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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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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숙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5. 6.26 주일설교 /이정숙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원 교회사) |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교회에 관하여서는 제가 프린스톤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북미기독학자회에 참석하셨던 한완상 총재님과 정대현 교수님께 처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두 분께서 이 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새로운 교회인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제 전공이 교회사에서도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이고 개신교는 성직자 중심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교회제도를 비판하면서 평신도 참여를 주장한 교회운동이었기 때문에 이 교회가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새길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말씀증거를 맡고 교회홈페이지에서 주보를 읽어보니 제가 아는 몇 분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 교회에 참여하시고 계셔서 더욱 정겨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교회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단순하게는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알자는 아주 단순한 호기심이, 대학에서 공부한 사회학이 근대학문이라는 점과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신학에 입문하고 교회사를 전공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제가 교회사를 계속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속에서, 구체적 역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그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2: 1-3절, 특별히 1절의 말씀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은 제가 교회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중요한 이유를 제공해 줍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말씀증거를 통하여 배우신 대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를 믿고 따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라는 접속어는 그 울림이 다른 어떤 말보다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러므로’는 역사의 연속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40과 연결하여 읽으면 역사의 연속성이 더 분명합니다. 40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도 우리가 아니면 온전해지지 못한다니 그들과 우리들은 분명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11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할 일이 있고 우리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니 역사의 연속성을 이 이상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1절을 읽어볼까요? 이 구절은 마라톤 경기에서 흔히 보이는 하나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마라톤경기에 참여한 경주자들은 출발부터 도착 때까지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응원객들을 보며 그들이 질러대는 격려의 환성을 들으며 마라톤을 하게 됩니다. 응원하는 사람들은 마라톤 주자에게 “조금만 더”, “힘내세요”, “화이팅”, “○○○ 만세” 등의 말로 경주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합니다. 1절은 우리들을 가리켜 마라톤 코스를 따라가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구름처럼 빼곡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감동적인 이미지입니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는 화려한 수식에도 불구하고 인간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힘든 운동경기임에 틀림없습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각자 자신의 승리를 꿈꾸고 있어서 팀웍을 기대할 수 없는 외로운 개인종목입니다. 그래서 중도포기도 가능한 종목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매초마다 인내가 필요한 경주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경주는 출발 때의 의지와는 달리 사뭇 힘겨운 것이고 주저앉고 싶은 때도 많은 경주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경주를 계속하게 하는 힘이 1절에 의하면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들의 응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증인들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2가지 조언을 해 줍니다. 1) 잘 달리려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라 2) 잘 달리려면 인내해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이 경주를 달리고 간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이 경주는 달려볼 만한 경주라고, “조금만 더”, “쓸데없는 데 힘빼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잘 하고 있어”, “지금 죽을 것 같지, 그래도 죽지 않아” 등의 말로 우리를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앞서간 사람들의 격려의 메시지를 들으며 마음의 갈등을 정리하고, 과감하게 손에 쥐고 있는 무거운 것들과 삶을 복잡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면서 달려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의하면 예전에 달린 사람들, 또 그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오늘도 달음질을 멈출 수 없는 우리는 결국은 예수님이 먼저 잘 달려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원어에 더 충실하면 이 말은 예수는 믿음을 시작하신 이(창시자)요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the pioneer, or the author of our faith, and the perfector of our faith) 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기에서 순차적으로 주자를 필요하듯이 예수님이 먼저 달리고 우리보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달리고 이제 바톤이 우리에게 와서 저와 여러분들이 달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경주에 참여하셨을까요? 2절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수치를 상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즐거움(기쁨)을 위하여”에서 ‘위하여’라는 헬라어 전치사를 종교개혁 이후부터 주로 ‘위하여’로 해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라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전체 맥락과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다가올 기쁨을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인간의 연약하고 간사한 성품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의 체질을 잘 이해하시며 우리 형편에 맞는 구체적인 힘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고대하는 기쁨은 바로 온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접속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접속을 통하여 인간은 태생적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엄청난 자원을 나눠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원의 기쁨을 위하여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난을 참으신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사랑, 믿음, 소망은 중요한 개념이지만 구체성이 약해서 나를 가릴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희생이라고 말하면 구체적이고 손해볼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희생은 21세기에서 그리 인기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희생은 왜곡되어지고 오용(abuse)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보다는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타인의 희생을 과도히 찬양함으로써 자신이 희생해야할 몫을 탕감 받고 싶은 심리를 갖고 있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희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을 빌미로 하여 큰 이권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희생을 들먹이며 타인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하고자 하고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그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희생의 대가를 무리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희생은 세계를 바꾸게 됩니다.
미국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톤대학교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탁(Rodney Stark) 교수가 The Rise of Christianity라는 중요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스탁 교수는 불법신흥종교로 출발하여 갖은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던 미미한 종교, 기독교가 어떻게 300년 만에 로마제국 전체를 주름잡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사회학의 다양한 관점을 사용하여 기독교 성공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의 결론에 이르면 스탁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저런 사회학적 분석을 넘어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게 된 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덕(virtu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로마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하여 신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힘을 자신의 뜻대로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존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사회에서 신이건 사람이건 권력자는 강해야 하고 약한 면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권력자는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정당한 근거없이 사람들을 벌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사람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로마 황제의 6살짜리 아들의 생일 파티를 검투사의 경기가 진행되는, 혹은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는 원형경기장에서 베푼 것은 권위란 잔인함을 불사하는 힘에서 온다는 로마제국의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죄인인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하면서 인간을 용서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자비가 한량없으시고, 또 이 신의 자녀가 된 자들은 다 이 신처럼 자비가 많아야 하고 희생을 치러야 마땅합니다. 이는 도무지 로마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사람들은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자비의 힘, 희생의 힘이 진정한 힘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발견은 로마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천주교 순교사화 중에 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사옥) 때 순교한 콜롬바 강완숙을 아시는지요? 강완숙은 바티칸을 당황시켰던 자생적인 천주교, 조선교구의 여신도회회장격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관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신도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했고 중국에서 몰래 들어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그를 도와 조선천주교의 부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런데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도들이 잡혀가고 죽어가자 주문모 신부가 자수를 하고 곧 강완숙도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주리를 틀고 때리는 갖은 고문에도 다른 신자들의 거취나 행적을 누설하지 않고, 변함없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강완숙에게 관리들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의 어린 아들 홍필주를 끌고 온 것입니다. 끌러온 아들 홍필주는 곧 가마니로 덮어씌워졌고 포졸들은 가마니 위로 난장(亂杖)을 가하였습니다. 거적 밑으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어린 아들의 울부짖음이 강완숙의 마음을 찢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강완숙은 배교하지 않았고 그의 완강한 태도는 서대문 밖 참수형을 자초하게 됩니다. 관리들의 본보기로 우차에 십자가를 세우고 강완숙을 십자가에 매달고 그 발아래 지지대를 두었다가 우차가 서대문 내리막길을 내려갈 즈음 지지대를 제거해버립니다. 강완숙은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달리는 소가 끄는 수레 위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반죽음이 되어 형장에 도착합니다. 관리들은 무슨 심보인지 그의 옷을 벗기고 참수하려고 하자 강완숙은 조선의 법도가 있거늘 어찌 부녀자를 벗길 수 있느냐고 따졌고 그의 말이 받아들어져 옷을 제대로 입은 후에 참수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강완숙과 같은 육체적 순교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정신은 여전히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면 언제나 조금씩 타협하게 됩니다. 이 교회는 새로운 길을 걷기로 작정하신 분들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16세기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새 길을 걷겠다고 앞서 간 바 있었고 또 그 길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서 가신 분들의 응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혹 낙심되고 지치고 힘들 때는 그분들의 환호성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날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오순절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은 주저앉고 싶은 우리들이 일어나도록 부추기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우리 앞서 가신 믿음의 선진들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이 되어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하심이 여러분의 삶과 이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말씀드린 대로 저는 교회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단순하게는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알자는 아주 단순한 호기심이, 대학에서 공부한 사회학이 근대학문이라는 점과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신학에 입문하고 교회사를 전공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제가 교회사를 계속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속에서, 구체적 역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그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2: 1-3절, 특별히 1절의 말씀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은 제가 교회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중요한 이유를 제공해 줍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말씀증거를 통하여 배우신 대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를 믿고 따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라는 접속어는 그 울림이 다른 어떤 말보다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러므로’는 역사의 연속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40과 연결하여 읽으면 역사의 연속성이 더 분명합니다. 40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도 우리가 아니면 온전해지지 못한다니 그들과 우리들은 분명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11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할 일이 있고 우리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니 역사의 연속성을 이 이상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1절을 읽어볼까요? 이 구절은 마라톤 경기에서 흔히 보이는 하나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마라톤경기에 참여한 경주자들은 출발부터 도착 때까지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응원객들을 보며 그들이 질러대는 격려의 환성을 들으며 마라톤을 하게 됩니다. 응원하는 사람들은 마라톤 주자에게 “조금만 더”, “힘내세요”, “화이팅”, “○○○ 만세” 등의 말로 경주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합니다. 1절은 우리들을 가리켜 마라톤 코스를 따라가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구름처럼 빼곡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감동적인 이미지입니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는 화려한 수식에도 불구하고 인간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힘든 운동경기임에 틀림없습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각자 자신의 승리를 꿈꾸고 있어서 팀웍을 기대할 수 없는 외로운 개인종목입니다. 그래서 중도포기도 가능한 종목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매초마다 인내가 필요한 경주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경주는 출발 때의 의지와는 달리 사뭇 힘겨운 것이고 주저앉고 싶은 때도 많은 경주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경주를 계속하게 하는 힘이 1절에 의하면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들의 응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증인들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2가지 조언을 해 줍니다. 1) 잘 달리려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라 2) 잘 달리려면 인내해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이 경주를 달리고 간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이 경주는 달려볼 만한 경주라고, “조금만 더”, “쓸데없는 데 힘빼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잘 하고 있어”, “지금 죽을 것 같지, 그래도 죽지 않아” 등의 말로 우리를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앞서간 사람들의 격려의 메시지를 들으며 마음의 갈등을 정리하고, 과감하게 손에 쥐고 있는 무거운 것들과 삶을 복잡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면서 달려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의하면 예전에 달린 사람들, 또 그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오늘도 달음질을 멈출 수 없는 우리는 결국은 예수님이 먼저 잘 달려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원어에 더 충실하면 이 말은 예수는 믿음을 시작하신 이(창시자)요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the pioneer, or the author of our faith, and the perfector of our faith) 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기에서 순차적으로 주자를 필요하듯이 예수님이 먼저 달리고 우리보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달리고 이제 바톤이 우리에게 와서 저와 여러분들이 달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경주에 참여하셨을까요? 2절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수치를 상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즐거움(기쁨)을 위하여”에서 ‘위하여’라는 헬라어 전치사를 종교개혁 이후부터 주로 ‘위하여’로 해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라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전체 맥락과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다가올 기쁨을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인간의 연약하고 간사한 성품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의 체질을 잘 이해하시며 우리 형편에 맞는 구체적인 힘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고대하는 기쁨은 바로 온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접속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접속을 통하여 인간은 태생적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엄청난 자원을 나눠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원의 기쁨을 위하여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난을 참으신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사랑, 믿음, 소망은 중요한 개념이지만 구체성이 약해서 나를 가릴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희생이라고 말하면 구체적이고 손해볼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희생은 21세기에서 그리 인기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희생은 왜곡되어지고 오용(abuse)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보다는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타인의 희생을 과도히 찬양함으로써 자신이 희생해야할 몫을 탕감 받고 싶은 심리를 갖고 있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희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을 빌미로 하여 큰 이권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희생을 들먹이며 타인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하고자 하고 공공연히 혹은 은근히 그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희생의 대가를 무리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희생은 세계를 바꾸게 됩니다.
미국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톤대학교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탁(Rodney Stark) 교수가 The Rise of Christianity라는 중요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스탁 교수는 불법신흥종교로 출발하여 갖은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던 미미한 종교, 기독교가 어떻게 300년 만에 로마제국 전체를 주름잡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사회학의 다양한 관점을 사용하여 기독교 성공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의 결론에 이르면 스탁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저런 사회학적 분석을 넘어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게 된 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덕(virtu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로마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하여 신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힘을 자신의 뜻대로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존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사회에서 신이건 사람이건 권력자는 강해야 하고 약한 면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권력자는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정당한 근거없이 사람들을 벌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사람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로마 황제의 6살짜리 아들의 생일 파티를 검투사의 경기가 진행되는, 혹은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는 원형경기장에서 베푼 것은 권위란 잔인함을 불사하는 힘에서 온다는 로마제국의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죄인인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하면서 인간을 용서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자비가 한량없으시고, 또 이 신의 자녀가 된 자들은 다 이 신처럼 자비가 많아야 하고 희생을 치러야 마땅합니다. 이는 도무지 로마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사람들은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자비의 힘, 희생의 힘이 진정한 힘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발견은 로마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천주교 순교사화 중에 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사옥) 때 순교한 콜롬바 강완숙을 아시는지요? 강완숙은 바티칸을 당황시켰던 자생적인 천주교, 조선교구의 여신도회회장격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관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신도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했고 중국에서 몰래 들어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그를 도와 조선천주교의 부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런데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도들이 잡혀가고 죽어가자 주문모 신부가 자수를 하고 곧 강완숙도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주리를 틀고 때리는 갖은 고문에도 다른 신자들의 거취나 행적을 누설하지 않고, 변함없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강완숙에게 관리들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의 어린 아들 홍필주를 끌고 온 것입니다. 끌러온 아들 홍필주는 곧 가마니로 덮어씌워졌고 포졸들은 가마니 위로 난장(亂杖)을 가하였습니다. 거적 밑으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어린 아들의 울부짖음이 강완숙의 마음을 찢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강완숙은 배교하지 않았고 그의 완강한 태도는 서대문 밖 참수형을 자초하게 됩니다. 관리들의 본보기로 우차에 십자가를 세우고 강완숙을 십자가에 매달고 그 발아래 지지대를 두었다가 우차가 서대문 내리막길을 내려갈 즈음 지지대를 제거해버립니다. 강완숙은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달리는 소가 끄는 수레 위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반죽음이 되어 형장에 도착합니다. 관리들은 무슨 심보인지 그의 옷을 벗기고 참수하려고 하자 강완숙은 조선의 법도가 있거늘 어찌 부녀자를 벗길 수 있느냐고 따졌고 그의 말이 받아들어져 옷을 제대로 입은 후에 참수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강완숙과 같은 육체적 순교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정신은 여전히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면 언제나 조금씩 타협하게 됩니다. 이 교회는 새로운 길을 걷기로 작정하신 분들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16세기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새 길을 걷겠다고 앞서 간 바 있었고 또 그 길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서 가신 분들의 응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혹 낙심되고 지치고 힘들 때는 그분들의 환호성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날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오순절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은 주저앉고 싶은 우리들이 일어나도록 부추기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우리 앞서 가신 믿음의 선진들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이 되어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하심이 여러분의 삶과 이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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