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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골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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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1-15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성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I. 인성과 신성의 결합
세상에서 지위도 없고 많이 공부하지 못한 부모라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을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서 이 세상에 이바지하고 또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부모가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원인인 것은 맞지만 부모가 나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육신적으로는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 그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한다면, 육신 뿐 아니라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영혼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모이신 하나님도 모르고 또 그 마음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들에게 그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힘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 최대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동시에 사람의 본질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만을 가지고 생각하자면 단순한 사람일 뿐이었으나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영혼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본질이 서로 섞이지 않고 나누어지면서도 한 영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참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고, 동시에 참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내려오셔야 했던 이유는 원수가 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해서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셔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셔야 했습니다. 어느 한편만을 위하면 진정한 화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하나님이셔야 했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무한하신 분이셨습니다. 한계, 끝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끝이 없으신 분이었는데,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유한하신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는 유대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식사하시는 동안에는 복음을 전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 하나님으로서만 오셨다고 한다면 어디든지 다 계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유한세계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II. 영혼의 탁월성
예수님의 육체는 죄인들의 육체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로서는 어떤 탁월성을 가진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과 다르게 만드는 탁월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당연히 영혼에 있습니다. 그러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간의 영혼은 죄에 물들어 있는 영혼이지만, 예수님의 영혼은 죄가 전혀 없는 순결한 영혼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본질로만 이루어진 영혼이지만,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들어있는 영혼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이 여러 면에서 나타납니다.
A. 지성
첫 번째는 지성입니다. 그분이 아시는 것과 인간이 아는 것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놀라운 지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고,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그 사람이 사악한 사람인지 참된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는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영혼이 인간의 영혼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니까 태어나시자마자 모든 언어를 다 깨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 아빠’ 이렇게 말을 배우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 배우시면서 성장해 가셨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영혼 안에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있었는데, 인간의 본질을 없애버렸다면 예수님은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이 전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본질로 하나님의 본질을 감추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인간의 연약한 본질 아래에 감추셨기 때문에 어린 아이일 때 하나 둘씩 배우면서 예수님의 지성과 생각이 점점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인간이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지식을 순간순간 가지고 계셨으니 이는 바로 예수님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 그때마다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B. 능력 - 인간 : 성령, 그리스도 : 신적 본질+성령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맨 처음 공생애에 들어서시면서 설교하신 곳이 고향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이전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그때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경험을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치시는 순간 경험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권세와 힘이 느껴졌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은 허름한 모습일 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셨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렇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취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바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유대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거기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키셔서 세상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유명한 율법사들이 와서 설교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엎드리게 하는 말씀을 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병든 자들도 낫게 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하여 무너진 마음, 심지어는 귀신들린 사람들까지도 말씀 한 마디로 그를 고쳐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셨단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오직 성령의 능력 때문이지만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은 단지 성령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 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힘입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C. 사랑
앞의 두 가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향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어서 거기에서 흘러나온 사랑이고 또 하나는 그런 사랑은 없지만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있는 성향 자체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성향으로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진리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하셨고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를 향해서 저주하고 욕하는 대신 가슴 아파하시며 십자가에서 못박힌 채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든 생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이 사랑의 절정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못박혀야 할 그 십자가에 대신 못박히신 고난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혼의 탁월성입니다.
III. 성육신 하신 목적 : 창조목적의 회복
그러면 그렇게 탁월한 영혼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과 수많은 사물들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 인간을 당신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셔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시고 그것들을 다시 살리실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맡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서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잘 알아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계속 가꾸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매우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때 아름다움은 드러난 아름다움과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봉사하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인간이 애쓰고 노력해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이 애를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남겨두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순종하면 이 세상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정교하게 만드셨습니다. 육체는 땅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게끔 하셨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을 먹으며 건강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오는 자원도 끊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땅의 것들과 올바르게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육체로는 괴롭고 곤고하고 죽음의 기운에 삼키우며 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더 이상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도 없거니와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되는데 달을 섬기고, 별을 섬기고, 물고기를 섬기고, 소를 섬기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말씀으로, 능력으로, 그의 인격으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신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돌아오게끔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하나님이 당신을 떠난 인간을 부르시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바로 그것입니다.
IV. 성육신하신 이유
그러면 그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즉 어떤 일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입니까?
A. 죽으시기 위함
첫 번째는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죽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보상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은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인 것입니다. 부모가 빚을 지게 되면 자녀들도 그 빚을 유산으로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죄에 참여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죄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위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다 망가뜨렸으니 인간이 지은 죄는 한없이 큰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 반드시 배상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자녀들의 잘잘못에 대해 부모가 일관성 없이 훈계하고 벌을 주고 칭찬을 하였다면, 자녀들이 그 부모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 대가를 지불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지은 죄대로 배상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모두 파멸해도 그것을 배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하실 사람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율법을 따라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단지 인간이었다면 받은 형벌의 크기가 유한했을 텐데 죄 없으신 또 하나님이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당하신 형벌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지은 인간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모두 배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로 돌아올 수 없는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천년 전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자신이 지은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당한 형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이제껏 자기가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깊이 자각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은 무릎을 꿇는 것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신앙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고,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B. 모본을 보이심
1. 하나님 : 사랑, 지혜, 능력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또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이 모든 것들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게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섞여서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육신의 모습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를 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믿음을 기뻐하시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문둥병이 걸려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 헌데를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보면서 사람들이 버린 자들도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사실 또한 말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물고기와 보리떡을 나누어 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영혼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면서 사는 우리를 위해서 백합을 입히시듯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듯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분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주 연약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위대한 하나님을 보고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비밀들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인간 : 사랑, 순종
뿐만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인간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죄를 제외하고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 인간의 연약한 몸을 가지고 똑같이 노동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가난과 결핍, 굶주림 그리고 많은 핍박 가운데서 일생을 사셨기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인생이 자신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는데,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영혼들을 사랑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며 철저히 낮아진 종으로서 섬기면서 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보면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운지 알게 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또 하나님을 섬기듯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빛으로 오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V. 결론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그 문제의 해답은 우리 인생에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그분에게 답이 있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세계가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나도 그분을 통하여 이 세상에 지은바 되었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나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이 비참한 인간, 나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인생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내려오시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모든 대답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오직 그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극복할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을 보는 눈도 없고 어리석어서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돌아오는 것이 불행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예수님 안에서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되어 우리의 인생이 밝은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등불이시며 우리의 길에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캄캄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들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향해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당신이 직접 사신 것처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힘써 아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결국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문제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껏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원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고, 나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돌아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한없이 받으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200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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