안 사역하던 중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직접 이 교회를 세운 것 같지는 않지만 에베소에서 일어난 부흥의 영향으로 회심한 사람들이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각기 여러 도시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던 중 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사도의 영적인 영향 아래 있었으며, 이에 바울은 편지를 통한 가르침과 기도를 통하여 이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그리고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 등의 이단적인 요소를 가진 가르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부활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여야했습니다. 특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을 화목 시키는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골 1:20-22).
II. 화목을 위한 죽음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그들 안에 있는 하늘을 향한 소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3-4절). 그리고 이러한 복된 상태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그들이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5절). 그러므로 사도는 이들이 더욱 신령한 은혜와 지식 가운데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을 위해서는 단지 한번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9-10절).
A. 그리스도의 죽으심
사도는 먼저 신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감격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9-20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범죄 함으로 파괴하고 그 영광을 훼손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당신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화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해주시기 전에 인간들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1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지 못했던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그때의 우리의 삶은 악한 행실을 따르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영적인 빛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을 빚어내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의(敵意)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즉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 안에는 이런 절망적인 상태로부터 돌이킬 어떤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부르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당신과의 평화 속으로 불러 들이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그의 공급하시는 자원을 통해 살 수 있었습니다. 육체는 이 땅의 자원으로 살지만, 그의 영혼은 오직 하늘 자원을 통해서만 살 수 있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베풀어지는 은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관계는 단절되었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립되게 되었습니다. 죄는 이처럼 우리를 고립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난관(難關)을 타개(打開)하지 아니하고는 인간은 참으로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된 인간 스스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 그들을 화목 속으로 불러 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렇습니다. 이러한 화목을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에 대한 배상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22절上).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부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한 희생의 보혈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치루신 우리를 위한 속전(贖錢)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이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평화를 계속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하여 살아가는 많은 불쌍한 인간들에게 이런 평화를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이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으며, 또 사셨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B. 두 종류의 화목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목은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불변적(不變的) 화목과 가변적(可變的) 화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째로, 불변적 화목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획득되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것을 불변적 화목이라 함은 한번 수립된 하나님과의 화목은 결코 취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볼 때, 이 불변적 화목은 즉각적인 방식으로 획득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존하여 수립되는 화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대속적 공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화목은 즉각적 구원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불변하는 화목이니, 원리적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종류의 화목을 소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한 신자와 그렇지 못한 자연인, 혹은 불신자들입니다.
둘째로, 가변적 화목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로서 우리의 순종과 사랑에 따라 그 화목한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 가변적 화목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에 의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원리적으로는 중생과 함께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모든 신자들은 온전한 사랑과 순종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실제의 삶 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화목의 상태는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의무를 사랑과 믿음으로써 얼마나 성실하게 행하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은혜와 죄의 지배 사이에서 가변적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화목도 실제적으로 가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절망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분과 원수 된 우리를 단지 그 상태에서 한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원리적 평화를 이루신 것은 실제적인 평화 또한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그분의 통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다. 육체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부르셨으니,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 서라도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 없이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좋은 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마음에 짊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바라보며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 화목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III. 화목케 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 우리와 화목을 이루신 것은 단지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 후 아무렇게나 살아가게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거룩한 의무들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내팽겨 쳐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지시하는 성경의 모든 요구는 ‘율법주의적’이라는 이름 아래 매도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구원이 너무나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행하시는 모든 구원 행동에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당신의 선한 의도와 계획 없이는 그 무엇도 행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을 다시 화목하게 하심에 있어서 어찌 그 목적이 없겠습니까? 불변적으로 이루신 화목을 받은 사람들이 가변적인 화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실제적인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온전히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본문은 두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A. 거룩하게 하심
첫째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화목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선택됨으로써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의 전 존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됨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합당한 존재와 삶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1.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거룩함’을 지시하는 구약의 단어는 ‘카도쉬(vAdeq')’입니다. 그리고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를 ‘하기오스(a[gioj)’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구별’과 관계가 있습니다. ‘카도쉬’라는 단어 자체가 “자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중 하나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 존재하도록 구별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희랍어 ‘하기오스’는 원래 신에 속한 것들을 지시하는 단어였습니다.
신학적으로 ‘거룩함’이란 하나님과 고유하게 관련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이란 하나님 자신의 거룩에서 가장 잘 추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본체적 거룩함과 파생적 거룩함으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본체적 거룩함(essential holiness)이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파생적 거룩함(derivative holiness)이란 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덕을 입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의 효과를 갖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거룩함이란 필수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a. 존재적 초월성
거룩함의 한 요소는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숙고하여야 합니다. 첫째로, 연속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록 피조세계와 구별되시지만 그 피조세계를 통해 당신의 신성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창조주이신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지창조의 목적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로, 불연속성입니다. 이는 비록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분이시지만, 어떤 의미에서든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피조세계는 하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은 단지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일부분이 되실 수 없고, 피조세계 역시 하나님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모든 존재 위에 초월하신 존재로 존재하심을 가리켜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초월성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필수적인 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론적인 초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하심에 눈 뜨게 되고, 이러한 거룩함의 인식으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은 스스로 매우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티끌같이 인식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욥 10:9). 이처럼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를 인식하여 그분의 모든 지성과 의지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b. 도덕적 완전성
둘째,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분의 영원하심과 완전하심, 그리고 불변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도덕적 완전성은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에 대해 스스로 모순되지 아니하시며, 불변하시며 완전하신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도덕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많은 계명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도덕을 구현하기 위하여 제시된 하위의 기준들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은 곧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정하신 창조 목적에 부합하도록 존재하시며 행동하시는 완전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성은 미학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도 이러한 도덕성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그것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한계 안에서 도덕성을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과 신자의 순종하는 정도에 따라 완성도가 각각 다릅니다. 신자의 도덕성은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덕으로 그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지만 우리 인간에게도 자비심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의로우시지만 인간들도 의롭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그것들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일 뿐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많은 죄인들이 회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자신들의 도덕적 불결을 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불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하심 앞에서 자신들의 도덕성은 차라리 불결에 가까운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잘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삼위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거룩하심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거룩하게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거룩하심을 인간의 형상 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과 교통하며, 그러한 도덕적 목적을 따라 존재하고 행동함으로써 천지창조의 목적을 구현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신의 의도를 따라 계시와 상벌로써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도록 적절히 다스리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성취하도록 다스리시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도덕적 통치를 인간들을 통하여 구현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자연적 통치와 도덕적 통치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을 일정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가리켜 자연적 통치라고 부른다면, 도덕적 통치는 도덕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이 그 목적을 따라 삶을 영위하도록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통치는 따로 동떨어지지 아니하며, 전자의 통치는 후자의 통치에 기여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앞에서 이미 살펴본 거룩함의 두 요소에 따라 이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천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함에 눈 뜨게 됩니다. 크기와 넓이와 시간과 공간,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비교되실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 다음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것에 뛰어난 위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뼈 속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모든 사물들을 대하고 판단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거역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모든 불순종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키려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릇된 모든 사랑은 그릇된 인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하나님 되심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신이 그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생각과 행동과 믿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하심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겸손이 비롯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또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아무리 깊이 들어다 볼지라도 자신이 참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자기 밖에 계신 영원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을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해 참으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거룩함의 시작은 거룩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직한 인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이러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우 중요하고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의 존재는 참으로 하찮은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러하고, 도덕적으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가져다줍니다.
둘째로, 도덕적 완전성과 관련해서 입니다. 거룩함의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인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눈 뜨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결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뛰어나게 도덕적인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에게도 사랑이 있고,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유한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한시적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 둘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질적 완전성에 있어서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 전에 제법 올바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고 나면, 그 올바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하심의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여 자신의 도덕성 속에 깃든 약간의 영광과 빛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물과 불결로부터 점점 멀어져 완전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원천적 거룩함은 부동(不動)의 거룩함이지만, 인간 안에 있는 거룩함은 그 덕을 힘입어 끊임없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이행(履行)의 거룩함입니다. 신자의 의무는 바로 이러한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수록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연합되고, 더욱 더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인간 본연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나 보이게 되고, 이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힘입어 스스로 거룩하게 되어 가려는 노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단지 구원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즉각적인 구원의 거룩함은 점진적으로 성화하는 거룩함을 의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거룩해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또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성품 자체가, 전 본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며, 사랑하는 주님을 닮은 본성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B. 온전하게 하심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거룩하게 하심과는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흠이 없음과 둘째는 책망할 것이 없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거룩함의 요소 중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한 이 두 가지, 곧 흠이 없음과 책망할 것이 없음은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모든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두 기준은 우리의 도덕성의 정도와 표준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고, 그 덕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있고 발휘되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흠이 없고,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우리를 세우신다는 표현은 구약의 제사 문맥에서 끌어 온 것입니다.
1. 흠이 없음
첫째로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구약 제사의 문맥에서 나오는 제물의 자격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마땅히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초태생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 없는 제물은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헌제자들은 흠이 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 애를 썼으며, 흠이 있는 많은 제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 안에서 자신의 결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제물들 중 흠이 없는 제물을 찾아내는 것이 주의 깊음과 마음 바침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헌제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주의 깊음과 마음 바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 뜻을 따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공경하여야 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흠이 없는 자들로 세우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존재의 변화와 관련됩니다. 뒤에 나오는 책망할 것 없음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행실과 관련된다면 이것은 우리의 존재와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이중적이니,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행하는 모든 섬김에 있어서 온전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흠이 없는’이라는 말이 ‘책망할 것 없는’이라는 말보다 먼저 나오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신자의 모든 삶과 행위가 일치를 이루고, 그의 존재와 실천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죄 많은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흠이 없는 자가 될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이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아 그것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온전함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온전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높은 표준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미 이루었다’ 고백하며 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흠과 결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때 묻은 모든 삶은 흠 있는 우리의 성품과 영혼에서 비롯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자신이 정결케 되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변화되는 길 이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많은 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흠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게 될 때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 흠을 씻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나 우리 자신 안에는 그렇게 온전해지게 하는 원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외부로부터 오는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뢰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의존의 마음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실제적인 화목으로 나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불변적인 화목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변적인 화목, 즉 실제적인 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신자라면 그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 속에서만 흠이 없이 되기를 사모하며 추구할 수 있습니다. 가다가 포기하는 성화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애굽의 노역장 한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보다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목을 유지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과 가변적인 평화를 유지하며 살기 위해 끊임없이 온전한 인격과 성품의 사람이 되기를 애씀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며,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신의 옛 본성과 화목한 사람은 그 대가로 하나님과의 불화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옛 성품에 굴복한 자가 되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그의 의도에서 빗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그 죄와 더러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는 곤고함과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으로 인한 목마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온전해지기를 애써야 합니다. 온전해지기를 애쓰지 않는 자의 헌신은 흠이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무례한 헌제자의 헌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제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이는 그저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소욕대로 사는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적은 흠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온전한 자가 된 것처럼 자신의 부족에 착념하지 아니하며 부주의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많은 흠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자신의 허물을 인해 마음 아파하고 고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더 긍휼히 여기십니다.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 안에는 이처럼 자신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끊임없는 의향(意向)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변함없이 사랑의 대상과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삶의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허물과 많은 범과들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표지입니다. 맑은 물이라 할지라도 거품을 내며 움직이고 있다면 이로써 우리는 그 물이 불에 의하여 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많은 실수와 범과들은 하나님 앞에 진정한 경배자로 살기에 충분히 변화되지 않은 우리 자신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자신의 존재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발견한 자신의 흠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는 슬픔이 아니라면, 무엇으로써 그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겠습니까? 그렇게 발견한 흠들을 고쳐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려고 하는 그러한 노력 없이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자신을 구속하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는 참회와 자기 깨어짐 속에서 흠이 없이 온전해지기를 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며 사는 길입니다.
2. 책망할 것이 없음
둘째로 책망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화목 안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흠이 없게 되는 것이 존재와 인격에 관한 것이라면, 책망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은 그의 생활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행실이 나오며, 악한 사람에게서 악한 행실이 나오는 것이니, 이는 그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남은 있는 죄의 경향성 때문에 얼마든지 악을 행할 수 있으며, 그것이 대체적으로 선한 길을 좇아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책망할 죄책을 남깁니다. 때로는 아주 강한 의도가 있으므로 악을 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온전한 지식의 결핍으로 자신의 의도와 동떨어진 가운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행위와 실천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무지 또한 악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따라 알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알고자 아니한 것이니, 이는 자신이 선택한 무지입니다. 그래서 키더 민스터의 리처드 벡스터(Richard Baxter)는 이 무지를 ‘거의 악(almost evil)’이라고 하였지만,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는 ‘바로 악(very evil)’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재와 인격에 있어서 온전해지기를 사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교리가 가지고 있는 신자의 삶에 대한 총 포괄적 성격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 포괄적인 삶에 있어서 온전해지기를 애쓰는 사람만이 자신 안에 있는 책망할 많은 허물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진실하게 참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부주의함과 태만함으로 아무렇게나 행하던 그의 망나니 같은 행동들은 고쳐질 것이며, 그의 삶은 모든 방면에서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는 신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향한 교훈과 책망은 뛰어난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훈과 책망을 통해 당장은 아프지만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모든 힘으로 성취될 수 있을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온전해지려는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 지기를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이며, 또 그의 죽으심 안에서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IV. 결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목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수립된 하나님과의 화목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화목에 대해 낯설다면 그는 회심하기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맺은 채로 살아갑니다. 한 번도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화목에서 살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목마름도 분명히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그런 화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다시 어둠 가운데 있고, 마음은 허탄한 생각과 느낌들로 엉클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으로 인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입니다. 그러나 지식의 현저한 부족과 세상에 대한 질기디 질긴 사랑,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회복하려는 단호하고도 선한 의지의 결핍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영혼의 고통과 세상이 주는 은밀한 기쁨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살아갑니다.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져 부패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는 것은 정확하게 함께 갑니다. 무엇보다도 공격적인 성화의 삶의 의지로부터 물러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실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멈추어 있는 성화의 삶이란 없습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뒤로 물러가 부패하는 것이지, 결코 제자리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던 사람이 그 수영을 멈추게 되자 그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 불변하는 화목을 굳게 붙들고, 실제적인 삶에서의 화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온전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은혜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시 50:14-15)”를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두 가지 화목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실제적인 화목을 누렸던 경험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3.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함이 내포하는 두 개의 필수적인 개념에 대해 나누고 적용해 봅시다.
4. ‘흠이 없게 하시고’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헌제의 맥락에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삶과 관련하여 본성과 행동의 연관성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5. 하나님과의 화목을 실제적인 삶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200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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