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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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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060326 주일 낮 |
< 닭을 죽이지 마십시오 >
케빈 왕이 지은 “닭을 죽이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데이빗 에반즈라는 은행원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그는 지방의 한 작은 회사로 파견근무를 떠나는데, 그 회사에서 데이빗은 신선한 경험을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회의장으로 들어가는데 문 앞에 “닭을 죽이지 말라!”는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회의에 참석하니까 신참 사원이 고참 사원에게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솔직히 털어놓고 있었고, 고참 사원들은 실수의 원인을 말해주면서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어투로 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회의실 문 앞에 붙어 있는 “닭을 죽이지 말라!”는 벽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닭들은 무리 중에 한 마리가 피를 조금 흘리면 다 달려들어 그 상처 난 부분을 쪼아서 죽이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닭들의 회의가 예전 회사에서는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실수하면 다 벌 떼처럼 달려들어서 질책을 하니까 회사가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잘 되게 하려면 결코 ‘닭들의 회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닭들의 회의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을 계속 지적하면 자기도 죽고, 그 사람도 죽고, 그 공동체도 죽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항상 격려하는 입술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자기 마음 안에서도 닭들의 회의가 벌어집니다.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불평하면서 마음 안에서 닭들의 회의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고난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닭들의 회의를 물리치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오히려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가끔 성도들이 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너무 태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보여드릴 때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목회를 통해서 분명히 체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 그래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것 하나는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너무 확실해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때로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 마음이 가장 정리가 잘 될 때는 바로 새벽시간입니다. 저는 문제가 생기면 새벽에 교회에 나오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분당에서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새벽에 보통 3시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저녁 11시, 12시에 자도 어김없이 3시쯤에는 나왔습니다. 요새는 많이 게을러져서 새벽에 나오는 시간이 평균 3시 40분쯤입니다. 그런데 기도제목이 생길 때는 그 시간이 다시 3시 이전으로 환원됩니다. 그처럼 새벽에 조금 일찍 나와 목양실에 앉아 조용히 말씀과 기도에 깊이 젖으면 신비한 평화가 임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새벽이 신비한 치유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은 줄이고 말씀과 기도와 감사를 늘리면 그 힘든 일이 봄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왜 욥이 고난을 이기고 나중에 2배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무엇보다 입술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욥이 끔찍한 고난을 당하자 그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
그때 욥기 2장 10절에서 욥이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당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즉 “어떻게 항상 잘 되기만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축복도 있으면 시련도 있고, 좋은 일도 있으면 나쁜 일도 있습니다. 좋은 일만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통해 욥이 모든 일에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멋지게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 죄가 들어오고 나가는 주된 통로 >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사람에게 죄악이 들어오는 주된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피하려면 죄의 자리에 가지 않고, 죄를 보지 않도록 때로는 지혜롭게 눈을 잘 감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평신도 때 기도하는 중에 눈을 뜬 적이 제 기억에는 한번도 없습니다. 기도할 때 눈을 뜨고 남을 보는 것을 불경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기도할 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라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불경죄를 짓는 것 같아서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기도원에서는 옆에서 누가 밟고 지나가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대학선교회 활동을 할 때, 아주 특이하게 방언기도를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호루라기 소리를 내는 방언을 하는데, 속으로는 누가 그런 기도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눈을 뜨고 보면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누가 그렇게 기도하는지 몰랐고 아직도 모릅니다.
어느 때에는 평신도가 너무 기도를 잘합니다. 그러면 너무 궁금해서 가끔 실눈을 뜨고 “기도문을 보고 기도하나?”하는 것을 알고 싶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 불경죄를 짓는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에 예배 중에 마이크 시스템이 이상하다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 중에 눈도 뜨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기도 중에 눈을 뜨면 무슨 불경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눈은 죄와 유혹이 들어오는 주된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눈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는 주된 통로가 되지만 반면에 사람으로부터 죄가 나가는 주된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입입니다. 언뜻 보면 말로 짓는 죄는 죄가 아닌 것 같지만 무엇보다 큰 죄입니다. 물건을 도둑질 당하면 마음이 상하지만 며칠이면 잊어버립니다. 반면에 말로 마음이 상하면 몇 주, 몇 달이 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말은 그 어떤 죄보다 더 나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이 잘못된 말입니까? 가장 잘못된 말은 정확하지 않은 말로 의도적으로 사람을 모함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무고질입니다. 그 경우는 폐해가 너무 심해서 법적으로도 무고죄라는 조항을 두어 제재를 합니다. 두 번째로 잘못된 말은 비난하는 말을 해서 사람 사이를 나쁘게 하고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이간질입니다. 세 번째로 잘못된 말은 어떤 사람의 잘못을 남에게 전하는 고자질입니다.
우리는 제일 나쁜 무고질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쁜 말인 이간질과 셋째로 나쁜 말인 고자질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말이 아닌 것 같지만 잘못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높게 보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자기가 먼저 실천적 삶을 보여주지 않고 남에게 충고만 하려고 하는 충고질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충고질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선생이 되지 말라 말씀의 뜻 >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말에서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선생님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대화를 할 때 선생 노릇을 하면서 충고질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1.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뜻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에서 실수한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말이 되어 큰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문 2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말은 온 몸도 굴레 씌운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말의 위력이 큰데, 본문 3-6절 말씀에서는 혀의 위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3가지 도구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본문 3절에서는 혀를 타는 말(horse)을 조정하는 재갈로 표현하고 있고, 본문 4절에서는 혀를 배를 움직이는 키로 표현하고 있고, 본문 5-6절에서는 혀를 모든 것을 태우는 불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혀가 작아도 놀라운 위력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그 놀라운 능력을 선용할 것인가, 악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말로 큰일을 이루어낼 수도 있고,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생명을 죽이는 위력도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말의 위력을 생명을 죽이는 힘으로 각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말이 엉뚱하게 잘못 전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을 주의해서 듣고 주의해서 말해야 합니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한 젊은 부부가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총각 친구가 전화를 했습니다. “축하해! 내가 갈 때 뭘 좀 사갈까?” 그때 결혼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약국에 들려 유축기 하나 사줘!”
그런데 이 총각 친구가 유축기가 뭔지 몰라서 퇴근길에 약국에 가서 압축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약국에서는 철물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철물점에서 압축기 달라고 했더니 철물점 주인은 화장실이 막힌 줄 알고 화장실 뚫는 압축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이 친구가 생각을 했습니다. “시골 병원이라 화장실이 잘 막히나보다.”
병원에 도착하자 친구가 “유축기 사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왔다”고 말하고 신문지에 싼 압축기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결혼한 친구가 한심해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내 마누라가 공룡인 줄 알아? 이걸로 어떻게 젖을 짜!”
그렇게 말을 잘못 알아들어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항상 주의해서 하고 특히 안 좋은 말인 경우에는 더욱 주의해서 듣고 주의해서 말해야 합니다.
2.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해야 한다는 뜻
잘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듣는 것입니다. 요즘 세대간, 계층간의 대화의 단절이 심각합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가 하는 행동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행동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기성세대도 한 때는 신세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귀를 열어 서로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노래 중에 랩을 참 싫어했습니다. 90년대 초 교계에서 누군가 칼럼 하나를 써서 “저건 뉴 에이지다!”라고 라는 딱지를 딱 붙이면 영화든 음악이든 다 백안시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진보적인 크리스천 록이나 크리스천 랩까지 생겨서 “그것이 옳은 것인가?”하는 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저도 약간 보수적인 편이라 랩 하면 질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들어본 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색깔의 문제(Question of Color)”라는 곡입니다. 왜냐하면 가사 내용이 “인종차별을 하지 말고 서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랩은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이 조금 깨졌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딱지 붙이기와 편견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제일 지표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내세우면서 진짜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랩을 하는 사람들보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더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지만 율법주의자는 혹독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처럼 성령님께서도 랩을 하는 사람들보다 편견을 가진 사람을 더욱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편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루빨리 그 편견을 깨야 합니다. 그것을 깨지 않으면 자신이 깨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사랑으로 세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주의를 혐오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자신이 율법주의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자처럼 자기를 진리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다 죄인입니다. 사람의 의견 중에 완전한 의견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 말만 하지 말고 남의 말을 잘 들으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웅변이 아니라 경청입니다. 입보다 귀가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잘 말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18장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말이 많으면 곧 밑천과 허물이 드러나지만 무식한 사람도 말이 없으면 교양인처럼 보입니다.
잠언 10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많이 말하는 것보다 많이 듣는 것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만 많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3. 말보다 실천을 먼저 해야 된다는 뜻
가끔 충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슬아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조차도 실천하지 못하는 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선생도 아니면서 선생인 것처럼 충고하기를 좋아하면 그 말한 만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아무래도 많아지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 더 야단맞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어떤 분은 그 말씀을 “말씀보다 능력과 은사가 중요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전혀 문맥과 다른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말한 대로 먼저 실천하며 살라는 도전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은 줄이고 행동은 늘려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복된 신앙은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어떤 분은 모태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이 된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연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왕년에 내가 어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왕년을 보지 못합니다. 현재 그 사람의 삶과 신앙생활을 볼 뿐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간증거리와 기적과 체험이 있어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현재의 삶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가끔 말씀을 엉뚱하게 적용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지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내에 갔다가 주차공간을 찾지 못하고 불법 주차를 하고는 운전대 앞창에 메모를 남겼습니다. “저는 아무개 교회 목사입니다. 주위를 열 바퀴나 돌았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이곳에 주차했습니다. 잠시 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단속원님! 용서하세요.” 그렇게 써 놓고 그 다음에 주기도문 한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잠시 후, 주차 단속원이 그 쪽지를 봤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딱지를 떼고 역시 메모를 남겼습니다. “저는 이곳 주차 단속원입니다. 불법 주차 차량에 딱지를 떼지 않으면 저의 일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기 편의대로 이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가족들과 화해를 하려고 하지는 않고 계속 갈등하고 싸우면서 주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먼저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자꾸 말씀을 비틀지 말고 순수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 말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를 말할 때 항상 주의해서 하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많이 하고, 말한 대로 실천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를 잘못 쓰면 지옥의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불행하게 사는 분들을 보면 대개 입술에서 먼저 망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혀를 잘못 쓰면 철저히 망하지만 반면에 혀를 잘 쓰면 혀는 가장 위대한 성공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나 내 자녀에게 믿음과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믿음의 말과 축복의 말과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위축되지 말고 스스로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보면 대개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을 위해 자본도 조금 필요하고, 학력도 조금 필요하고, 인맥도 조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말입니다. 아무리 약점이 있어도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격려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약점이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하고 겸손해질 수 있다면 사람에게 약점이 있는 것은 오히려 좋습니다. 배우자가 약점이 하나도 없으면 사람으로 보입니까? 조금 심하면 약간 맛이 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목회자가 약점이 하나도 없으면 찬바람이 돌아서 감히 범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점을 덮어주며 사는 것입니다. 누가 약점이 몇 가지 있다고 그것을 들춰내고 수군대면 안 됩니다. 약점이 있어도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어! 나는 그 사람을 믿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고, 그것이 바로 제가 작은 목회를 하지만 행복하게 웃으며 목회하는 비결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약점 때문에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점이 있어도 주님을 꼭 붙잡으면 어떤 약점도 충분히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약점 때문에 믿음이 약해져서 “나는 가망이 없어!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라고 약한 말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의도적으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어려울수록 더욱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분명히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온갖 부정적인 언어와 부정적인 생각을 멀리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면 정말 삶이 힘들어지지만 “사는 것이 힘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없다!”고 하면 문제없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말할 때 부정적인 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의미 없는 인생, 망할 놈의 기업, 썩어빠진 정치판, 희망이 없는 교회..”라는 말들을 멀리하고, 어떤 경우에도 닭들의 회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믿음을 말하고, 소망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인생은 성공적인 인생이 될 것이고, 우리 가정도 복된 가정이 될 것이고, 우리 교회도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입술을 잘 지키십시오. 입술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하면 행복한 인생이 반드시 펼쳐집니다. 항상 입술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인간관계를 아름답고 창조적인 관계로 만들어 가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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