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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238 추천 수 0 2012.08.27 2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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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1:39-4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6.11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마이크로 트랜드
히11:39-40

오늘 설교의 제목은 성서 본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마크 펜과. 키니 젤리슨이라는 두 사람이 함께 쓴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뜻은  단어 그대로 ‘작은 것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작은 것’에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추앙받던 미국의 ‘수정교회’가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없어서 경매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 그래서 한국의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다 그 교회를 성지처럼 방문하고, 그 교회처럼 큰 교회가 아니면 목회의 성공이 아니라던 ‘번영신학’에 커다란 충격파가 일어난 이즈음, 우리는 다시 ‘작은 것’ 또는 ‘작은 교회’에 대한 희망과 철학을 회복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서 속에 제시되어 있는 진리이기도 한데, 기독교는 산업의 발전과 물질문명에 편승해서 17세기 이후 수 백 년 동안 불행하게도 굴절된 모습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의 말씀은 “세상의 새로운 일들은, 세상의 위대한 일들은,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히브리서 11장은 노아, 에녹, 아브라함, 야곱, 모세, 라합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열거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발자취를 따르기에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끝부분 3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39절).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그 약속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좀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참 후대에 내려가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는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앞의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 하였습니다”(13절).
이것은 크리스천의 실존을 한 마디로 잘 정의해 주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자기 대에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약속 받은 것이 다음 대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그저 즐겁게 인생길을 가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반에 대해서조차 ‘빨리빨리’의 사고를 지닌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도상의 기쁨이지 정상에 기를 꽂은 자의 환호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9절에 이어서 4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현실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40절).

상반절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위한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우리를 위하여”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분들이 시작한 일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연관이 되고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사람인 오늘의 나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잘 것이 없어도, 작아도, 과거의 위대한 조상들은 ‘작은’ 현재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위대한 그들보다 현재의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입니까?  

하반절에 나오는“우리가 없이는”이라는 구절은 이런 의식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하신 일들도“우리가 없이는” “우리가 아니면”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 입니까?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1만 명이 모이는 교회였습니까? 아니면 어느 신실한 교우의 가정에 모이는 10여명 안팎의 교우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작은 교회였습니다. 바로 그들의 삶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형의 대.소와 상관없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해 온 것을 이어서 하는 것이요, 과거가 오늘에서야, 나를 통해 완성되어 간다는 위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크고 작은데 관심이 있지 않고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이냐, 어떤 일을 하는 곳이냐에 관심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진 믿음이고 교회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 받은 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매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구원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집을 완성해 가는 센터라는 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어야 하는 목적만 있었지 교회 그 자체의 외형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개 초대교회들은 30명 안팎의 작은 공동체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중심부에 있지 못했고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만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작기 때문에, 나는 못 배웠기 때문에, 그저 훌륭한 분을 따라 하기나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주변부 공동체이지만,“우리가 아니면”,“내가 아니면”믿음의 조상들이 꾸어온 꿈이 완성될 수 없다는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계승해야 할 역사의식이요 사명감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전체 교회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 작은 교회들은 농촌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도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은 교회들이 이 초대교회와 같은 역사의식과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을까요? 아니면, 대형교회와 비교하여 건물의 크기나, 화려함, 수천 명에 이르는 교인 수에 압도되어, 자신들이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형교회가 생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 되면서, 도시 주변에 와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와 직장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큰 교회에 집중하는 현상은 일시적 사회 현상일 수도 있고 기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최선의 목회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300 명의 용사를 뽑은 것을 보세요. 처음 선발된 32,000명은 너무 많았습니다. 첫 번 심사에서 22,000명이 떨어지고 10,000 명만 남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뽑은 정예 300 명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초대교회 때부터 존재해 온 가장 건강한 교회 모델은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들은 30-50명 규모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성경에 능하고 학식 있는 아볼로가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때 교인수가 모두 열 두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어디서도 교인 수의 적고 많음이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4세기 말 북아프리카 히포에 있던 한 교회는 도시에 있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어거스틴의 사역의 중심지였고, 그의 신학적 저작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삭소니 주 비텐베르크에 있던 교회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를 담임하던 마틴 루터는, 그 마을에 설립된 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대학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 조항을 써 붙였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유럽을 여행해 보면 대도시마다 큰 성당(Cathedral)이 있지만, 대개 그것은 웅장하게 돌로 지어진 집이고 썰렁한데, 유지비가 부족해서 관광객들에게 헌금을 부탁하는 문구를 입구에 적어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과거에 누군가가 큰 재산을 희사하여 지어졌을 것이지만, 지금은 유지가 어려운 박물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입니다. 본래 초대교회는 가족교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부를 때 “누구누구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가정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확대된 가족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작은 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유연성입니다. 작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 대해 대형교회보다 빨리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힘이 약해서 다윗에게 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골리앗은 너무 커서 몸이 둔했습니다. 작은 몸집의 다윗이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를 걸쳤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나아갔기에 날렵하게 움직여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이 한 때 유럽을 장악한 것도 날렵함과 유연성이었습니다.  

칼 더들리라는 사람은 작은 교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친밀하게 남아 있다.
빠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안정적으로 남아 있다.
많은 비용이 필요한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검소한 상태로 남아 있다.
복잡한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단순한 상태로 남아 잇다.
이성적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유동적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닻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익명의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우리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가 이렇게 작은 교회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도, 큰 교회에 대조하여 작은 교회를 무시하는 풍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듯이, 작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가 오늘의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교회에 속한 사람 하나하나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가 시골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 문은 열어놓았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망도 매우 어두웠습니다.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그의 가장 내밀한 슬픔과 패배감에 대해서 적었고, 지난주일 예배에 겨우 다섯 명만 참석했다는 것도 적었습니다. 즉시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거기에는 그 목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하거라.”

오늘날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숫자에 민감합니다.“오늘은 30 명밖에 안 왔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몇 명이 예배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구성원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것은 신자 개개인이 익명의 관객이 되고, 개개인이 빈자리를 메우는 숫자가 되는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야 가도 모르고 안 가도 그만인 교회, 각자가 알아서 낼 것 내고 받을 것 받는 슈퍼마켓 형 교회도 아닐 것입니다.

내가 안 가면 성가대 베이스 파트가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 무리를 해서라도 꼭 나와야 하는 교회, 자리 한 곳이 비면 수를 카운트 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염려해 주는 교회, 목사와 언제라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나 한 사람이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내가 나가야만 되는 그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아닐까요? “내가 아니면”성가대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주일학교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청년회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재정도 부족할 것이라는, 그런 사명감으로 가득 찬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가 아닐까요?  

비록 적은 수가 모인 공동체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꿈과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잇대어 살고 있으며, 그들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아니, 교회다운 교회일 것입니다. 그리하여“우리가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꿈꾸어온 것도 완성되지 않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사명감과 역사의식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룩한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손이요 나그네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회, 그리하여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말해주고,“너희가 아니면”우리 꿈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마이크로 트랜드’에 의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고, 꿈을 성취하며, 더 높은 이상을 꿈꿔 왔습니다. 한동안 기독교는 그걸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다시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을 반듯하게 읽습니다. 진리가 우리 속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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