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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를 용서하라

빌레몬서 박상훈 목사............... 조회 수 2786 추천 수 0 2011.07.25 07:48:03
.........
성경본문 : 몬1:1-3 
설교자 : 박상훈 목사 
참고 : 승동교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1-3)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누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그는 누나와 함께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며칠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아침에 일터로 나가면서 자기 조카가 심심할까봐 그에게 새총을 하나 만들어주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끼워서 돌멩이를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이 났습니다. 아침부터 들을 쏘다니며 새를 잡으려고 계속해서 새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새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그가 새총을 쏘기도 전에 미리 알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이는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마침 집마당에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시면서 기르는 오리 한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심결에 오리를 새총으로 쏘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돌멩이를 꺼내서 오리를 겨냥했습니다.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돌멩이는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오리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오리는 비틀비틀하더니 곧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심결에 저지른 일이기는 했지만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오리를 죽였으니까 겁이 났습니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오리를 쥐어들고는 나무 밑을 파서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르는 척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었습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입맛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은 숟가락을 놓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서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얘야,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이리 와라. 어디 한 번 이마를 짚어보자.”
그럴수록 그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려던 누나가 그를 불렀습니다. 설거지는 누나 책임입니다. 그 대신 그는 집안청소를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그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설거지 같이 좀 하자.”
설거지는 누나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그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이렇게 소곤거렸습니다.
“나는 다 봤지!”
그는 그 말 한 마디에 완전히 코가 끼었습니다. 그래서 누나가 뒷짐지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꼼짝 못하고 설거지를 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생각 저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죽여서 파묻은 오리가 꽥꽥거리면서 되살아 날 것만 같습니다.
“이 놈! 네가 죽였구나.”
할머니가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화를 내시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또 누나의 행동으로 보아서 내일도 설거지를 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누나의 노예가 되어서 살 것을 생각하니까 한심합니다. 이 고민 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 일찍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2층에 있는 할머니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할머니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사랑하시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뒤뜰 나무에 묻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런 짓 않겠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사실은 내가 어저께 2층에서 창문청소를 하다가 창밖으로 네가 새총으로 오리를 쏘아 죽이는 것을 다 보고 있었단다. 그리고 죽은 오리를 나무 밑에 묻은 것도 보았다. 네가 저녁을 먹으면서 입맛이 없어 하는 이유도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또 네가 누나 앞에서 쩔쩔 매면서 누나 대신 설거지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지금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단다. 네가 먼저 와서 너의 잘못을 내게 고하면서 용서를 구한 것 정말 고맙구나! 잘했다. 내가 물론 다 용서해 주고 말고.”
그러면서 할머니는 자기의 손주를 가슴에 품고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방을 나서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했겠습니까? 아침식사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을 거의 굶다시피 했으니까 아침은 너무나 맛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식사가 끝난 뒤에 또 부엌에서 누나가 불렀습니다. 누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했습니다.
“오늘도 설거지를 해야지!”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싫어.”
누나가 쫓아와서 성난 얼굴로 말했습니다.
“너 까불면 다 일러버릴거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습니다.
“이르고 싶으면 일러라!”
그러면서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만만하게 걸어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용서받는 사람도 기쁘고 즐겁지만 사실은 용서하는 사람도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이미 용서함을 받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를 가혹하게 징계하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탕자의 비유나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용서의 정신만을 말씀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몇 주간 살펴보고자 하는 빌레몬서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빌레몬서를 살펴보면서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행복과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빌레몬서의 서두부분을 우리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빌레몬서의 서두는 세 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발신자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입니다. 둘째로, 수신자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축복의 말씀입니다. 차례대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발신자입니다.
1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빌레몬을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을 때 마음에 뜨거운 감격이 넘쳐흘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나 인정하는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자기가 친서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빌레몬의 마음이 뜨거웠겠습니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반가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빌레몬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레몬에 있어서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때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은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골로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따금씩 사업차 큰 도시인 에베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빌레몬은 사도 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빌레몬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요, 또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바울에게서 편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빌레몬의 마음은 뜨겁고 반갑고 감격에 넘쳤을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 좋은 감정, 엔돌핀이 솟구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마음 속에 사랑의 정, 따뜻한 마음, 엔돌핀이 솟구쳐 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빌레몬이 바울을 생각할 때 그 마음 속에 엔돌핀이 솟아난 것처럼 우리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사랑의 정을 불어넣어 주고,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해 주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엔돌핀이 솟구치게 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 보면 대개는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 편지를 할 때마다 사도적인 권위로서 말씀을 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또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권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기를 사도라고 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지금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네 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입니다. 이 네 권을 우리는 일명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왜 바울은 빌레몬서에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빌레몬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면, 내가 지금 너에게 부탁하는 것을 너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들어주리라 믿는다.”
지금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을 배반했습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골로새를 떠나서 그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거기서 파묻혀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오네시모는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감화를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극진히 잘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 곁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수종드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 임의대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한 장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옥에 갇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는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어떠한 짓을 했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일만 달란트 빚을 다 탕감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가 내게 일백 데나리온의 작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천 억, 조가 넘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다면 기껏해야 몇 백만원 정도는 기꺼이 탕감해 줄 수 있는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인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누군가 내게 어떤 섭섭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곧 십자가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이 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바울은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서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및 형제 디모데는.”
사실 지금 바울의 곁에는 디모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디모데만 자기의 이름 곁에 썼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영적 후계자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디모데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늘 바울 곁에서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디모데는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디모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친분이 있는 디모데의 이름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바울이 디모데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형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비해서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지식과 경험적인 면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디모데를 나의 형제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취급하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와 같이 대해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뜻인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갈 3:2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십시다.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가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로서 함께 천국을 향해 기쁨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수신자입니다.
1절 하반부부터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1차적인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을 소개할 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또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바울은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바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되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레몬을 가리켜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곧 나와 디모데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이러한 뜻입니다. 또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동역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취급하지 말고,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받아주기를 바란다.”
이런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너무나도 따뜻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넉넉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2절에 보면 또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여기서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리고 아킵보는 그들의 아들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아킵보를 가리켜서 “우리와 함께 군사 된”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군사입니다. 골 4:17의 말씀입니다.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말하자면 아킵보는 그의 아버지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던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 바울은 빌레몬 이외에 그의 부인과 아들의 이름을 함께 수신자 이름에 올렸겠습니까? 빌레몬 뿐만 아니고 그의 부인을 비롯한 그의 온 가족이 다함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절 끝부분을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가 온 교회의 교우들 앞에서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모든 성도들도 이 편지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빌레몬 뿐만 아니고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 모여 있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거나 다른 형벌로도 그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받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박상길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서울의 한 근교에서 푸줏간을 경영하는 나이 많은 백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정은 아주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정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양반들은 그에게 하대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백정에게는 반말을 했습니다.
하루는 젊은 두 양반이 소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첫째 양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상길아. 소고기 한 근만 잘라서 팔아라.”
그는 공손하게 “예!”라고 답한 뒤 소고기를 잘라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양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박서방! 내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게나.”
그는 역시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면서 그에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양반의 고기보다 훨씬 더 많은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첫째 양반이 불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을 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크기가 서로 다른거야!”
그때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첫째 것은 상길이가 준 것이고, 둘째 것은 박서방이 준 것이니까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일에 상처받기 쉽습니다. 말 한 마디에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옛말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라도 남을 배려해 줄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낮추고 디모데는 높였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면 반가운 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엔돌핀이 솟구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축복의 말씀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축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동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인 천사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이나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쓰인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이십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축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은혜와 평강”입니다.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원인이고 평강은 결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평강이 따라옵니다. 평강을 원하십니까?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입니다.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 골로새 교우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네시모의 모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따뜻하게 용납해 주고, 형제로 받아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십시다.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게 무엇을 행했던지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 받는 길입니다. 그가 나를 배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속이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용서할 만큼 성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자.”
우리의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평강이 절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영어로 용서라는 말을 “Forgive”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단어와 비슷한 영어단어 몇 개를 써서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Forbear(참으라)”입니다.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 있는 용서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Forget(잊으라)”입니다.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오느냐?”
아들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이놈아!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셋째로, “Forever(영원히)”입니다. 영원토록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7×70=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가 자기에게 잘못을 범할 때마다 수첩에 기록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번, 두 번…490번까지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491번째 가서 ‘더 이상 못 참아.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겠어!’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이미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우리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지켜 순종하며 행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깨끗하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 마음의 천국을 다시금 회복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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