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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브리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20 추천 수 0 2023.04.03 21:11:36
.........
성경본문 : 히12:18-2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56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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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7gvmStER894 

히 12:18~29,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

2022년 8월21일

 

오늘 설교 본문인 히 12:18~29절은 한번 들어서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의 번역이 거칠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해당 단락을 「새번역」으로 다시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18)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내 산 같은 곳이 아닙니다. 곧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흑암과 침침함이 뒤덮고, 폭풍이 일고, 나팔이 울리고, 무서운 말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간청하였습니다. “비록 짐승이라도 그 산에 닿으면, 돌로 쳐죽여야 한다”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도 말하기를 “나는 두려워서 떨린다” 하였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 25) 여러분은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땅에서 경고하는 사람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 벌을 피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척하면, 더욱더 피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는 그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

 

시내 산 경험

 

이 단락에는 두 가지 하나님 경험이 변증법적으로 대비됩니다. 하나는 시내 산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불, 흑암, 침침함, 폭풍, 나팔소리, 무서운 말소리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출 19~24장에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시작하는 초반부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오릅니다. 거기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완성합니다. 출 19:9절에서 여호와는 모세에게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가 났습니다. 뭇 백성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멀리서 보고 떨었다(출 20:18)고 합니다. 자신들이 죽을지 모르니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부탁합니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21~23장에 여러 율법 조항이 나옵니다. 모세가 다시 시내 산에 올랐을 때(출 24:17)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묘사된 현상은 화산 폭발과 지진과 천둥 및 번개로 보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런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하는 자연 현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고대인만이 아니라 물리학에 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는 현대인도 해일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현상이 눈앞에 닥치면 두려워합니다. 고대인들은 자연 현상의 이치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런 두려움이 더 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다른 민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민족은 위력적인 자연 자체를 신으로 섬겼다면 이스라엘은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집트를 비롯한 대다수 제국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으나 이스라엘은 태양을 만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겁니다. 탈(脫) 자연숭배, 또는 탈 주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이런 차이는 오늘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을 궁극적인 현실로 붙들고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자연 현상 너머, 또는 그 깊이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연과학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거나 거기에 주눅 들어도 안 됩니다. 특히 과학 결정론은 매우 피상적인 세계관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참된 사랑과 예술과 시 경험을 뇌과학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계산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수학 개념을 아는 게 아닙니다. 과학자가 핵에너지의 메커니즘을 조작할 수는 있으나 핵이 인류를 비롯한 지구 모든 생명체를 멸절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우리 삶을 부분적으로 풍요롭게 하기는 했으나 기후위기를 촉발했습니다.

 

시내 산 이야기가 묘사하는 화산 폭발과 지진과 뇌우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은유이자 비유입니다. 그런 경험이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는 누구지?”라는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서면 자신이 지금까지 붙들었던 토대가 모두 무너지는 경험이 발생합니다. 교사, 교수, 법관, 국회의원, 연예인 등등, 자기의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겁니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해서 한 달 정도 자란 개체를 배아라고 합니다. 크기가 5㎜ 정도인 배아와 지금의 우리 자신을 연결해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지?”라는 질문도 그렇습니다. 안락한 집안이나 교회당이나 카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주 전체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너무 낯섭니다. 45억 년이라는 지구 나이에서 볼 때 인류의 조상인 호모에렉투스의 시작인 2백만 년 전이라는 시간도 별로 길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인류가 멸종해도 지구에서 생명 현상은 계속될 겁니다. 우리의 실존이 외줄 타기와 비슷하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본문은 흑암과 불과 나팔소리라고 표현한 겁니다.

 

본문 21절은 시내 산 전승의 신명기 버전에 나오는 “나는 두려워서 떨린다.”(신 9:19)라는 모세의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에 진노하시고 진멸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했는데, 이런 두려움은 개인과 인류의 멸절에서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상황을 누가 견뎌내겠습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사실을 외면합니다. 또는 어쩔 수 없지, 하고 받아들입니다. 무조건 일상에 과몰입해서 살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소스라쳐 놀랍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그런 놀라는 경험을 자주 하고, 무딘 사람은 죽을 때나 돼서 합니다.

 

이런 공포와 충격 속에서 고대 이스라엘이 찾은 길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시내 산 전승은 율법 이야기입니다. 자기와 전체 인류와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고, 제사장 제도를 만들었으며, 온갖 종류의 제사 의식도 개발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성문법과 불문법, 그리고 수많은 조례도 만들었습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을까요? 우리의 일상으로 바꿔 말해,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고 교양인이 되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생명 충만감과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까요? 그렇게 나아갈수록 생명 감수성이 더 산만해지고 더 무뎌지는 건 아닐까요?

 

시온 산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시내 산에서 궁극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만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교경험만 할 뿐입니다. 종교경험이 구원으로 가는 출발점은 되나 종착점은 아닙니다. 22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시내 산이 아니라 시온 산에 온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두 번째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곳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수많은 천사와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과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시온 산에는 시내 산에서 나타났던 불, 침침함, 폭풍 현상이 없습니다. 시내 산에 나타난 강력한 현상은 보이는 것이지만 시온 산에 나타난 현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내 산은 압도적인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만, 시온 산은 비밀스러운 영적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온 산 경험은 모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붙들고 살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는 기원후 90년대입니다. 당시 교회 상황이 히브리서의 배경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히 12:14~29절 단락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라는 소제목이 달렸습니다. 90년대의 그리스도교는 이런 경고를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습니다. 회당 축출이 현실화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위기는 기원후 70년에 끝난 유대 전쟁의 결과입니다. 유대교는 성전 파괴 이후 율법 중심 종교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느슨하게 연대하고 지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강요를 거부했고, 더는 회당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제국 시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유대교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고대하던 예수 재림도 가시권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25절)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가 왜 우위인지를 설득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시내 산과 시온 산의 대비입니다.

 

시온 산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내 산은 모세를 중심으로 한 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이라고 한다면 시온 산은 예수를 중심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시내 산은 율법이라는 특징이 있다면, 시온 산은 복음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내 산은 땅의 흔들림이라고 한다면 시온 산은 땅만이 아니라 하늘의 흔들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은 흔들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그 시온 산 사건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전혀 새로운 태도로 세상을 살겠지요. 90년대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회당 축출과 재림연기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겠지요. 2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

 

‘흔들리지 않는 나라’라는 말도 메타포로 읽어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무너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검찰도, 법원도, 학교도, 궁극적으로 교회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없어진다는 말은 만물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 후에 영원한 생명이 발현될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시온 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늘을 흔들며, 만물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 찬란한 세속적인 문명을 꽃피우는 21세기에 누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서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의 번역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곧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흔들립니다. 집과 강과 산과 지구도 흔들립니다. 묵시적 종말을 가리키는 계 6:13~14절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을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

 

이건 아주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언젠가 세상은 다 무너지고 변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죽을 때 우리와 관계하던 모든 것이 해체되듯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내 산의 그 충격에서 벗어나신 경험이 분명한가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열정이 여러분의 영혼을 사로잡을까요? 시온 산으로 들어오셨나요? 아니면 여전히 시내 산에서 머뭇거리시나요? 사실은 시내 산 경험만 있어도 대단하긴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다시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보로 안내해야겠습니다. 그 초보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더불어 다시 산다는 그리스도교 종교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이는 시내 산에 머무는 사람인데, 죽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됩니다. 여기 50세 이상 된 교우 중에서 50년 후에 살아있을 분은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모두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혼자 죽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죽음의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 뒤로는 누구도 혼자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이 그 자리에도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여러분이 죽을 때 누가 옆에 있기는 원하시나요? 아내나 남편, 재산, 자식? 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믿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부활합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즉 부활 생명체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받은 사람에게는 죽음과 부활이 이미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런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얻은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28절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경건함’(ε?λαβε?α- godly fear, reverence)과 ‘두려움’(δ?ο?- awe, godly fear)은 경제 만능과 각자도생과 자기 중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과 그 심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하나님 경험이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운다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 절감할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에 걸친 자기 인생 전체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을 더 실질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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