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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상

히브리서 노희정............... 조회 수 2532 추천 수 0 2008.08.25 14: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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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1:1~2, 17~19 
설교자 : 노희정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5. 6.19 주일설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 17-19)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 1-4)

오늘 제가 본문으로 선택한 구절은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라는 빛에 의해서 구약을 다시 정리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1-2절은 그 표제어라 할 수 있겠죠. 그 다음부터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의로운 자,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내용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라는 것입니다. 실상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증거는 그것이 참된 것에 대한 증거이어야만 된다는 요청으로 들립니다. 본문에 이어 계속 나오는 “믿음으로~”라는 구절들은 신앙의 열조들에 관한 모범적인 사례들을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의해서 보여주는 오늘날의 믿음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열조들에게서 믿음의 실상은 그대로 증거가 되겠지만 우리들에게서 실상은 그대로 증거가 되기에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문화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성취된 “믿음의 실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혹은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어도 바라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색깔은 가지각색인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뭔가 선물을 잘 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을 잘 믿을 것입니다. 선물을 잘 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너무 무시한 것인가요? 물론 어른이 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부모로부터 얻어내는가, 아니면 부모에게 드리는가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커서도 과거의 경험에서 아버지,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또 다른 모습의 하나님을 믿겠죠. 북한에서 월남하신 어느 분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는 질색하더랍니다. 어버이수령이라는 말에 질렸기 때문이죠.

교회에서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믿음으로 재물도 많이 축적합니다. 자연 재해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는 “믿음으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그 병은 병원에 가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어린 꼬마가 배가 터질 정도로 불러서 임신했는가 할 지경에 이르러도 기도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병원도 하나님이 병 고치라고 세워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대화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교회도 하나의 자본이 되어 자식에게 세습하고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도, 신앙의 한 모습임은 분명합니다. 그 자본은 자신을 하나님이 축복해서 주신 사유재산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죠.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된 것이며, 믿음의 실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증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왠지 ‘그것이 아닌데’라는 의구심만 불러일으키게 되죠.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믿음의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하지만 참된 증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이야기 중에 아브라함이 산에 오르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산에 오르는 맛을 제대로 모릅니다. 산에 가느니 차라리 뛰자는 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저기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기야 산이 저기 없었다면 오르고 싶은 욕구가 생길 리 없고, 산의 묘미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겠죠.

이 산과 관련해서는 참으로 아픈 기억과 아름다운 기억이 교체합니다. IMF때 많은 실직자들이 차마 실직의 사실을 말 못하여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 오른 곳이 산이라고 합니다. 물론 산에 오르면서 새로운 다짐과 재도전의 힘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만큼 산 역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웰빙과 관련해서 산이 많이 고려되는 것 같습니다. 건강과 함께 삶의 여유를 찾자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산만큼 우리의 일상에 활력을 던져주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서 일상을 환기시키고, 재도전의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오르는 산은 그러한 웰빙으로서의 산도 아니고, 실직의 아픔을 달래는 산도 아닙니다. 희망이 막 절망에 의해서 삼켜질지도 모르는 산행을 지금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행위가 아주 의미 있게 기록된 부분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산을 오르는 것은 야훼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르는 산은 설교하거나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리아산의 산행은 아들, 그것도 장자를, 쉽게 얻은 것도 아닌 엄청나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서 난, 100세에 얻은 유일한 아들 이삭을 칼로 베기 위해서 오르는 산입니다. 이것은 절망의 산행입니다. 이 상황에 어떤 희망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장자를 베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기도 중에 야훼가 나타나 큰 목소리로 아브라함아! 라고 불렀을까요? 아니면 꿈속에서 나타나 아브라함을 불렀을까요? 아니면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세미한 음성으로 새벽 미명에 말씀했을까요?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성경은 결과적인 이야기를 적어서 아브라함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 부름에 응했다는 것이죠. 창세기 22장은 짤막한 대화 속에서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실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급격한 실행이야말로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 보다는 사태의 심각성과 긴박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안장을 지우고 아들을 칼로 베기 위해서 산행을 서둘렀다고 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중에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일본영화가 있습니다. 나라야마 산의 애가라고 번역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장자가 자기 부모를 버리기 위해서 산을 오르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아침 일찍 서둘러 산행을 시작합니다. “아침 일찍”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사뭇 애절해 보입니다. 간밤에 떠날 준비를 하는 당사자의 마음을 상상하면 이 “아침 일찍”이라는 말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긴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죽기를 자청하고 장자에게 업혀서 나라야마 산행을 합니다. 나라야마 산 정상에 해골이 산적해 있고, 까마귀들이 이글거리는 곳에 당도하여, 산행은 끝이 나는데, 그곳에서의 이별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떨어지지 못하는 장자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어머니는 장자와 이별을 고합니다.

아브라함의 산행에서 산행의 진실을 아는 자는 오직 아브라함 한명 밖에 없습니다. 이삭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비가 시키는 대로 장작을 짊어지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가지만 그러나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으려는 순간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합니다. 아들 이삭이 죽으러 가지만 오히려 아비인 몸으로 자식의 죽음 이상의 비통함을 짊어지고 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갈데아 우르 땅에서의 야훼와의 조우, 그리고 야훼의 명령에 따라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일들, 그동안의 자손에 대한 야훼의 약속 등의 일들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습니다. 이 부분이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 본문대로라면 70세에 3명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란이 일찍 결혼했는지, 먼저 아들 롯을 낳고 죽습니다. 데라가 살았던 갈데아 우르는 달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데라 역시 달신을 믿었고, 신상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데라는 갈데아 우르 땅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막내인 하란을 잃었죠, 사래와 결혼한 장남인 아브람에게는 아들이 없었죠. 게다가 자신이 믿었던 달신에게서도 뚜렷한 응답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솔을 거느리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전환을 시도해 보려고 했겠죠. 아브람이라고 마음이 좋았겠습니까? 아버지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엄청나게 달신에게 빌었을 것입니다. 백번? 천번? 아니면 백일기도? 천일기도? 등. “아들을 점지해 주십시오. 달님” 우리 전통에서도 아들을 낳기 위해서 보름달에게 빌었던 풍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부장 세계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것만큼 고통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씨를 번식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브람이 야훼를 만난 것은 자손과 관계 있습니다. 아마도 야훼는 아브람의 약점을 건드려서 절묘하게 꼬인 것 같습니다. 아브람의 약점을 발견하고 야훼가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야훼는 꼬시기 명수라는 것이죠. 그것은 자손의 약속과 관련해서 12장 첫머리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곧바로 아브람에게 나타나 큰소리치며 명령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그 구실은 다음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도 자식이 없자 아브람은 마음이 약해져서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훼는 여전히 이전의 말을 반복하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내 사래 역시 자식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여종에게서 자식을 얻을 것을 아브람에게 종용하고, 아브람 역시 동조하여 하갈과 동침하고, 86세에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99세 때 할례에 대한 지침을 받고, 자손에 대한 약속을 구체화합니다. 그리고 개명합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그것입니다. “명년 이맘 때”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100세요, 사라가 90세 때를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말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합니다. 100세와 90세에 자식을 어떻게 얻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상속자는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마도 아브라함은 야훼가 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100세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 젖 뗄 때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으로 그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곧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습니다.

이렇게 얻은 아들이 지금 모리아산에 죽으러 가는 이삭입니다. 야훼가, 갈데아 우르에서부터 줄곧 나타나 말씀하신 그 야훼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침묵이 어색했던지, 이삭이 아비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해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은 제 삼일에 지정된 장소를 바라보고는 나귀와 종들을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이삭과 단 둘이 목적지에 당도합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이삭을 결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지간의 애가는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것도 칼로 아들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이별입니다. 그와 세우겠다던 영원한 언약은 어디로 가버리고, 영원한 이별이라니! 돼지를 잡을 때 목을 땁니다. 그러면 피가 솟구치지는 않을망정 줄줄줄 흘러내립니다(학생부군신위). 닭을 잡을 때는 목을 비틀죠. “닭아 미안하다. 우리 마누라 병이 나아야 되니 어쩔 수 없잖니”(죽어도 좋아).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의 목을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 순간의 긴박성과 심각함은 실제 당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듭니다. 자식을 죽이다니!

자식을 바치는 이 순간은 뜸을 드리면 안 됩니다. 제정신이 아닐 때, 얼른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정한 아비가 되려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 간반의 차이로 들려오는 소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였습니다. 이 때 저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이 눈에 띠었던 것입니다. 아들 대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야훼의 약속은 한층 강화된 진술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그리고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산에 오르고 내려온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나라야마 산에 오른 장자는 눈으로 덮힌 산을 단숨에 내려와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일상은 그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장자만이 실상을 간직한 채 한세상을 살다가 그렇게 또 가겠죠.

이삭의 결박이야기는 단순히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건이 아니고,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자식을 바쳐야 하는 고대종교의 무지막지한 신의 이미지가 일신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장자살해는 고대 사회에서 가부장권의 강화와 관련하여 다루어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가부장권과는 다른 어떤 메시지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장자는 자신의 씨라고 하는 측면에서 불확실성을 노출시킵니다. 부인이 결혼 전에 어떤 남자와 자고 임신한 상태로 와서 첫날밤을 치렀지만 그 태어난 장자는 다른 씨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입니다. 장자를 죽임으로서 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차자는 분명한 자신의 씨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이것이 가부장권이 요구하는 순수한 씨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2. 이 이야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신약의 메시지는 약간의 모호함을 보여줍니다. 믿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삭결박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이 살 것을 믿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애매모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한 야훼의 언약은 네 씨에서 난 자라야 후사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어렵게 난 자이기 때문에 약속대로라면 이삭을 통해서 자손이 번창해야 합니다. 신약 본문은 아브라함은 야훼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생각했다고 말하고, 이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부활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되겠죠.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칼로 치는 행위는 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정말 칼로 쳐서 죽인다면 야훼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방향을 돌려서 이해하면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모순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라고 하면 더욱 신약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죠. 그러나 사실 구약 본문은 신약 이전의 것입니다. 신약에서 어떤 해석을 내리기 전에도 구약은 생명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본문인 이 구약 본문은 그대로 의미 있는 내용이 됩니다.

3. 아브라함이 야훼와의 만남에서 겪은 경험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순간에 과거의 어떤 약속도 확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항상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손의 약속을 성경은 매우 확정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약속이라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 후사가 될 것이라고 했고, 하갈과의 동침을 하고, 이스마엘을 얻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야훼가 이삭으로 하여금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영원한 언약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 언약이란 물론 현재적이지만 과거적인 것으로 매우 고백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지난 사건들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사건을 조명하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들로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현재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맺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칼침을 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삭이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애초에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막상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내려치려고 할 때, 차마 내려치지 못하고 멈출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막 내려치는데, 아무소리도 나지 않고 그대로 이삭의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어떤 신들처럼 야훼 역시 무지막지한 신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은 것 속에서 결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야훼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신약이 증언하는 그런 종류의 부활을 기대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아브라함이 지난날 야훼에 대해 경험한 많은 사연들입니다. 그 사연들 속에서 야훼의 인격, 야훼의 이미지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4. 무엇보다도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매우 인간적인 신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신은 모세의 회막 공동체에서처럼 인간과 함께 살기를 원하고, 인간에게 도덕적 존재로 부상합니다. 고대의 인신제물을 통한 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신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인식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아마도 신과 인간의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본문에서의 아브라함의 신, 야훼는 매우 인간적인 신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물제사조차도 폐지하면서 인간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혹은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로 야훼 신을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산행은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오른 산행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증거를 받은 셈입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물론 아들이었지만 이것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장자를 살해하는 풍습이 없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한 것은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의 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가 믿음으로 달성한 것은 신을 인간에게 가까이 되돌려 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믿음으로”, 혹은 믿음의 행위들로 신을 다시 인간과는 먼 저곳의 신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유한 교회가 신을 전유하고 있어서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신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힘을 가진 종교가 그렇지 못한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한 그러한 행위들이 참된 증거를 받기에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뿐입니다. 믿음으로 행한 우리들의 행위들은 선열들처럼 참된 증거를 얻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오늘 우리들에게 참된 양식으로 채워주시고, 믿음의 행위들이 참된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이 된 선열들을 생각하면서, 개인의 안위보다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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