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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로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00 추천 수 0 2013.08.08 21: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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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3: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02624 

jys.jpg 정용섭 목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성령강림절후 제11주, 8월4일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여러분들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해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요. 낱말 뜻을 모르는 건 아닌데도 그 내용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때도 있을 겁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2천 년이나 3천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이 오늘 우리에게 실감 있게 다가오기는 힘듭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의 표면적인 삶에 우리가 완전히 길들여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셍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자주 나오는 개념이 ‘길들여진다.’는 건데, 그것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삶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는 사람은, 이것은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건데, 성경의 세계가 낯설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아무리 늘어도 성서의 세계는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거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세계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는 게 최선입니다.

 

생명의 은폐성

오늘 설교제목은 본문 4절을 그대로 따온 겁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이런 문장이 실감이 갑니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그 말의 의미를 알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이해가 되고 동의되느냐가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 주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쁘니까 그런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시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게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앞에 나온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초신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볼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부활의 신앙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종말에 나타날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이미 일어났으며, 그를 믿는 자들도 그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2절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위는 물론 하늘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유치하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은 사람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의해서 이 땅의 삶도 결정됩니다. 우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하늘은 절대적인 세계입니다. 인간은 지구에 찾아오는 빙하기를 막을 수 없습니다. 태양이 어느 날 백색거성으로 변하고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하늘, 저 우주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나님께 우편과 좌편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우편은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신자들이 찾아야 할 위는 부활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일체가 된 곳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런 생명의 완성입니다.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지요? 그 위는 종말의 생명이 성취된 어떤 사건, 어떤 순간, 어떤 사태를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성서의 이런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길들여짐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죽었고...’ 여기서 말하는 그 죽은 생명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생명입니다. 만약 이런 생명에만 머물러 있다면 성서가 말하는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론 골로새서를 읽어야 할 신자들이 실제로 죽은 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그들이 죽었다는 말은 실감이 갑니다. 앞으로 1천 년 후의 시점으로 보면 우리도 지금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천 년이 한 순간이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아있다고 하나 한 순간에도 못 미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죽었고...’라는 진술은 진리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은 자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은 다른 생명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부활이 무엇일까요? 아무도 그것을 실증적으로, 즉 어떤 물건을 경험하듯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신문기자가 사진을 찍어서 보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경험되었지 일반 사람들에게 경험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동의합니다. 문제는 다른 생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실제로 우리의 영혼에 자리를 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이 뭘까요? 말장난은 아닐까요? 어떤 신자들은 교회생활을 하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지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땅의 것에 몰두합니다. 여기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신자들은 다른 생명을 죽어서 천당 가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세에만 정신을 팔고 삽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이 문장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너희 생명’은 바로 앞에서 말한 다른 생명입니다. 부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일치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세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뜻의 기독교 의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득도(得道) 하거나 불성(佛性)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골로새서 기자는 ‘그리스도와 함께’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생명의 은폐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게 어려운 표현인가요? 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먹고 마셔야만 삽니다. 주변에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외롭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 있어도 죽을 때는 혼자입니다.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마지막은 무엇인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숨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인생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릴 때 그에게 있는 예술성이 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그가 좋은 선생을 만나고 조건이 갖춰지면서 예술성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본문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우리의 삶은 결국 죽고 썩을 것이고, 지금도 죄에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삶을 이렇게 이해하는 철학이 골로새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헬라 철학입니다. 당시는 신(新)플라토니즘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철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이데아의 세계만이 영원하고 참됩니다. 이데아와 이 세상은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악하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멀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를 잘못 읽으면 플라톤 철학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초기 기독교는 비록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거기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의 것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에 기대야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의 생명이 변증법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영광의 생명

이제 설교 앞부분에서 나온 질문의 대답을 여러분은 찾았을 겁니다. 그 질문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또한 그것은 오늘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말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안에 감춰진 우리의 생명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순간이 정말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설레지 않습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때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신약성서는 그것을 신랑 예수와 신부 교회와의 결혼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계 22:20b절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다림이 여러분에게 전달되는지요. 지금 여기서의 삶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절실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겁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딱지치기에 정신을 파느라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은 아이들과 비슷합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상상해보십시오. 초기 기독교는 거기에 자신들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재림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4절은 감춰진 생명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영광은 극치의 생명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되고, 하나님께만 해당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뒤에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광 중에 나타난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인다는 겁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한 말씀인가요? 지금 우리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성경 이야기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표면적인 삶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편안하고 건강하게, 나가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방식으로만 삶을 이해합니다. 그게 최선이라고 확신합니다. 확신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길들여지는 겁니다. 그런 방식의 삶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면 그렇게만 살아도 됩니다. 크게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아무도 참된 행복을, 즉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알고, 그렇게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수도승들이 왜 출가했는지를 약간만 돌아보십시오. 하나님 안에 거하기 전에는 그 어디에서도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을 돌아보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으로 재가(在家) 수도승들입니다. 가정과 세속생활을 살지만 하나님과의 일치에 자신의 운명을 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짜릿한 희망에 몰입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땅에 살고 있으나 위의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뒤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더 이유가 있습니다. 1-4절을 기독교 교의라고 한다면 5-11절은 기독교 윤리입니다. 앞에서 드린 두 번째 질문, 즉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독교 윤리에 해당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표현이 너무 과격하지요? 우리의 몸 자체가 부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체의 속성으로 열거된 것들을 보십시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이 열거됩니다. 이런 것들은 골로새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려는 핵심은 자신의 탐심에 치우쳐서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언행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스도가 나타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때 자신도 영광 중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즉 참된 생명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깨달아 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십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에 우리의 생명도 비밀한 방식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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