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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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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3.12.8 주일설교 참사랑교회 http://charmsarang.onmam.com |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
히11:17~19
시험을 받음
영적생활의 초보 단계에서는 이웃에 대해 인내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고, 어느 정도 성장한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인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며, 성숙한 단계에서는 하나님께 대해 인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참고하여 자신의 영적인 단계를 진단한다면 당신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인내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7절)
우리말로 ‘시험’이라는 단어는 유혹, 테스트, 연단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혹은 사람이 육신의 욕심에 따라서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테스트는 학생들이 치는 시험과 비슷한 것입니다. 유혹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으로 우리를 밑으로 끌어내리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테스트와 연단은 우리를 위로 끌어 올려서 믿음을 더 강하게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유혹은 그럴싸한 모습으로 오고, 시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불합리한 모습으로 옵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기는 쉽고, 시험을 이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명령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하나님의 이 명령은 전혀 뜻밖이었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모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9: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과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작정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하나님께서 그토록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품에 전혀 맞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그의 후손이 큰 민족으로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과,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며 모든 백성이 메시아 안에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 약속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족의 대를 끊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시키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방해하고, 모든 진리를 파괴하고, 자신의 영혼과 구원의 소망을 희생시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단번에 잘라버리는 명령을 받은 듯하다. 이는 가장 처참한 시련이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기에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22:3)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지만 언제 바치라는 시간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이삭은 25년이나 기다려서 백세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일이었는데,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순종은 멸망당할 소돔에서 떠나는 롯의 경우와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소돔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이 밝아왔을 때, 천사는 롯에게 그의 가족을 이끌고 속히 성에서 나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롯과 그의 가족들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에서 떠나기를 주저했습니다. 보다 못한 천사가 롯과 그 가족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지체합니까? 지체는 또 하나의 불순종입니다. 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를 쪼개어 준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까지는 사흘이 걸렸습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22:4)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꼬집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는 삼일 동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사람은 매우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한 번 화난 김에, 또는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식어지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한강에 빠져 죽으러 갔다가 추워서 외투를 입으러 집에 들어갔는데, 결국은 마음이 약해져 죽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순간적으로 극과 극을 오고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순종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은 사흘간의 여행을 하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의 순종은 순간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확고부동하고 단호한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인들을 남겨두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라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는 데 방해를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뿐 아니라 끝까지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출발한 후 많은 갈등과 방해요소들을 이겨내고 모리아 산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제 이삭을 죽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눈에 통째로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는 25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삭이 반항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자녀들은 부모들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이삭을 향하여 칼을 내리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창22:9-10) 아브라함은 이렇게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지체 없이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고 하자, 이제 하나님께서 급해지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창22: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당황하시게 할 정도로 끝까지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모든 방해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해 버리고, 끝까지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함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은 매우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과, 그 아들을 통하여 많은 자손이 번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얼마나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까? 처음엔 믿음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더욱 확실하게 실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토록 어렵게 얻은 아들, 하나님의 그 확실한 약속을 이루게 될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명령 사이의 딜레마 속에서 즉시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결과로 얻은 아들, 장차 그 약속을 성취해갈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헷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이루어질 테니까요.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함이라”(18-19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모리아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22:5) 이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믿고 말한 대로 정말 그의 독자 이삭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은 순종을 쉽게 만들며, 그 어떤 어려운 경우에도 순종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모든 일이 끝장날 것 같은 경우에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잘못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어떤 경우에도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비유컨대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기에 불가능한 하나님의 명령에 지체 없이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칼을 빼들어 이삭을 찌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제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이삭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하)
여기 나오는 ‘비유컨대’라는 말은 ‘모형으로’, 또는 ‘예표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모형이요 예표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형은 무엇일까요? 이 사건에 대한 원형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메시아를 바라보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8:5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독자를 죽여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의 절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을 경험함으로써 아브라함은 독생자를 보내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주신 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정에서 아브라함을 급히 불러 독자 이삭 죽이는 일을 중지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죽게 하시는 일은 중지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삭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침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희생과 그 무궁하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며,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독생자를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명해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믿음의 조상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면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로만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요8:39)
진정한 믿음은 어떤 시험도 이깁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온전히 믿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깁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맡기면 우리는 순종할 수 있게 되며, 모든 고통과 번민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평안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면 순종할 수 없게 되고, 갈등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를 바치기까지 순종함으로써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순종의 절정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철저히 헌신한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깨닫고 체험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기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궁하신 사랑을 뜨겁게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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