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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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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007년 3월 17일(토) 텔아비브 교회 예배
본문 : 골로새서 1:24-29
올 초에 한국 교회의 공통된 기도 표어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AGAIN 1907, REVIVAL 2007'이었습니다. 즉 올해가 평양 대부흥 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그것을 기념해서 한국 교회에 다시금 평양 대부흥 운동과 같은 영적 대부흥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도회가 년초에 전국적으로 있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지금 'Again 평양'을 외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압니다. 교회 수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체에 빠진 교세를 다시 키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만일 그 운동이 단순히 교세를 키우고 교회 수를 늘리고자 하는 그런 의도에서 진행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평양대부흥 운동은 구한말 일제에 의해 강점을 당해 나라가 망했을 때 일어난 영적 대부흥운동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민족에게 하늘의 희망을 심어주어 준 운동이었고, 병들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고 회복시켜주었던 운동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인들은 정말이지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낸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금 부흥을 외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그것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것이 'Again 평양대부흥 운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텔아비브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아직 정식 창립예배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이 되었지요.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또한 교회를 세워나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그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25절에 있는 '일꾼'이라는 단어입니다. 23절에는 '복음의 일꾼'으로 표현이 되어 있고, 여기서는 '교회의 일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꾼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목회자나 사역자에게 국한된 단어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여기서는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일꾼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교회 일꾼'이란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나라, 말 그대로 일꾼입니다. 헬라어 ‘디아코노스’ (diakonos)를 번역한 말인데, 이 헬라어에서 영어의 “deacon”, 즉 “집사”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아코노스”는 특별히 성직자들에게만 사용되던 단어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종'입니다.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이 단어들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종' 혹은 '일꾼'이라고 할 때는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갖는 '종'의 느낌과 당시 사회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느낌의 차이가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노예 신분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를 '종' 혹은 '일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자원해서 종이 되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딱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종으로 있던 자를 희년이 되면 빚을 탕감해주고 자유인으로 보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주인의 종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이전과는 다른 지위를 가집니다. 종은 종이되 자유를 가진 종입니다. 즉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지만 주인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종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유인이고 주인도 그를 종으로 여기지 않았고 친구로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할 때는 그런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런 종을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모두 주인을 사랑해서 한 일이기에 일을 하고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종은 또한 겸손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꾼된 자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꾼이란, 종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며, 그 사랑을 알기에 기꺼이 즐거움으로 또한 겸손함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을 주의 종으로, 교회의 일꾼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위기가 무엇입니까? 이런 의식, 이런 정체성을 가진 일꾼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교회의 일꾼으로 알고 즐거움으로 헌신하고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꾼들이 많을 때 교회는 교회다울 수 있고 참다운 주님의 교회로 서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교회를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목표의식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간다. 왜 가는가? 아마도 교회에 가기 위해서 가는가 보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왜 드리는가? 아마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드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기도한다. 왜 기도하는가? 아마도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한다. 왜 공부하는가? 아마도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봉사한다. 왜 하는가? 아마도 봉사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 신앙생활도 하고 봉사는 하고 무언가 교회를 위해 일은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고 한다는 것을 꼬집고 있는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표를 상실한 채 종교적인 형식이나 행위에만 치우치고 그저 습관적으로 혹은 체면치레 정도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교회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기력해지고 세속화되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일의 목표를 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이유, 목표는 무엇입니까? 25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이 일꾼이 된 것은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나 명예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26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비밀”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7절에 의하면 비밀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핵심에 놀라운 비밀을 담고 있으며,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꾼 된 자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예언으로만 메시아 탄생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습니다. 예언은 숨겨진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비밀이 이스라엘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이 비밀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으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이 비밀을 알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방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우리에게까지 그 비밀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가야할 비밀입니다.
얼마 전에 성지순례 안내를 하던 중에 아랍 기사와 함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들 모슬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느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을 수 있냐고 묻더군요. 모슬렘은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에 다시 오는 선지자로 믿을 뿐입니다. 그 친구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수도 없고, 교리적인 부분으로는 어렵겠다 싶어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제 경험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희들보다 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가 어렵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겠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가능했다. 내가 알고 있는 유대인 중에는 랍비 출신도 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었단다. 그리고 정통파 유대교 여자였는데, 구약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되었단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예수님을 만났고, 참으로 힘들었을 때 그분의 음성을 내 귀로 들었었다. 예수님을 살아계시다. 내 안에 살아계시고 느껴지고,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잠시 주춤하더라고요. 뭔가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분은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더군요.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왭니까? 예수님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비밀이에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알 수가 없어요. 그 비밀은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왜 행복합니까? 왜 이유 없이 찬양이 나오고, 왜 이유 없이 감사가 터져 나오고, 왜 이유 없이 눈물이 납니까?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세상이 천국 같아집니까? 그 비밀을 알았거든요. 알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은 비밀이에요.
그 비밀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 이것이 교회의 일꾼된 자들의 목적이고 교회의 존재이유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모슬렘들에게도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소수의 유대인들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모슬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이고, 이 뜻에 따라 교회는 세워져야 하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것을 위해 일꾼들로 부름 받았지만, 일꾼의 목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8절에 그 구체적인 목표가 나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여기에 보면 중요한 동사 셋이 있습니다. “전파하여”, “권하고”, “가르침은”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이 '전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 우리가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믿도록, 예수님 의지하도록, 예수님을 따르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의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권고하고 가르치는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입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은 단순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도 없이 맹목적으로 일을 하거나, 자기 명예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사역이 있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 일 중심의 교회가 있고, 내면 중심의 사람, 내적 성장 중심의 교회가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이 언듯 보면 열심인 것 같고 열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일 중심의 교회가 활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 중심의 사람, 일 중심의 교회는 그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퍼팩트한 사람, 즉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예수님 닮은 성도들도 가득 찬 교회입니다. 모든 성도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닮은 제자들로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목회자도 성장하고 교인들도 성장해야 합니다. 왜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까? 성장이 멈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장이 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영성, 인격, 대인관계를 닮아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이것이 교회의 일꾼된 자들이 잊지 말고 힘써야 할 목표입니다. 교회에 많은 행사가 있고 계획이 있고 프로그램이 있지만 모든 것들이 여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적인 행사, 자체적 만족을 위한 행사, 일을 치르고나서 서로 상처받아 분열되는 그런 행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3년 생애를 요약하면 자신을 닮은 제자들을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핵심적인 사역이란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역시 이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고, 그래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이런 교회야 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 교회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를 위하여”, 곧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바울은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힘을 다하여 수고 한다”는 말은 모든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최선이나 수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강권하심이 함께 하는 수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일을 할 때는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을 따라 수고할 때는 갑절 이상의 능력이 있고 기쁨이 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들은 이처럼 자신의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는 능력의 원천은 성령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세워나가는 과정에 겪는 어려움들 앞에 굴하지 않을 수 있고 많은 장애물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교만과 자기주장에서 오는 분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된 자들이 왜 수고를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서 오랜 기간 동안 논란이 있었던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의 고난으로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이 해결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니,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완전하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고난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남은 고난을 바울이 채운다는 말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의 고난은 완전한 것이며 충분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 인간 구원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회심하기 전의 바울, 즉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로 다메섹으로 갑니다.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묻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사울은 그전까지는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직접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나를 박해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지금도 그의 교회와 성도들 안에서 고난을 받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받는 고난, 그분의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과 어려움들을 주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시는 고난으로 여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10-12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박해받고 고난 받는 것이 복이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하지만 진리이고 복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것 역시 비밀입니다. 고난에 담겨있는 이 비밀을 아는 자는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비밀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 앞에서 말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곧 골로새 교회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을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비밀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해본 사람들인데, 이제는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을 수 있고,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 것을 희생할 수 있고, 그로인해 받는 괴로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위한 자신의 희생과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알고 기쁨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로 그 고난을 받겠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세워간다는 것은 고난 없이 불가능하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희생 없이 안되고 자신을 죽이는 겸손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너무 무거운 말씀을 드리는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까? 단순히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멀어서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었으면 해서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본질적인 이유는 참다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땅에 드러내서 한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아랍인들도 예수님의 풍성하신 비밀을 알게 되고, 이 교회를 찾는 모든 이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즉 예수님을 닮은 제자들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더불어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려면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일꾼을 자처하며 헌신하고 수고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하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과 희생들과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여겨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이 헌신하는 그런 자세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교회는 교회의 머리요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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