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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4: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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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위로가 되는 사람
(골로새서 4장 7-11절)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
바울은 총 3번 선교여행을 갔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의 파트너는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1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자고 바울이 제안해서 제 2차 선교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때 이견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선교여행 도중에 되돌아간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안 된다고 해서 심히 다투고 갈라섰습니다(행 15:37-39). 하나 됨을 강조하고 복음에 헌신적이었던 그들이 싸우고 갈라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의 본능 안에는 분열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큰 문제보다는 작은 문제로 그 씨앗이 발아할 때가 많습니다. 부부싸움도 대개 사소한 일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항상 웃고 밝은 표정을 하십시오. 웃어주면 같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그처럼 작은 일부터 잘하고 매일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도록 말과 표정을 통해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큰 문제들도 저절로 풀립니다.
살다 보면 가끔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갈라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라짐을 통해서는 어떤 선이 생겼습니까?
첫째, 선교지가 넓혀졌습니다. 결국 2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두 지역 다 1차 선교여행 때 들렸던 곳으로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고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두 지역을 각자 분담해서 열심을 냄으로 선교지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일부 교회 리더들이 왜 더 전도에 열심을 냈습니까? 바울이 없어도 부흥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들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처럼 동기가 불순했지만 그래도 복음이 전파된다면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부흥이 분열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교회가 갈라진 후 각자가 상대보다 잘 보이려고 더욱 열심을 내서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순한 동기에서 한 일까지 좋은 결과로 만드십니다.
둘째, 분열 당사자들에게 성숙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자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선 것을 알고 크게 뉘우치고 더욱 근신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웠다가 순교하고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큰 업적도 남겼습니다. 바울도 그 일로 인해 보다 관용적인 인물이 되었고 나중에 바나바 및 마가와 화해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다투고 갈라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에게는 실라란 좋은 파트너를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예루살렘 총회 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가 바울의 평생 동역자자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라 유대인 전도에도 유익했고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이방인 사역에도 유익했습니다. 바나바와의 이별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 하나님은 실라를 준비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이별의 아픔 후에 새로운 만남을 통해 선을 이뤄 가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처럼 서로 다투고 헤어졌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분열적 본능으로 잘못된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뤄 가십니다. 그러므로 실망할 일을 만나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 소명감의 중요성 >
왜 마가가 도중에 포기했을까요? 마가는 <요한>이란 히브리식 이름과 <마가>란 로마식 이름을 가진 유대인으로서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생길 때 그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볼 때 부친은 사망하고 모친만 생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의 집에는 대문을 지키는 하녀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다락방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부유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그의 집이 몇 차례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도 마가의 집이었고,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한 곳도 마가의 집이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인들이 모여 기도했던 곳도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모친과 함께 헌신한 믿음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선교 도중에 포기했을까요? 출발 때부터 구브로까지만 가려고 했다는 설도 있고, 외삼촌인 바나바가 바울에게 리더십에서 밀린 불만으로 이탈했다는 설도 있고, 예루살렘에 있는 어머니가 그립고 선교여행이 너무 힘들어서 이탈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에게 선교사 소명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건실한 청년이고 믿음도 좋고 헌신적인 사람이었지만 선교사로서의 소명은 부족했습니다.
사람마다 맡겨진 일이 다르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정만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하면 아무리 소중한 일도 감당 못하고 도중에 하차합니다. 왜 사역자가 사역에 열매가 없고 실패합니까? 믿음이 부족하거나 헌신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대인관계가 문제입니까? 대인관계가 좋아도 목회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소명과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직업도 소명을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요즘 한국의 1%가 다 의사가 되려고 하니까 얼마나 부작용이 많습니까? 옛날에는 수재들이 물리학과와 같은 순수 학문에도 많이 지원했지만 요즘은 소명보다 수입만 생각해서 장래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명 없는 직업은 실패하고, 혹시 외형적으로 성공해도 만족과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다고 다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기 일을 찾아야 도중에 하차해서 피차에 실망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마가 때문에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처럼 어떤 일을 하다가 그만두어서 실망만 남기지 않도록 지금 하는 일이 정말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물러서지 마십시오. 소명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그 일을 멈추게 못합니다. 그처럼 소명에 죽고 소명에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는 좋은 일꾼이 됩니다.
< 위로가 되는 사람 >
본문에는 바울이 마지막 인사를 통해 그의 사역을 회상하며 마음에 기억나고 힘과 위로를 준 사람을 열거합니다. 누가 위로가 되는 사람일까요?
1.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두기고는 소아시아 사람인데 바울의 조력자로서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가 골로새에 간 것은 본 서신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바울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고 또한 남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8절).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목회자나 선교사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스스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누군가 말해주면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이 감동해서 그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리더에게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중개인을 브로커(broker)라고 합니다. 브로커라면 어감이 좋지 않게 들리지만 브로커는 원래 ‘깨뜨리다’는 뜻을 가진 ‘break’에서 나온 말로서 중간에 막힌 장벽을 깨뜨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전문지식이 없어서 장벽을 못 넘고, 말하기 곤란해서 장벽을 못 넘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장벽을 못 넘을 때 그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 장벽을 깨뜨리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브로커입니다.
나쁜 브로커는 자기 이익을 위해 장벽을 깨뜨리기보다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런 나쁜 브로커가 아니라 장벽을 깨뜨리고 사정을 알아주는 거룩한 브로커를 만나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두기고는 그런 거룩한 브로커였습니다.
두기고뿐만 아니라 오네시모도 그랬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서 로마로 도망쳤기에 당시 법에 의하면 그는 죽여도 되는 중죄인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개한 후 신실한 믿음으로 바울의 사랑을 받습니다. 복음의 힘이 이토록 큽니다. 노예조차 복음 안에서 충성하자 그의 가치가 크게 상승한 것을 보십시오.
옛날에는 노예가 최고 권력자가 된 사례가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대개 보면 최고 권력자인 주인에게 충성하면서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결국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최대 요인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인물이면 충성스런 종도 인물의 길이 열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왜 성도에게 축복 가능성이 항상 넘치게 됩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과 바울을 만나서 인생이 펴진 사람입니다. 그도 가는 곳마다 바울의 사정을 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바울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그의 사면을 청하는 편지까지 보냈고 그것이 성경 빌레몬서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처럼 좋은 리더를 만나 그의 사정을 알아주며 충성하면 상상을 초월한 복된 삶이 그의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함께 하는 사람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 구절에 나오는 이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 살던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고난에 적극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보통 때의 동역(同役)도 힘이 되지만 힘들 때의 동고(同苦)는 더욱 힘이 됩니다.
믿음의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고난 중에도 충성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축복의 강자가 되십시오. 고난 중에도 십자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같이 거주하는 동거(同居)보다 같이 고난 받는 동고(同苦)가 중요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동고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로 팀으로 사역했기에 늘 신실한 동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을 최고로 감동시킨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는 설교했다는 기록도 없고, 기도의 용사란 기록도 없고, 위대한 전도자란 기록도 없었지만 바울이 고난 중에는 항상 곁에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도 로마 감옥에 자진해 갇힌 존재처럼 되어서 바울의 옥중수발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로 인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인물이지만 아리스다고도 인물입니다. 바울 혼자 세상을 복음화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서로의 필요와 부족을 채워주며 함께 일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숙을 막습니다. 교제를 하다 보면 아픔도 생기지만 그 아픔 속에서 신앙과 인격이 자랍니다. 특히 좋은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면 수시로 찾아와 “왜 그렇게 했어요?”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오래도록 묵묵히 성원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이 큰 힘이 됩니다.
3.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
회개하면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은 시작됩니다. 회개는 아픔과 상처도 낫게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진 후 오랫동안 못 만났지만 시간이 지나고 치유의 영이 임하면서 감정을 풀고 서로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 6절에서 바울은 바나바를 자신의 동료로 언급했는데 그때가 헤어지고 약 10년쯤 후의 일입니다.
마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를 의지가 약한 청년이라고 꾸중했지만 나중에 그의 옥중 수발을 한 사람이 바로 마가였습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에게 위로를 준 마가를 영접하라고 한 것입니다(10절). 그로부터 약 3년 후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에 디모데후서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가가 보고 싶다. 내 일에 유익한 마가를 데려오라(딤후 4:10-11).”
사람은 이별의 아픔을 딛고 얼마든지 작품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치유의 영이 임하면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 깊은 상처도 아뭅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분리는 일시적인 분리이지 영원한 분리가 아닙니다. 이별해도 같은 성도이고, 결국 천국에서 만날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늘 회개와 화해에 탁월한 심령들이 되십시오.
같이 지내다 보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몇 천 개도 더 되지만 서로 사랑하면 그런 불일치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불일치해도 사랑으로 불일치하고, 혹시 이별해도 존중하며 이별하십시오. 과거의 상처를 잊으십시오. 과거와 싸우면 미래로 나갈 수가 없고 과거의 삶에 얽매이면 현재의 삶이 무너집니다. 작품 인생은 아픈 과거를 잘 잊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처럼 상처를 통해 열매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4.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유스도는 로마 이름이고 예수는 히브리 이름입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는 할례파, 즉 할례 받은 정통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시 할례파 유대인은 복음을 배척했고 복음을 믿어도 유대주의를 쉽게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갇힌 바울을 거의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거룩한 꿈과 비전을 공유하며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이 내 위로가 되었다!” 그처럼 꿈과 비전에 함께 하는 동역자가 있으면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2008년 초 교회가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한 그룹이 떼 지어 등록했다가 떼 지어 나갈 때 기존 교인들까지 왕창 휩쓸려 나간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떠날 때 오히려 가까이 온 몇 명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때문에 그 이후에 큰 힘과 위로를 얻어서 찬란한 꿈과 비전을 향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그분들 중에 2분이 권사로 임명됩니다. 정말 가슴 벅찬 순간입니다. 그분들이 앞으로 더욱 충성하고 힘과 위로를 주는 권사님들이 되도록 함께 기도해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원대한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성경 66권 전권 설교파일을 만들고 네트영어를 통해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돕는 원대한 꿈입니다. 그 꿈은 은혜 받은 동역자들의 기도와 협력이 있어야만 꽃필 수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내일의 위대한 일을 꿈꾸며 작은 제단에서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 그 기초 터전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때로는 큰일이 작은 일이고 작은 일이 큰일입니다.
<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
미국에 토니란 콜택시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새벽에 그는 콜을 받았습니다. 지정된 곳에 가서 벨을 누르자 한참 후에 1940년대의 단정한 복장을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할머니! 그러면 돌아서 가는 겁니다.”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전 시간이 많아요. 지금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식구도 없으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어둠 속에서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요금 미터기를 껐습니다. 그로부터 2시간 동안 둘은 함께 크리스마스 새벽에 거리를 드라이브하며 할머니가 젊었을 때 엘리베이터걸로 일하던 빌딩도 가보고, 처음 댄스파티에 갔던 무도회장도 가보고, 신혼 때 살던 동네도 가보았습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그만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기사님! 이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주어서 감사했어요.”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그때 그가 요금 미터기를 끈 순간은 내면의 아름다운 존재를 불러낸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윤을 따라 일하던 그가 한 할머니의 외로움에 공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뤄낸 것입니다. 그 일은 작은 일이 아닌 큰일이었고, 그때 그는 작은 사람이 아니라 큰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합니다(눅 16:10).
이제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살펴주십시오. 자기 아이와 놀아줄 시간도 없고, 이웃의 기도제목에 동감할 줄도 모르고, 계절의 변화를 음미할 줄도 모르면 세상에서는 유능한 일꾼으로 인정받아도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그 말은 사람은 본래 ‘서로를 위한 존재’란 뜻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람됨은 남의 아픔에 공감할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선교사님들을 최대한 도우려고 하고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위해 최대한 나누려고 합니다. 어려운 우리 형편에 주제 넘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재원이 부족할 때도 목회자 사례보다 선교후원에 먼저 지출하는 교회는 우리 교회 말고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자랑으로 듣지 마시고 나눔에 대한 절실한 도전으로 들으십시오. 요새 네트영어의 비전이 더욱 절실한 이유는 선교후원과 나눔의 절실한 소명을 안정적으로 이뤄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의 사슬을 푸는 것이 주님의 존재이유였습니다. 그 주님의 존재이유를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직분자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처럼 충성하면 어떤 시련이 닥쳐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덜 중요한 사람이나 외면해도 괜찮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군중'으로 보시지 않고 소중한 한 사람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만남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병자들은 치유 받았고, 매인 자들은 자유를 얻었고, 소외된 사람들은 살맛을 찾았습니다.
맡은 사명에 충성하십시오. 운전기사 토니가 요금 미터기를 끄고 외로운 할머니의 벗이 되어준 것처럼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많이 만드십시오. 너무 큰일만 생각하느라고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가장 소중한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시간은 지금입니다. 특히 거룩한 비전을 위해 사랑의 구조선과 공급선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십시오. 그처럼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소명인 나눔의 소명을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 고난 중에도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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