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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3: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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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제목 : (18강) 새 사람의 삶
본문 : 골 3:12-17
<본문>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2-17)
<설교>
신자는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삽니다. 그런데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는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으로서 내적과 외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가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죄에 속하여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중생하고 새롭게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인격, 새로운 본질, 새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자가 중생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반드시 예전의 행동이나 삶과는 달라야 한다는 기대로 인해서 새사람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가령 롬 6:19절을 보면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옛사람으로 살 때는 나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 살았다면, 성령으로 중생하여 새사람 되어 살 때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날 위해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내 이름과 영광이 아니라 자신을 의에 이르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곡해한 사람들은 위의 내용을 지체로 부정과 불법을 행하던 사람이 의롭고 거룩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곧 새사람 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구원에 대한 혼란과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된 이후에도, 또한 중생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보일 때마다 ‘중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죄와 사망에 속한 사람입니다. 새사람인 신자는 의와 생명에 속한 자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본질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성격, 기질 등은 동일합니다. 새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오해합니다. 새사람이 된 신자는 그 성격과 기질이 신자답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새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따로 존재한다면, 모든 신자는 동일한 성격과 기질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과격하고 급한 성격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새사람 된 신자의 변화된 성격이라면 모든 신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동일하게 변화되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 성격과 기질이 획일적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있습니다. 삶의 방향이 동일하고 그 내면에 담고 있는 내용이 동일합니다. 의와 생명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다를 수 없고, 믿음 또한 다양하지 않고 하나이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믿음을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행동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러한 복음을 외친 적이 없습니다. 사도의 복음의 내용은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생이 말하는 복음은 그 중심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변화되고 달라짐으로써 인간이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교묘한 말로 복음을 왜곡합니다.
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는 말을 하고, 6절에서는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의 내용이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에 있는 지체, 즉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옛사람의 성품이니 새사람이 되어서 그 성품들을 없애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뜻일까요?
그러한 새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음란과 정욕과 부정과 사욕과 탐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로 삽니다. 결론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착함과 선함을 실천하다고 해도 음란이 있고 탐심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인간일 뿐입니다. 착하게 산다고 해서 진노를 거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이 인간의 성품과 기질이 변화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복음은 악한 인간을 선한 인간으로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악한 인간은 여전히 악할 뿐이고 인간이 주장하는 선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 의한 판단일 뿐입니다. 복음은 변할 수 없는 인간의 악함을 보게 하는 것이고, 악한 자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의로우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선도 의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믿는 그가 의에 속한 새사람입니다.
이런 이유로 새사람 된 신자에게는 인간의 행동과 실천의 여부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새사람 된 신자가 모인 자리에서는 인간의 행동과 실천의 정도로 인한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실천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옛사람으로 모인 자리에서는 필연코 차별이 나타나게 됩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나뉘게 되고 유대인 헬라인으로 나뉘게 됩니다. 할례자는 무할례자를 비방하게 되고 무할례자는 할례자를 율법에 매인 자로 비방합니다. 인간의 행함과 실천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말을 합니다. 옷 입는다는 말은 실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요즘은 멋으로 패션으로 이해하지만, 과거에 옷은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은 왕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그 신분을 나타내었고, 신하들도 각기 다른 옷으로 그 신분을 나타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제사장의 복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규정한 대로 만들어 입음으로써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나타내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옷 입고’라는 말은 구약적 용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옷 입은 자의 역할과 그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새사람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은 자로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나타내고 증거해야 할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영으로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동일하게 함께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차별은 나타날 수 없는 옛사람의 행위일 뿐입니다. 이처럼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역할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신자이며 성령이 오신 이유입니다.
새사람 되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성형 수술하여 고치는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신앙적인 부분을 수술하고 뜯어 고쳐서 마음에 들도록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고치고 성격을 고쳐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형 수술을 해도 타고난 본질까지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행동을 고치고 성격을 고친다고 해도 인간의 악한 본질은 결코 변하지도 고쳐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옛사람과 새사람을 말함으로써 믿음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데 그런 인간이 무슨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한 실천을 가르치고 실천과 행함이 복으로 되돌아온다는 말들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시고 나에게 함께 해주시는 것이야 말로 참된 복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복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행함과 실천을 내어 놓고 그것으로 잘함과 못함을 따지고 구별하면서 신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의 세계일뿐입니다.
신자는 새사람으로써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서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에 해당되는 모습이 나와져야 합니다. 즉 옷 입은 그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옷 입고 있다면 용서에 걸맞은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역할이고 신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고 여러분의 마음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자라는 존재성입니다. 무엇이 신자인가를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해서 신자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분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잘난 자가 있을 수 없고 못난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옷 입고 용서를 받은 자로 모일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평강입니다. 이 평강을 위해 한 몸의 관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신자고, 평강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옷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자가 주 안에서 함께 한다면 서로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불만이라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하는데 세상이 내 기준과 내 취향에 맞추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불만도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신자가 맞추어야 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삶에 맞추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 여러분께 주어진 신자라는 신분을 지혜롭게 이해하시고 분별하셔서 신자다운 길을 걸어가시며 그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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