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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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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제목 : (8강) 교회의 일꾼
본문 : 골 1:24-29
<본문>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4-29 개정)
<설교>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실력의 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 요리, 운동,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분야 모든 일에 실력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고 실력의 좋고 나쁨에 따라 대우가 달라집니다. 때문에 실력이 좋지 못한 사람은 무시와 함께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실력이 좋은 사람만이 좋은 대우와 함께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소위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에도 실력의 차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도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앙에 실력의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곧 모든 신자의 신앙 수준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 자신의 신앙을 비교 해봐도 그렇고, 스데반이나 복음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갔던 신앙인들을 생각하면 보면 누가 봐도 우리보다는 더 나은 신앙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잘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죄의 유혹과 시험 등을 이기는 사람을 실력 있는 신앙인으로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실력이 있는 신앙인으로 만들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에 실력의 차이가 있다면 신앙의 실력과 천국의 문제는 어떻게 연관될까요? 천국도 신앙의 실력에 따라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면 천국은 신앙으로 들어가되 실력의 차이에 따라 주어지는 상이 다를까요? 항상 외적인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계산하는 습성이 있는 우리로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거짓 선생으로 인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어찌 생각하면 신앙의 실력이 없는 결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골로새 교회가 성경을 많이 안다거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즉 실력이 있는 교회였다면 거짓 선생이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미혹을 한다고 해도 옳고 그른 것은 분별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골로새 교회의 혼란이 실력의 문제였다면 사도의 서신은 골로새 교회의 실력의 향상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갔어야 합니다. 즉 이단이나 거짓 복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미흡한 성경 지식을 보충하기 위한 내용의 서신을 기록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서신을 보면 그런 느낌은 전혀 받을 수가 없습니다.
13절을 보면 사도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가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몰라서 혼란이 발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에게 가르침을 받은 에바브라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진 교회라면 아들로 말미암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고 아들의 나라로 옮긴바 되었으며 아들 안에서 죄 사람을 얻었다는 복음의 내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사도는 4,5절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골로새 교회가 이미 복음을 알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과, 아들 안에서 죄 사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사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고 십자가의 화평을 이루셨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그들을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음을 말합니다. 이 역시 골로새 교회가 전혀 몰랐던 내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이러한 내용들을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거짓 선생의 말에 미혹되고 혼란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것이 거짓된 미혹을 이기는 힘이 된다면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더욱 깊고 많은 복음의 내용을 가르치고자 했을 것입니다. 즉 골로새 교회가 배우지 못한 신학적인 깊이 지식을 전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복음의 근본이고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미혹을 받는 것은 복음의 지식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의 지식의 여부가 믿음과 연관이 있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신학자들, 또는 목사들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음의 지식은 믿음과는 연관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신자로 하여금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를 말하나 땅의 것에 집착하고, 십자가를 말하나 내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우리가 내 욕망에 맞추어 전달되는 말에 미혹될 때, 그런 우리 마음을 또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려놓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생들의 복음은 신자를 믿음의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을 위해 할례를 행하고 절기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진 예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합니다.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얻고 예수님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신 예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복음이고 이 복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목표라는 것을 세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몇 명 전도, 예배당 건축, 교육관 건축 등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신자의 본분이라고 말하지만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그러한 내용은 없습니다.
25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말하고 교회 일꾼 된 것을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봉사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말하는 교회의 일꾼이라는 의미는 오늘날 교회가 생각하는 것과는 그 방향 자체가 달랐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 성장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말하면서 그것을 교회의 일꾼된 것으로 가르치지만 사도에게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이 주어질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의 악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가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될 때 풍성해지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풍성해지는 것이야 말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풍성해지는 것을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그것을 교회의 일꾼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백성들을 이미 충만한 존재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가 풍성한 신자가 곧 교회의 충만이고 그러한 신자로 말미암아 교회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숫자가 적다고 해서 부족함이 아니고, 신앙의 행위가 남보다 못하다고 해서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은혜의 충만은 무시해 버린 채 자신의 행함과 실천으로 자기의 부족함을 메우고, 그로 인해서 믿음의 충만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복음이 아닌데, 사람들은 오히려 당연한 말로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행함과 실천을 가르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를 방종으로 나가게 하는 잘못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물론 믿음에는 행함과 있고 실천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인간의 의지의 결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매일 순간순간 성령의 활동에 참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믿음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내 의지로 인한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에 참여된 흔적이고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고 이 복음이 신자를 은혜의 풍성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연히 주어지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 일꾼의 자세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짊어진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실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말씀으로 인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킴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한 순간 우리는 복음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
날마다 십자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우리를 십자가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쉬지 않고 전해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이 직분을 가리켜서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신자는 이러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할 일은 예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온 힘을 다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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