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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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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소재열 목사 |
참고 :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이덕주 중령 일가족 6명을 도끼로 몰살시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고재봉 사건입니다. 각 신문들은 대문짝만한 기사를 냈고, 이 충격적 보도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교도소에서 고재봉의 방에서 큰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나에게 예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 아니냐! 교회가, 교회가….” 라고 고재봉은 안타까운듯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울면서 “이제 나도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도소 안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서울 구치소에 강하게 역사했다고 합니다.
이제 사형집행일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고재봉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또 할 말 있습니까?”
“검찰관님, 제가 웃을 때 방아쇠를 당겨 주세요.”
고재봉은 침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높여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차마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그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헌병들에게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던 그가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후렴을 부를 때 그는 웃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으로…. 방아쇠가 당겨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살인마 고재봉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끔직한 살인죄를 졌던 고재봉이 변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기에 이런 끔직한 살인자가 변하게 된 것입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를 영접하면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 곧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구약의 선진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신 예수 그리스도(1-3절)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들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성경에 등장한 많은 인물들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서 믿음의 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믿음의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믿음의 영웅들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이야기를 다 한 다음에 히브리서 12:1-2절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절에서 말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미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한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증인하고 있습니까? 2절에서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서 증거해 준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히브리서를 통해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1절은 우선 믿음의 정의부터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①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②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③ 선진들이 증거를 얻어 바라본 대상이었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졌느냐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믿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현재에 그대로 이루어진 실상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들 곁에 계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잘못 가르치기를 “장차 집 한 채를 갖고 싶으면 그 집이 지금 현재 나에게 있는 것처럼으로 믿으라 이것이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믿음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信念)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는 자들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보이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지 어떤 물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2. 믿음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 속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4절)
본문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인정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증거와 인정은 바로 아벨이 드린 제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제물이 어떤 제물이기에 그 제물을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라 증거하셨습니까? 또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각별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은 구약 성경을 관통하고 하고 우리들의 믿음을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믿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아벨의 믿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벨이 드린 제물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와 희생과 긍휼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제사란 거룩하지 못한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 제사 제도에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그 중심에 제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그 제사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동원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와 거룩케 하신 제사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구약적으로 표현해서 메시아인데 이 말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 부음 받은 당사자가 바로 예수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볼 것 같으면 ‘기름’이란 제사에서 나온 용어 개념입니다. 아벨이 어떻게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느냐면 창세기 4:4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열납해 주셨습니다. 여기 양의 첫 새끼는 아벨의 직업에 따른 소산물입니다. 그러나 기름을 따로 구분해서 드리는 것은 자신의 직업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같은 행위는 아벨의 하나님께 대한 제사 정신을 고백하는 고백 방식입니다.
왜 하필 기름을 따로 떼어서 드렸을까? 그 이유를 본문 히브리서 11:4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이 이런 식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11:6). 그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5-6절)
본문 5말씀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5: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미 그가 이 땅에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결국 “죽었더라”는 족보였습니다. 그런 죽음의 족보 속에서 죽지 않는 족보인 에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삶(생명)과 죽음의 족보를 통해서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은 죄용서 함을 받아 하나님과 동행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유다서 1: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 말씀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통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보여준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그 예언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해 지습니까? 구약은 제사를 통해서 신약은 그 제사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바로 거룩한 자들입니다.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본문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떠한 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어떤 자들이 거룩한 자들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4. 노아 방주를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7절)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시므로 거룩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심판하듯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시므로(창6:9)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를 구분하십니다.
본문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방주 없이도 노아를 구원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은 왜 여기서 방주가 필요하며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방주는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방주 이외에 그 어떤 기구나 도구로도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획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방주 안에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창7:2).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정결한 것으로부터 정결하지 못한 것이 구원을 받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러운 것으로부터 깨끗한 것을 구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신약 성경과 오늘날에 이 방주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왜 꼭 그리스도가 필요하는지를 알려면 우리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들이 죄 때문에 심판과 저주가 옵니다. 그러나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려 줍니다. 이 경고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8-12절)
지금까지 열거한 아벨이나 에녹이나 아브라함,이삭, 야곱 등은 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지만 그 약 속의 실체이신 메시아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죽었습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말은 그 언젠가는 본향에 이르게 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역시 이들의 긴 여정, 즉 나그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신 메시아를 증거했던 자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반열에 서서 그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했던 자입니다. 그 증거들인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났는가가를 통해서 우리들 역시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에로 초대
구약의 선진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증인하고 증거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들이 찾아야 하고 좇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예언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그 약속과 예언의 성취인 신약 성경을 통하여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앞으로 오실 재림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 오늘 나에게 오신 것 같은 실체로 믿고 우리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순종과 감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들의 죄용서를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합니까? 각각 자신들의 생활과 직장과 가정과 사업장에서 살펴보자.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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